소설리스트

199화 (199/214)

“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스토얀이 노릴 테니 히든 특성이 크르스니크라는 걸 꼭 숨겨야 한다는 신신당부를 몇 번이나 들었던가. 설마 들통이 났나 싶어서 상태창을 보니 여전히 감추어져 있었다.

눈동자에 서린 경계의 빛을 알아본 소년이 달래듯 말했다. 인유신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인데도 불구하고 심유한 세월의 깊이가 깃든 얼굴이었다.

“놀랐니 놀랐다면 미안해. 스토야 님에게 얘기를 들었어. 나는 여름의 태양과 불의 신으로부터 마법과 그분의 이름을 받은 최초의 크르스니크야.”

직감대로였다. 그보다 크르스니크라고 소년이 직접 말하자 인유신은 다시 깜짝 놀랐다. 그 단어가 스토얀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된다.

놀란 표정을 읽은 소년이 재차 말을 이었다.

“괜찮아.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영체야. 지금은 너밖에 볼 수 없어.”

“어, 어떻게…….”

“원래대로라면 죽은 지 아주 오래된 나는 땅 위로 올라올 수 없었겠지만.”

소년이 손가락으로 저 먼 어둠에 삼켜진 백두산을 가리켰다.

“마침 방주 때문에 시간이 중첩되었거든. 우리아쉬들의 시대는 신들이 지금보다 훨씬 깊이 인간에게 관여했던 신대의 시간이지. 내가 살았던 시간이기도 하고. 그 시간이 있어서 내가 다시 땅을 밟게 된 거야.”

“아…….”

그제야 스토야의 말이 기억났다.

『방주의 시간이 뒤틀려 있으니까 최악의 상황에는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도움이 바로 이 소년이었나 보다.

“상황이 안 좋으니 바로 물을게. 스토야 님에게도 들었지만 한 번 더 확인을 하고 싶거든. 너는 평범하게 살아온 것처럼 보여, 나처럼. 맞지”

“예…….”

“그런데도 크르스니크로 각성하고 싶어 세상에 종말을 불러내는 괴물과 대적할 수 있을 거 같아”

대답하기 전, 인유신은 스토야와 나누었던 대화를 천천히 되짚었다.

『너는 규하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니』

그때 자신은 무어라 대답했던가.

〈모든 것이요.〉

『……모든 것』

〈규하 씨는 언제나 저를 지켜 주고, 구해 줬어요. 구해 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나 했던 저 같은 인간은 되게 귀찮고 번거로울 텐데도……. 언제나 도움만 받았던, 아무 능력이 없는 저라도 규하 씨를 지켜 줄 수 있을까요〉

『…….』

〈제 모든 것이 규하 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현규하는 절대 크르스니크라는 히든 특성을 스토얀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스토얀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는 이 상황만 보아도 명백했다. 진조에 가까운 뱀파이어로서의 능력, 하나의 세계를 지탱하는 왕으로서의 능력, 그중의 무엇을 쓰더라도 인유신을 쉽게 해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사실이 대답을 망설일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인유신은 낮게 속삭이듯, 그러나 또렷한 음성으로 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요. 아뇨, 할 수 없는 거라도 노력해서 할게요.”

“…….”

말없이 그를 보던 소년이 흐린 미소를 떨구었다.

“……너는 나와 비슷해 보였지만 정반대로구나.”

“그, 그러면 제가 부족한 거예요”

“아니.”

소년은 가슴의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듯한 아주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거듭 부정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인유신은 그가 굉장히 씁쓸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아니야. 아주 좋아. 증오와 살의에 미쳐서 심장을 바친 나보다 훨씬 좋아.”

다시금 인유신을 향하는 소년의 눈동자에 하얀 광채가 맺혔다.

“너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내가 그러했듯이.”

‘씨발, 정말 좆같군.’

공태성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누르며 욕설을 씹었다. 이 환영은……. 그래, 마치 침식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가 보여 주는 환영을 극도로 강화한 것 같았다. 세계가 멸망하는 순간을 맞이한 이들의 절망과 비탄 속에, 새로운 멸망을 연출하며 고통을 자극하는 악몽은.

그가 그 멸망에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민끝녀와 민안나가 다른 세계에서 안전하게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한 이성의 판단과는 별개로 환영의 여파가 남은 손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처참한 주검을 부둥켰던 손이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하여 마음을 가라앉힌 공태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신을 차린 사람은 없나.’

근처에서 장범이 앓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등허리를 꺾어서 악몽에서 깨워 줄까 하다가 아공간에서 마나 회복 포션을 꺼냈다. 우선 한 병을 까서 바닥이 난 마나를 보충한 공태성은 다른 한 병도 장범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대로 목을 젖혀 약물을 삼키게 했다. 목울대가 꿀꺽하고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장범이 격하게 기침을 쿨럭거리며 눈을 떴다.

“우엑! 내 입에 누가 똥물을…….”

“남은 건 알아서 마셔라.”

“아오…….”

그 지독한 맛의 정체가 마나 회복 포션이라는 걸 알아차린 장범은 오만상을 쓰면서 마저 마셨다.

“내 발로 집구석에 기어들어 가서 가족들이랑 하하 호호하는 환영 봤어, 씨발……. 자살할 뻔…….”

나름대로는 착한 말 고운 말을 쓰는 장범의 입에서 드문 쌍욕까지 나왔다. 최악의 악몽을 목격하고 쌍욕 한 번으로 깬 건 오히려 선방한 거다.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 포복 자세로 엉금엉금 기어 왔다. 허정현이었다.

“목소리 조금 더 낮추는 게 좋겠다. 그리고 포션 나도 좀 줘라.”

“누나도 일찍 깼네”

“뭐, 나는 트라우마나 최악의 두려움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 어차피 망할 세상이잖냐. 최 팀장이 여기에 있었어도 금방 깼을걸”

마나 포션을 다 마신 허정현은 인 이어를 톡톡 두드려 보았다.

“국장님이 있던 지휘부나 서낭당도 전멸한 거 같군.”

“그럼 다른 사람들을 깨워야 하나”

“아니.”

허정현은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너무 어두워서 쓸 만한 헌터를 찾기 힘들어. 어중간한 헌터는 깨워 봤자 방해만 될 거다. 사제와 마법사부터 깨우는 게 효율적일 듯한데…….”

사위를 잠식한 어둠은 모든 걸 집어삼키고 있었다. 악몽 속에서 신음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들리기는 하는데, 어둠이 너무 짙으니 방향 감각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허정현도 가까운 위치가 아니었으면 찾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은 이 세 사람이 어떻게든 해야 했다.

“현규하는……. 젠장, 안 보이는군.”

현규하와 스토얀이 있던 방향도 짐작되지 않았다. 인유신도 마찬가지였다.

허정현이 초조한 기색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까 스토얀 맞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하나밖에 없는 자식 아닌가 뭐 얘기 들은 거 없어”

“글쎄. 규하랑 유신이는 둘이서만 비밀을 쑥덕거려서 잘 모르겠어. 크게 다친 거 같은데 위치를 통 가늠할 수가 없으니…….”

“괜찮을까”

“안 죽는다.”

단호하게 부정한 사람은 공태성이었다.

“그 자식은 배 뚫린 거 가지고는 안 죽어. 그렇게 쉽게 죽을 놈이었으면 내 손에 벌써 죽었을 거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신뢰구만.”

헛웃음을 머금은 허정현은 자신의 아공간에 불을 밝히는 아이템이 있다는 걸 문득 떠올렸다. 그 아이템을 막 꺼내려던 때, 어둠 속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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