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규하의 감정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좌표가 빠르게 움직이는 걸로 보아서 전투 중이긴 해도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건 아닌 모양이다.
“우리가 싸웠던 놈이 저만큼 크지는 않았지”
“객체의 차이가 있는 모양이군.”
“하필이면 재수 없게 젤 존만한 애가 먼저 튀어나왔냐.”
그 뒤로도 얼마간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현규하의 좌표는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인유신의 손안에 식은땀이 고였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방어 본부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무거운 정적이 내려와 있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킨 인유신은 그 소리마저 크게 울리는 느낌이라 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시간이 흘렀다. 색이 뚜렷해지며 차츰 거인의 형상이 육안으로도 확인되었다. 원근감이 마비될 정도로 거대한 생명체들이 줄지어 이동하자 지면에서도 진동이 올라왔다.
숨 쉬기조차 버거운 긴장의 시간이 첩첩이 쌓이고, 본부의 가장 높은 건물보다 훨씬 더 위에 자리한 거인들의 얼굴에 숨이 막히고, 마침내 현규하의 좌표가 본부에 다다른 순간.
콰지지직!
지면에 새겨진 마법진에서 번개 같은 빛살들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며 공격 범위에 들어온 거인들을 관통했다.
게이트가 열리고 인간들이 각성하기 시작했음에도 철의 시대와 이아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신과 마법의 존재 유무다.
여름의 태양과 불의 신 크르스니크가 인간의 아이에게 직접 마법을 전수했듯이, 마법은 인간이 신에게 내려 준 축복의 하나였다. 신의 숨결이 직접 닿던 신대로부터 서서히 인간이 독립하고 역사를 이루며 마법 또한 잊혔지만, 각성을 계기로 마법을 일깨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세계의 마법은 신성력과도 일부 상통한다. 마을을 완전히 철거하지 않고 서낭당을 남겨 둔 건 그 때문이었다.
방어 본부의 모든 곳은 외딴곳의 제일 작은 건물까지 마법사들의 철저한 수식으로 구성된 마법진의 축이었다. 서낭당으로부터 신성의 가호를 받고, 방어 본부 전체를 이용한 마법진이 유인한 거인들에게 작렬했다.
“키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악!”
우리아쉬들은 신벌을 받은 종족이다. 그들에게 신성의 가호가 내린 마법은 실로 끔찍한 타격을 가했다.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울리는 쩌렁쩌렁한 비명에 인유신은 어깨를 흠칫하면서도 여기에서 끝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마냥 낙관적인 상황이 아닌 모양이다.
공태성이 무겁게 침음했다.
“이거 위험하군. 예상보다 크고, 많다.”
“마법진이 감당하기 힘들겠는데…….”
물론 방어 본부에서도 우리아쉬에 대한 옛 기록들은 검토했다. 하지만 체구가 어지간한 산보다도 크다는 기록 등은 허황하게 여겨졌기에 전부 신뢰하기 힘들었다.
본부에서는 전설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어느 정도 과장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취사선택했다. 거기에 처음 일행이 상대한 거인의 크기와 마나의 틈 너머에 남아 있을 숫자를 고려했다.
최대한 보수적으로 계산했는데도, 틀린 모양이다.
적지 않은 수의 거인들이 마법진에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뒤쪽에 남은 거인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은 연이어 작렬하는 마법으로부터 동족들을 구해 내기 위해 아우성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건물보다 높은 거인들. 귓가를 뒤흔드는 것은 천둥과도 같은 울림. 땅을 진동하는 것은 거인들의 몸부림. 하나같이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어서 마치 재난 영화라도 보는 것 같았다.
인유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몇 명쯤 될 거 같아요”
인 이어와 비슷한 마도구로 본부의 세밀한 지휘를 듣던 공태성이 입을 열기 전이었다. 인유신의 앞에 훌쩍 내려서는 익숙한 인영이 있었다.
“규하 씨!”
“별일 없죠”
“저야 안전한 곳에 있었는데 별일이 어떻게 생겨요!”
인유신은 얼른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부상을 입은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 겨우 안도하는 그를 현규하가 싱긋 웃으며 가볍게 끌어안았다.
바로 저 앞에서 재앙 같은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이 품에 안기니 요동치던 심장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인유신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그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현규하가 안심하라는 듯이 인유신의 등을 토닥토닥 쓸었다.
“끌고 오면서 대충 봤는데 거인들이 50명은 안 되는 거 같더라고요.”
“많지 않나”
“500명은 아닌 게 어디야.”
그것도 그런가.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마냥 최악의 상황은 아니란 느낌이 드는 게 신기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땅울림과 거인들의 비명은 멎지 않았다.
이아드의 다소 흐린 태양 빛보다 더욱 강렬하게 빛나는 마법진의 섬광이 정신없이 명멸했다.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보수하고 유지하느라 마나를 주입하고, 사제들은 서낭당에서 기도를 올렸다.
현규하와 공태성, 장범을 제외한 헵타곤의 헌터들은 마법진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 때문에 식당 주변은 마법진으로부터 비롯되는 소요가 아니라면 오히려 조용한 편이었는데, 불현듯 식당 외벽에 새겨진 마나 회로에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현규하의 재킷을 꼭 붙잡았다. 건물이 가동한다는 것은, 마법진으로 거인을 괴멸한다는 플랜 A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곧 마법진을 파훼한 거인들이 본격적으로 밀려들어 올 것이다.
등을 어루만지던 현규하가 가만히 시선을 숙이며 눈 맞춤을 했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잘게 일렁거리며 그를 감쌌다.
“유신 씨와는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 정도예요”
어느 싸움에서든 자신의 곁이 가장 안전하다면서 떨어트려 놓지 않던 현규하다. 그렇다면 거인과의 싸움은 얼마나 위험하다는 의미인지.
불안감이 깊어진 눈빛을 눈치챈 것처럼, 현규하가 짐짓 싱긋 미소했다.
“거인은 큰 데다가 덩치에 안 맞게 재빠르기도 하더라고요. 등 뒤에서 갑자기 유신 씨를 덮칠지도 몰라서요.”
“아…….”
“서낭당에 가 있으면 될 겁니다. 사제들 보호하느라 방어막 빡세게 깔아 놨으니 방어 본부에서는 그곳이 제일 안전해요.”
그의 말이 맞다. 이번에는 자칫하다가 정말 그의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현규하가 귀에 낀 인 이어 형태의 마도구를 톡톡 두드렸다.
“이게 우리가 쓰던 인 이어와는 다르게 원하는 주파수에 고정해 놓을 수도 있더라고요. 서낭당의 전황을 주로 전하는 주파수로 고정해 둘 테니까 거인들이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바로 올게요.”
“넵!”
자신을 두고 가는 그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인유신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인들 오는 소리가 들리면 제가 막 SOS 모양으로 뛸게요.”
“그거 좋군요. ‘무닌의 눈’의 좌표로 금방 알아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없어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기운 내셔야 해요.”
“좀 힘든 문젠데 노력해 볼게요.”
농담처럼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적어도 불안감을 온전히 속에 감추고 그를 배웅할 수 있게 되었다.
인유신은 공태성과 장범에게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서낭당 안에 얌전히 있을 거니까 길드장님이랑 장 헌터님이 싸우러 가셔도 괜찮아요.”
“네 보디가드라니까.”
“에이, 서낭당까지 뚫리기 전에 거인 다 잡으시면 되는 거잖아요.”
밝은 목소리로 말하니 현규하도 거들어 주었다.
“매형, 최고의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는 말도 있잖아.”
“그렇긴 하네. 뭣보다 태성이 네 능력은 디펜스보다는 오펜스 쪽이고.”
매형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공태성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인유신의 말을 따랐다. 현규하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지는 못하고, 대신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화염을 압축하여 인유신에게 건넸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는 좀 큰 크기로 압축된 화염이었다.
“위험할 거 같으면 힘껏 던져라.”
“헉, 잘못하다가 실수로 떨어트리면 어떻게 해요”
“그 정도의 충격으로는 터지지 않을 거다. 대신 폭발했을 때 화력은 약하지만.”
장범도 화살 하나를 주었다.
“진혁이의 독을 묻혀 온 거니까 누가 왔다 싶으면 그냥 푹 찔러. 실수로 사람을 죽여도 독이 진혁이 것이니까 네가 범인이 될 리는 없을 거야.”
은근히 살벌한 농담에 조금 진땀을 흘리면서 화염과 독화살을 조심히 아공간에 넣었다.
인유신을 안아서 서낭당까지 바래다준 현규하는 서낭당을 방어하는 헌터들과 마법진을 한 번 둘러보았다. 신들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 장소여서 지휘부만큼이나 철저히 보호되고 있는 곳이다.
“유신 씨. 사실은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게 있긴 한데요…….”
- 응격 마법진 손상 95퍼센트.
말꼬리를 느릿하게 끌면서 고심하는 듯하던 현규하는 허공에서 들린 오퍼레이터의 전체 알림에 말을 삼켰다.
“음, 아니다. 급하게 얘기할 건 아니니까 이따가 말할게요.”
“넵. 우리 느긋하게 얘기해요.”
인유신은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버프를 해 주었다.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은 현규하가 이마에 보드라운 입맞춤을 남기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 응격 마법진 손상 96퍼센트.
상공에 투명한 홀로그램 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