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화 (195/214)
  • “고, 고맙소이다.”

    현규하의 기억이 맞다면, 조선말을 사극에서 배운 것처럼 말하는 저 남자는 영국의 S급 헌터인 제임스 밀러였다.

    철의 시대에서는 국왕에게 기사 작위까지 받고 영국의 보물이라 일컬어졌던 헌터다. 그런 밀러까지 조선으로 귀화할 정도이니 다른 나라의 상황이 어떤지 알 만했다.

    발버둥 치며 욕설을 퍼붓는 거인을 허공에 높이 띄운 현규하는 대충 고개를 끄덕했다. 한 번 더 감사를 표한 밀러는 휘하의 헌터들을 이끌고 다른 거인을 사냥하러 이동했다.

    ‘다른 나라에서 방주가 열렸다면 그대로 멸망했겠군.’

    얼마 있지도 않은 전 세계의 최상위 헌터들 대부분이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선이니 그나마 거인들과도 맞상대하고 있었다.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과 자식을 낳고 싶다는 바람은 각성자든 일반인이든 동일한 모양이다. 현규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욕구였으나, 거기에 인유신을 대입하면 대답은 아주 쉽다. 인유신을 위해서라면 조선으로 귀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했겠지.

    하지만 이해와는 별개로, 그의 눈에는 한계가 보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대등하게 우리아쉬들과 공방하며 격살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상자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나왔다. 홀로그램 맵에 표시되는 B급 이하 헌터들의 수는 현저히 줄어 있었다. 전쟁에 비유하자면 교환비가 최악이라 할 수 있겠다.

    신들의 가호에 의해 치유력이 극대화하여 숨만 붙어 있으면 힐러들이 멀쩡하게 회복을 시켜 주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거인의 피지컬이 압도적이었다.

    발로 짓밟거나 손아귀로 움켜잡기만 해도 인간은 전신이 으깨져 죽는다. 신의 가호를 받는 힐러도 죽은 사람을 부활시킬 수는 없었다.

    “놓지 못할까! 이 비겁한 놈! 네놈이 정녕 스토얀의 아들이라면 정정당당히 승부를 겨루잔 말이다!”

    저 옆의 허공에서 발악하듯 외치는 거인을 완벽하게 무시하며 현규하는 반장갑을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이걸 써야 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인유신의 버프가 필수 불가결이다.

    인유신을 이곳으로 데려와 그의 버프를 받으며 거인을 빠르게 사냥하는 것. 또는 인유신을 후방에 둔 채로 느리게 거인을 사냥하는 것.

    둘 중 무엇이 인유신의 안전을 보장할지 고민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거인들부터 정리를 해야 한다. 객체 하나가 마수 떼에 비견할 만큼 무게가 나가는데 화기도 잘 통하지 않으니 평소처럼 가성비 떨어지는 공격으로 사냥하는 게 저어되었다. 현규하는 되도록 힘을 적게 써서 처리할 방법을 찾아 아래를 둘러보았다.

    인간들의 낯선 능력에 무지했을 뿐, 거인들은 멍청하지 않다. 건물에 새긴 마법 술식을 축으로 하여 전쟁의 신들의 가호가 내리고 있다는 건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저 건물들을 파괴하면 축복도 거두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들 역시 가호의 매개체가 되는 건물들의 방어에 필사적이었다.

    “여기는 죽어도 사수해!”

    “뚫리면 나한테 다 뒤진다!”

    이능력의 공격들이 쏟아졌다. 거인은 제 살갗을 찢어발기는 공격을 도외시하고 몇 걸음 물러섰다가, 대지를 박차며 단번에 내달렸다. 사슬이 다리를 휘감고, 바닥으로부터 장벽이 일어나 앞을 가로막고, 칼날이 몸을 후벼 파도 멈추지 않았다.

    터엉! 쾅!

    육중한 몸이 그대로 5층 높이의 탑에 부딪혔다. 지축을 울리는 진동이 번졌다. 벌써 세 번째 돌격이다.

    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흔들렸으나 무너지지 않았다. 진동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거인의 피로 흥건하게 젖은 흙바닥과, 달려오는 거인을 끝까지 막아서다가 피곤죽이 된 헌터들의 시체였다.

    거인의 입가가 올라갔다. 저 하나의 목숨으로 가호를 하나 무너트릴 수 있다면 오히려 동족들에게 이득이다.

    “씨발.”

    웃는 이유를 읽은 헌터가 이를 갈았다. 생존한 헌터들의 공격이 다시 쏟아지기 전에 거인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두 번, 아니 한 번만 더 체중을 걸어 부딪히면 탑은 확실하게 무너진다.

    “지원은 언제 오냐고!”

    다른 구역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다급한 심정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은 헌터들이 이를 악물며 공격하고 있을 때, 거인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지원이 당도했다.

    투과가각! 카각!

    거인의 앞으로 단번에 수십 대의 화살이 쇄도했다. 화살뿐이었다면 강화된 피부에 쉽게 상처를 내지 못했을 테지만, 그 화살들을 이끌어 온 것은 매서운 돌풍이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살갗을 찢기가 무섭게 발밑으로부터 용오름 같은 회오리가 거인의 얼굴에 닿을 듯 높이 솟아올랐다.

    “크윽!”

    맹렬하게 몰아치는 바람 사이에 섞인 건물이나 무기의 잔해는 거인마저 주춤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돌풍이 사라졌을 때, 거인의 눈앞에는 바람을 타고 높이 뛰어오른 공태성이 있었다.

    귀곡성을 울리며 검은 불길을 떨어트리는 칼날이 거인의 머리를 향했다. 거인은 반사적으로 곤봉을 올려 막았으나, 지옥의 겁화가 이글거리는 흑염의 칼날은 곤봉째로 그의 가슴을 깊게 베었다. 흉부가 쩍 갈라지며 썩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크아아악!”

    “막아!”

    “힘줄부터 끊어!”

    아래에서는 다른 헌터들이 사슬로 거인의 오른쪽 발목을 휘감고는 힘줄을 끊어 냈다. 건물까지 돌격할 동력을 상실한 거체의 한쪽 무릎이 바닥으로 쿵 하고 무너졌다.

    그렇지만 거인도 포기하지 않았다.

    “둠네제울과 인간에게 저주를!”

    마지막 힘을 쥐어짠 거인은 반 토막이 난 곤봉을 힘껏 던졌다. 장범이 급히 바람의 흐름으로 궤도를 꺾으려 했으나, 거인의 용력이 깃든 곤봉의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카아앙!

    기어이 탑에 부딪힌 곤봉은 으스러짐으로써 최후의 임무를 다했고, 마법 술식이 손상된 탑은 가장자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누아다의 축복이 사라집니다.]

    “젠장.”

    공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나의 회복을 도와주던 전쟁의 신의 가호가 거두어졌다. 인간들의 낭패한 기색을 읽은 거인은 중상을 입고서도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신에게 기생하는 가련한 인간의 말로가 어떠하냐”

    “나는 종교도 없는데 억울하네, 진짜!”

    장범이 짜증과 함께 간디바에 새 화살을 메길 때 거인은 최후가 될 포효를 터트렸다.

    “나는 죽겠지만 네놈들만은 지옥으로 끌…… 억!”

    까아앙!

    선명하게 울리는 타격음과 동시에, 또 다른 거인이 뒤통수로 날아와 부딪혔다.

    쿠웅!

    묵직한 충격음을 내며 머리가 서로 부딪친 두 거인이 한데 얽힌 채 땅바닥으로 처박혔다.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는 머리뼈를 가진 거인들이었지만 뇌진탕의 증상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광경에 얼이 빠진 헌터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역시 그곳에 있는 사람은 현규하였다.

    이번에도 거인을 공격하는 무기로 거인을 쓴다는 방법을 잘 활용한 그는 아공간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꺼냈다.

    [귀속 아티팩트 ‘마지막 황제의 부러진 십자가’를 일부 해방합니다.]

    성스러운 광망이 맺힌 성유물이 포개진 두 거인의 두개골에 작살처럼 내리꽂혔다. 거인들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신력은 단번에 피부와 뼈를 관통하고 뇌를 으깼다.

    먼지처럼 부스러지는 주검의 옆으로 하강한 현규하가 롱기누스의 창을 거둔 뒤 피와 살점을 툭툭 털어 냈다. 인유신이 아타베이라에게 위험을 느낀 게 아니었다면 장만하지도 않았을 성유물이 의외로 이아드에서 용처가 있었다.

    “탑 부서졌군.”

    “하아.”

    공태성이 묵직한 침음을 흘리며 얼굴을 감쌌다. 현규하는 그것도 못 지키고 뭐 했냐는 빈정거림 대신 다른 거인을 사냥하기 위해 훌쩍 몸을 날렸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가호를 붙잡고 질책할 때가 아니라 다른 가호까지 사라지기 전에 거인을 하나라도 더 사냥해야 할 때였으니.

    “태성아. 저기 홀로그램 맵을 띄우고 연동해서 전황 지휘하는 거 진짜 효율적이지 않아 우리도 돌아가면 이런 기술 개발해 보자고 할까”

    “과학만으로 가능하게 하려면 수십 년은 지나야 할 거 같다만.”

    “아오, 나도 신이나 믿을 걸 그랬다! 부처님! 도와주세요!”

    공태성과 장범을 비롯한 다른 헌터들은 낙담을 씹으면서도 인 이어로 들리는 지휘를 좇아 빠르게 움직였다.

      

    서낭당 안에는 각자 섬기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성직자들로 가득했다. 본래대로라면 절대 불가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제우스의 신전에서 힌두교의 브라흐마에게 기도를 올렸다가는 두 신성 모두 언짢아할 테니 말이다.

    이번만은 예외였다. 위급 상황이니만큼 기도를 받는 신들은 노하기는커녕 아낌없이 신성력을 나누어 주었다. 이 신성력은 방어 본부에 설치한 마법진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것엔 문외한인 인유신에게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게 느껴졌다.

    “쿨럭!”

    “승통! 괜찮으십니까!”

    나이가 지긋한 승려가 기어이 피를 왈칵 쏟으며 쓰러졌다. 사람들이 급히 쓰러진 승려를 자리에 누였다. 성직자가 아닌지라 기도에 동참하지 못하고 초조감만 곱씹고 있던 인유신도 손을 거들었다.

    승려는 도무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다른 사제들의 안색도 몹시 창백했다. 물을 떠 오고 주변도 정리하며 바쁘게 돕던 인유신은 수건을 갖다 놓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

    허공에는 변함없이 투명한 맵이 떠 있었다. 붉은색 점이 거인이고, 푸른색 점이 헌터의 생명 확인이다. 거인도 절반 이상 줄었지만 인간들은 훨씬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키부카의 축복이 사라집니다.]

    또 하나의 탑이 파괴되었다. 이제 남은 탑은 구천현녀의 가호가 서린 것 하나다.

    외부의 모든 충격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되던 서낭당에서 벗어나니 저 먼 곳의 대지를 울리는 진동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있을 것이다. 그 광경을 떠올리면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계속 시야의 가장자리에 띄워 두고 있던 ‘후긴의 눈’의 좌표를 보았다. 현규하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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