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214)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

[현재 상태  애정. 살의. 분리 불안. 고민.]

어떤 고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감정이 고통이나 절망이 아니어서 조금은 안도했다.

“삐우우…….”

불안한 마음을 읽었는지 파우치의 8세가 작게 울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위로해 주려는 것처럼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이 작은 몸짓이 정말 위로가 된다.

‘내가 흔들리면 안 되잖아. 도움은 못 되겠지만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인유신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뒤 서낭당 안으로 돌아가려 했다. 큰 변화가 없던 ‘후긴의 눈’에서 이질적인 모습이 보인 건 그 무렵이었다.

“어”

거인을 사냥하고 헌터들을 지원하던 현규하의 움직임이 변했다. 전방에서 빠져나온 현규하는 서낭당 근처의 건물까지 이동한 뒤 어수선하게 움직였다. 눈을 찌푸리면서 보니 움직이는 모양이 마치 SOS 같았다.

‘규하 씨가 진짜 위험해서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는 건 아닐 테고…….’

아마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 거인과의 싸움이 시작되며 정확한 오퍼레이션을 위해 인 이어를 제외한 모든 통신 기구는 정지되어 있었으니.

버프나 힐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유신은 얼른 겉옷을 챙겨 입었다.

“나가시려고요”

울타리 밖에서 서낭당을 지키고 있던 헌터 하나가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슨 일이냐고 붙잡힐지도 모르겠다.

“아까 식당에 두고 온 게 있어서요.”

“식당까지는 안전한 구역이지만 그래도 되도록 일찍 돌아오세요.”

꾸벅 인사한 인유신은 식당으로 가는 척하다가 현규하가 기다리고 있는 건물로 뛰어갔다.

“규하 씨!”

현규하가 품에 안기라는 듯이 양팔을 벌리고 있었으나, 다친 곳이 없는지 알아보는 게 더 급했다. 옆구리 옆으로 쏙 빠져나와서 일단 그의 등부터 살피니, 현규하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내 가슴보다 등이 더 좋아요 광배근 만져 볼래요”

“규하 씨는 다쳐도 다쳤다고 말을 안 하니까 그렇죠.”

“먕!”

8세도 동의한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가슴과 등 중 굳이 어디가 더 좋냐면……. 못 고르겠다. 가슴은 안겼을 때 근육이 탄탄해서 좋고 등은 업혔을 때 넓은 그…….

‘아니, 잠깐!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하마터면 현규하에게 또 휘말릴 뻔했다. 인유신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릅뜨며 그를 관찰했다. 가슴과 등의 선호도는 둘째 쳐도, 부상을 입은 곳은 없어 보였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피비린내도 거인의 피인 것 같고.

최악의 상상, 그러니까 힐러로도 치료가 안 되어서 자신을 부른 건 아니었기에 인유신은 겨우 안심했다.

버프부터 주려는데 현규하가 한발 더 빨랐다. 인유신의 손을 제 양손으로 감싼 그의 시선이 묘한 빛으로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장시간의 싸움으로 인한 아드레날린이나 엔도르핀의 흥분 따위는 전혀 깃들지 않은 침정한 눈동자가 인유신을 향했다.

“유신 씨,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일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당신에게 꼭 대답을 듣고 싶거든.”

“뭔데요”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까놓고 말하자면 플랜 B까지 실패할 거예요. 이 싸움은 졌습니다.”

“……거인도 숫자가 많이 줄지 않았어요”

“거인이 몰살당하는 것보다 남은 헌터들이 몰살당하는 속도가 더 빠를 거 같네요. 거인이 하나라도 생존한다면 우리가 지는 거죠.”

현규하의 목소리는 사실을 전할 뿐이라는 것처럼 담담했다.

플랜 A는 응격 마법진만으로 거인을 죽이는 것, 플랜 B는 헌터들이 나서는 것, 플랜 C는 후퇴하여 각 도시에서 대응하는 것이다. 각지의 상위 헌터들을 모조리 소집해서 동원했으니만큼 플랜 C까지 밀린다면 더는 승산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하는 인유신의 눈가에 현규하가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나 혼자 세워 뒀던 플랜 D가 있는데, 유신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도움이요”

인유신은 오히려 의아함을 느꼈다. 그에게 도움이 되기를 언제나 바랐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능한 게 있을지 모르겠다.

“유신 씨가 늘 나를 걱정하면서 해 주는 게 있잖아요.”

“힐이나 버프요”

아까는 위험하니 싸움터까지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했던 현규하다. 심정이 변한 건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기 때문일까.

인유신은 ‘그거라면 당연히 해야죠!’라는 요지의 말을 이으려 했으나, 현규하가 엄지로 그의 입술을 살짝 눌렀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요, 유신 씨가 도울 필요는 없어요. 내가 여기에서 굳이 싸울 필요도 없으니까요. 나는 이타적인 인간이 아닙니다. 까놓고 말해서 여기 사람들이 다 죽든 말든, 거인들이 몰려오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에요. 나 혼자라면 유신 씨만 데리고 어디로든지 도망치는 게 가능하거든요.”

“…….”

“플랜 D는 내가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마나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고 쥐어짜야 합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유신 씨만 데리고 도망치면 되는데.”

“…….”

“만약 여기가 우리가 살던 세계였다면, 유신 씨의 안락함을 보장하려 플랜 D든 플랜 Z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지만…….”

현규하는 뒷말을 굳이 잇지 않았으나 인유신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차피 거인이 나타나지 않았어도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는, 냉소적이고 무심한 말이었을 터다.

즉 그의 말은 이것이었다.

내가 이아드를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가 있나.

현규하는 입술에서 손을 뗐지만, 인유신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대답이 ‘윤리적’이며 ‘옳은’ 대답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성으로 알고 있다.

언젠가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라도, 현재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을 위해.

이 세계가 반드시 멸망을 맞이하게 되리란 건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현실은 냉정한 법이고, 꿈처럼 아름답지도 않다. 자신이 보지 못한 세상의 다른 곳에서는 잔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았다. 적어도 인유신이 알고 있는 이들은 아니었다.

당장 죽어도 거리낄 게 없다는 최진혁도, 자식에게 이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허정현도, 아이에게 미래를 주려 하는 올리비아도, 스스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절망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체념하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멸망으로 나아가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다. 삶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바로 이들을 위한 것이리라.

그러니 옳은 대답은 정해져 있다.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하여.

그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유신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달싹거리는 입술은 망설임 끝에 아주 작은 목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이런 거, 되게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거 아는데요.”

인유신은 현규하의 손안에 잡혀 있는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내 가슴 안에 품고만 있던 생각이 선연한 형체가 되어 혓바닥에 맺혔다.

“저는 온 세상 사람들이 위험하다거나, 큰일이 난다거나, 하는 그런 위급한 일이 발생하게 되더라도 규하 씨가 더 소중해요.”

“…….”

“그러니까요, 규하 씨가 다른 사람들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거나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수많은 사람보다 현규하 한 명의 안위가 더 귀하게 느껴졌던, 그때.

그 깨달음은 시간이 흐르며 더욱 확고하게 인유신의 안에 새겨졌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가게 한 사람을. 제 삶을 아름답고 생동하게 채색해 주는 사람을.

인유신의 손을 꼭 쥐고 있던 현규하가 그 손을 조심스럽게 제 이마로 가지고 갔다. 하얀 피부에 손이 맞닿고, 스러질 듯 창백한 열감이 스미었다.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들었으나,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규하 씨.”

붙잡듯이 부르니 현규하가 시선을 올렸다. 제 불안감이 과민한 반응이라는 것처럼, 그는 말간 미소를 머금으며 눈가를 휘었다.

“당신에게 그 말을 들었으니 됐어요, 정말로.”

그러며, 인유신의 손에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그럼 더 늦기 전에 거인이나 잡으러 가 볼까요.”

“어, 괜찮은 거예요”

“마나 빨린다고 죽는 거 아니니까요. 마나 오링 나면 유신 씨 무릎에 누워서 간호받아야지.”

다른 때였다면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졌겠지만, 이번만큼은 인유신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규하의 등에 매달린 채 인유신은 상공을 날아갔다. 현규하를 본 거인들이 매우 분노하며 주먹과 곤봉을 휘둘렀지만 하나도 닿지 않았다.

‘규하 씨가 거인들을 무슨 방법으로 유인했길래 저렇게 화가 났을까…….’

인유신은 살짝 진땀이 흘렀다.

[구천현녀의 축복이 사라집니다.]

그사이에 거인이 하나 더 쓰러졌으나 동시에 마지막 탑까지 부서졌다. 전황은 암울해졌고 지친 기색도 역력했지만, 사람도 거인도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현규하는 옷깃에 부착한 소형 마이크로 만 국장에게 말했다.

“탑도 다 박살 났으니까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 뒀던 고유 영역을 전개할까 하는데요. 알겠지만 고유 영역을 썼다면 탑이고 마법진이고 전부 취소됐을 거라서요.”

‘고유 영역 그때 은징가가 썼던 그거 어떻게 쓴다는 말이지’

이론에 대해 잘 모르는 인유신은 갸웃했지만 만 국장은 단번에 알아들은 듯했다.

- 뭐 자네 고유 영역도 발현 가능했나 그게 가능한 헌터가 있었다고!

“가능하니까 말했죠.”

- 갑자기 왜 후방으로 빠졌나 했더니 준비하러 갔던 모양이군!

“사랑의 응원이 필요하거든요.”

- 저 망할 거인들을 때려잡을 수만 있다면 사랑의 응원이든 나발이든 하고 싶은 건 다 해! 나도 해 줄까! 뽀뽀면 되나

“주인님의 응원이 아니면 필요 없는데요.”

현규하는 인상까지 확 찌푸리며 단칼에 거절했다.

“아무튼 다른 사람들한테 전해 주세요. 장시간 유지는 못 합니다.”

연락을 끝낸 현규하에게 인유신이 물었다.

“히든 보스가 아니라도 고유 영역을 전개할 수 있는 거였어요”

“음, 귀속 아티팩트의 조건이 갖춰지면요. 보통 2개 이상의 귀속 아티팩트로 조건을 충족할 때 가능하거든요. 전쟁터가 제일 편하죠.”

그러고 보니 현규하의 귀속 아티팩트는 둘 다 동일한 전쟁터의 것이었다. 인유신은 입을 작게 벌렸다.

“처음부터 고유 영역 노리고 귀속 아티팩트를 파밍한 거였어요”

“존나게 고생했습니다. 그만한 개고생을 했는데도 마나 빨리는 속도가 장난 아니거든요. 2배가 아니라 200배는 되는 느낌이다 보니 정작 실전에서 써 본 적은 없어요. 보고 마나가 떨어진다 싶으면 버프 부탁합니다.”

“네, 넵!”

힘차게 대답한 인유신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아래는 조심하시구…….”

“휴우.”

현규하는 대답 대신 한숨만 폭 쉬었다. 그 한숨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게 두려워진 인유신은 말없이 아공간에서 ‘만투카이의 부스’와 ‘중긴 카툰의 벅특’을 꺼냈다.

떨어트리면 안 되니까 ‘만두카이의 부스’는 허리에 꽉 매고, ‘중긴 카툰의 벅특’은 한 팔로 안았다.

‘8세 덕분에 마나가 증폭되었으니까 규하 씨한테도 계속 버프를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인유신은 아예 처음부터 안에 쏙 들어가서 얼굴도 내밀지 않는 8세를 파우치 너머로 쓰다듬었다.

버프를 줄 준비를 끝내자 등 뒤의 인유신을 역장으로 감싼 현규하도 양손의 반장갑을 벗었다. 그러고는 양손을 깍지 낀 채 하늘로 쭈욱 뻗어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어, 양손의 손등에 각각 새겨진 문양이 빛을 발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귀속 아티팩트 ‘마지막 황제의 부러진 십자가’를 전체 해방합니다. 고유 필드가 전개됩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귀속 아티팩트 ‘계승자 파디샤의 영원한 정복’을 전체 해방합니다. 고유 필드가 전개됩니다.]

[시간과 공간과 세계가 일치합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고유 영역 ‘천 년 제국의 종말’을 선포합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공조한다고 인식한 개체의 모든 능력이 20퍼센트 상승됩니다. 모든 귀속 아티팩트와 일반 아티팩트의 효과가 20퍼센트 상승됩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적대한다고 인식한 개체의 모든 능력이 20퍼센트 저하됩니다. 모든 귀속 아티팩트와 일반 아티팩트의 효과가 20퍼센트 저하됩니다.]

[동로마의 귀속 아티팩트 및 일반 아티팩트의 효과가 50퍼센트 상승됩니다.]

[오스만의 귀속 아티팩트 및 일반 아티팩트의 효과가 50퍼센트 상승됩니다.]

인유신의 눈앞에 메시지가 좌르륵 떠올랐다.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고유 영역과 정확히 반대되는 효과들에 놀란 입을 다물기도 전에 세상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삽시간에 변했다.

거인이 닿지도 않을 높은 상공에 떠 있던 인유신의 발아래로 3중의 성벽이 솟아올랐고, 수 미터의 청동 거포들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그 성벽을 강타했다. 백두산 쪽으로 뻗어 있던 평야는 사슬이 설치된 해안의 만으로 변했으며, 언덕 위에 놓인 범선을 하늘에 걸린 초승달이 내려다보았다.

시야, 아니 시야에 담기지도 않는 지평선 저 먼 곳까지 수백 년 전의 시간이 박제되어 있었다

전 유럽과 기독교 세계로부터 버림받고 고립되었음에도 결코 항복하거나 그들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최후까지 응전한 제국의 고결한 종말. 그 종말을 끝이 아닌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정복의 시금석으로 삼아, 숨이 멎을 때까지 질주했던 술탄의 야심.

그리하여 하나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고, 새로운 시대가 천 년 제국의 마지막을 디디며 개막했다.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콘스탄티노폴리스(오스만에 의해 멸망한 동로마의 수도. 현재의 이스탄불.) 최후의 54일이, 세계 역사의 변곡점이 된 시간과 공간이, 일점에 압축되어 광야에 펼쳐졌다.

동로마의 멸망과 오스만의 승리.

요약하자면 한 줄에 불과한 옛 시대의 파편이 물화되자 그것은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 결코 밀리지 않는 무게감으로 사위를 압도했다.

거인은 물론이고, 미리 들어서 알고 있던 인유신과 헌터들까지 상상 이상으로 웅장한 광경에 정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현규하만이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마나 바닥나기 전에 빨리빨리 처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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