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규하와 다니면서 귀속 아티팩트가 자아내는 과거의 시간을 여러 번 보았으나, 지금과 같은 광대함을 목격하는 건 인유신도 처음이었다.
- Κύριε, ἐλέησον. Χριστὲ, ἐλέησον. Κύριε, ἐλέησον.(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 لا إله إلا الله محمد رسول اللهه(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신의 사도이다.)
창공에서 신에게 올리는 기도까지 은은히 울리고 있었다. 신실한 신도들의 음송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인들에게 타격이 되는 듯했다.
“야, 야! 정신 챙기고 빨리 잡아! 고유 영역은 오래 못 가!”
당혹감에서 겨우 벗어난 헌터들이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와 몸에 걸리는 부하로 인해 정신이 혼미한 거인들을 공격했다.
현규하도 반응이 한결 둔해진 거인 하나의 머리에 우르반 대포(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큰 역할을 했던 거대한 대포.)를 떨어트려 뒤통수를 깨부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시각각 그의 마나가 소모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에 인유신도 틈틈이 계속 버프를 걸어 주었다.
“좀 아쉽긴 하네요.”
“이만한 일을 하고 있는데도 아쉬운 게 있어요”
“뭐, 히든 보스의 고유 영역만은 못 하니까요. 그놈들은 게이트 안이 완전히 자기 영역이니까 고유 영역을 전개하면서 심상의 배경이 되는 사람들까지 마수처럼 써먹을 수 있거든요.”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고유 영역에 무수했던 전사들을 떠올리니 인유신은 괜히 오싹해졌다. 그러니까, 이 광경이 히든 보스의 고유 영역이었다면 10만이 넘는 마수들이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 숫자면 거인들도 다 잡았겠는데요”
“그전에 내가 마나를 쪽쪽 빨려서 미라가 되는 게 먼저겠지만요.”
마나를 덜 소모하면서도 거인에게 타격을 줄 방법을 찾느라 주변을 둘러보던 현규하의 시선이 언덕 위에 있는 범선에 다다랐다.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다스리던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각만을 방어하기 위해 입구를 쇠사슬로 차단했다. 이에 오스만의 메흐메트 2세는 언덕을 넘어 이동한 함선으로 금각만을 기습했다. 그 자취였다.
마침 활을 쏘고 있는 장범까지 발견한 그는 그대로 납치하여 날아갔다.
“으어! 규하야, 이거 뭔데”
“바람이 필요해서요.”
마나를 덜 소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의 마나를 소모하는 게 아니겠는가.
언덕 위까지 온 장범은 범선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내가 돛대에 바람을 세게 불어서 저 배를 거인한테 날려 보내라고”
“대충 각도 보니까 잘 맞히면 거인을 한 번에 갈아 버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세밀한 방향은 내가 조정하면 되고.”
“아니, 그게 말은 쉬워 보이는데…….”
“시간 없으니까 빨리해요.”
“어, 어어…….”
장범은 ‘이게 되나’ 싶은 표정이었지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는 마나를 쥐어짜서 거대한 돌풍을 일으켰다. 돌풍을 받은 돛이 찢어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며 언덕에서 빠르게 미끄러졌다.
돛대 위에 선 현규하의 등에 매달려 있던 인유신은 비명을 질러 버렸다.
“우와아아악!”
“놀이공원 온 거 같네요.”
“히야아악!”
솔직히 인유신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사람이 죽어 가는 싸움터에서 떠올려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얼른 지워 버렸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처럼 배가 하늘을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가속도는 아주 충분했다.
“이게 무……!”
커다란 함선의 무게와 언덕에서 미끄러지며 붙은 가속도. 이 두 개의 조합은 거인이 미처 말을 뱉기도 전에 육체를 강타했다. 거인에게 부딪치는 굉음과 함선이 박살 나는 굉음 중 무엇이 더 컸을까.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해자에 발이 빠지며 성벽으로 무너진 거인이 먼지로 스러졌다. 현규하가 휘파람을 불었다.
“원 샷 원 킬.”
“흐아아아…….”
“저기 적당한 위치에 거인이 하나 더 있는데 한 판 더 가죠.”
“네에에…….”
인유신은 멀미가 날 것처럼 어지러운 와중에도 흐느적거리면서 버프를 다시 한번 걸었다.
우리아쉬들이 방주에서 모두 빠져나왔음에도 허공에는 그 불길함이 남아 있었다.
치유되지 못하는 흉터처럼 꿈틀거리는 흉흉한 징조를 향해 날아오르는 하얀 새가 있었다. 사람 이상으로 감각이 예민한 동물들이 백두산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볼 때 퍽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마나의 눈까지 날아오른 새는 깃과 같은 색인 하얀 부리로 흉터를 쓸듯이 문질렀다. 흉하게 벌어진 그 흔적은 물로 씻어 내는 것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스토얀이 자아낸 불길함은 그렇게 사라졌다.
흰 새는 날개를 퍼덕이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발이 땅에 닿기 직전, 그곳에는 흰 새가 아닌 갈색 머리칼의 소년이 서 있었다. 평균적인 키에 평균적인 체형, 평균적인 용모의 소년은 예스러운 옷차림만 아니라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어디서든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소년은 산 중턱에서도 육안으로 보일 만큼 넓게 펼쳐진 고유 영역을 보며 감탄성을 발했다.
“굉장하네. 저게 바로 섭리로 인한 힘이라는 거지 마법도 신대와는 방향성이 좀 다르다던데 궁금하다.”
고유 영역을 눈에 담으며 소년은 천천히 산에서 내려갔다. 나직한 혼잣말이 바람에 쓸려 사라졌다.
“스토야 님의 기우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산길을 내려가는 소년의 발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18.
[고유 영역 ‘천 년 제국의 종말’이 해제됩니다. 모든 강화 및 약화가 사라집니다.]
마지막 거인이 쓰러지는 것보다 현규하의 마나가 바닥나는 게 더 빨랐다. 버프를 주던 인유신의 마나가 바닥나는 건 더 빨랐다.
‘천 년 제국의 종말’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현규하와 인유신은 박살이 난 탑 옆에 뻗었다. 하지만 표정에 근심이나 두려움은 비치지 않았다. 거인 또한 최후의 한 명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네놈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온몸에 상처가 낭자한 거인이 울분에 찬 포효를 터트렸다.
“뭐라는 거야! 빡돌면 둠네제울 신전이나 무너트리든가, 왜 우리한테 지랄이야!”
“그거 신성 모독인데요!”
헌터들도 악만 남은 건 마찬가지였다.
“세엣!”
올리비아가 발악에 가까운 기합성을 지르며 워 해머로 거인의 발목을 후려갈겼다. 고유 영역이 해제되며 육체에 걸리던 디버프는 사라졌지만 그 이상으로 부상이 위중한 거인은 감각까지 상실되자 완전히 균형을 잃었다.
“크르릉!”
거대한 백호가 돌진하여 휘청거리는 상체에 부딪혔다. 마치 교통사고라도 발생한 것과 같은 타격음이 울리고, 늑골이 박살 난 거인은 그대로 나가쓰러졌다.
그리고 등이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지옥의 겁화를 두른 칼날이 그 목을 베었다.
쿵.
육체로부터 절단된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짧았다. 엉망이 된 대지가 무게를 받아 내자마자 먼지로 화하여 스러졌으므로. 일그러진 입술이 내뱉으려던 것은 신을 향한 저주였을까. 원망이었을까. 이제는 영영 알지 못하게 되었다.
최후의 거인이 절명했음에도 사람들은 바로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뻗어 있던 두 사람이 더 빨랐다.
예의 그 맛없는 마나 회복 포션을 마시고 오만상을 찌푸리던 인유신은 현규하가 까 먹여 주는 초콜릿을 오물거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겼네요.”
“내 마나를 극한까지 뽑아다 썼는데 지면 억울하죠.”
팔을 베고 누운 인유신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면서 현규하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계기가 된 것처럼 환호성이 터졌다.
“우와아아!”
“끝났다아아!”
“우리가 진짜 이긴 거지!”
인 이어도 만 국장과 오퍼레이터들의 함성으로 시끄러웠다. 아마 서낭당도 비슷한 광경일 것이다.
한낮부터 시작했던 전투는 해가 넘어가고 난 뒤에야 겨우 종료되었다. 사상자는 헤아릴 수도 없으며, 발을 딛고 서 있는 헌터들도 부상을 치료하고 마나를 한계까지 쥐어짠 후유증이 남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겼으며 오늘도 살아남았다.
긴장이 사르르 녹았다. 인유신은 그제야 실없이 헤실헤실 웃으며 현규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이겨서 좋죠”
“그것도 그렇지만요, 제가 규하 씨한테 처음으로 도움이 되었잖아요.”
무엇보다 기쁜 건 비로소 현규하의 걸림돌이 아니라,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8세의 마나 증폭과 아티팩트의 조력이 없었으면 어려웠을 일이지만 그래도 기뻤다.
마침 기절했던 8세도 겨우 깨어난 참이다. 인유신은 파우치 안으로 손을 넣어 고마움을 담아 8세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 말에 현규하는 오히려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신 씨가 도움이 된 적이 없다니 무슨 말이에요.”
“그야, 저는…… 능력도 별거 없고, 누구를 구할 수도 없고, 규하 씨에게는 걸림돌만 되었으니까…….”
얘기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인유신을 가만히 보던 현규하가 그를 부축하여 앉혔다. 마나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어서 안색이 아까보다 나아진 인유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나긋했다.
“나로는 안 돼요”
“네”
“유신 씨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쯤 앞뒤 없이 아버지한테 들이받아서 목이 날아갔거나, 거인이 나오든가 말든가 내버려 뒀거나, 고유 영역을 못 써서 죽었거나, 뭐 대충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보내고 있겠죠. 어쩌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고요.”
“…….”
“하지만 지금의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요.”
“…….”
“유신 씨는 이미 나를 구해 주었는데, 그거로는 부족한가”
소방관이었던 부모님이 생존했다면 그 후로도 아주 많은 사람을 구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부모님이 희생하여 생존한 인유신은 현규하라는 사람 단 하나를 구했다.
그것이 부족한가.
내가 살아남을 가치는 없는 것이었나.
인유신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몇 번이고, 거듭해서, 부정하며.
“……아니요, 아니에요.”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현규하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살아간다는 의미를, 진정한 삶을 볼 수 있게 해 준 그를.
〈왜 너 같은 게! 하필 네가 살아서!〉
아주 긴 시간, 제 안에 녹슨 칼날처럼 박혀서 상처를 긁어 대었던 할머니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고요히 잦아들었다.
완전히 잊힌 건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톡톡 튀어 오르듯이 기억이 재생하여 몹시 슬퍼지고, 자책하게 되겠지만 괜찮았다. 그가 곁에 있다면, 정말로 모든 게 괜찮았다.
그가 보는 미래를 자신도 보고 있으니.
인유신은 울음이 나올 것 같은 눈을 세차게 깜빡거리며 자신의 뺨을 쓰는 현규하의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저희 돌아가면, 나중에요, 엄마랑 아빠한테 인사하러 같이 가요. 옛날에 날 구해 줘서 고맙다고, 두 분한테 꼭 말하고 싶어요.”
현규하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먼 곳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헌터들이 고유 영역 덕분이라면서 두 사람을 헹가래질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장범은 특히 신난 표정이었다. 인 이어 너머의 만 국장은 뽀뽀든 뭐든 다 해 주겠다며 난리가 났다.
그 모든 소란이, 인유신의 오감에 닿지 않았다.
“우리 아들은 왜 남의 부모만 생각할까”
가늘게 열린 입술 사이로 선혈이 왈칵 터졌다.
현규하의 복부로, 피에 젖은 흰 손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