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1/214)

햇살이 비치지 않는 땅 밑의 세상에서, 스토야는 홀로 울음을 터트렸다.

망설임 없던 인유신의 대답이 무서웠다. 평범하게 살았을 아이를 크르스니크로 태어나게 했다, 그녀가. 강제로 그의 운명을 뒤틀었다. 뒤틀린 운명 속에서 아이가 선택했다.

자신과 스토얀을 강제로 주춧돌 아래에 파묻었던 왕의 무도한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면 그 아이들의 운명은 서로에게 이어지겠지요. 최초의 담피르와 크르스니크가 그러했듯이.〉

【좋습니다. 나에게 과오가 없는 건 아니니 신이 떠나간 세계에 신의 의지를 투사하는 대가,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습니다, 죽은 왕이여. 그대는 크르스니크를 태어나게 한 것을 분명히 후회할 테니까요.】

그녀는 2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네쿠라툴의 말을 처절하게 이해했다.

  

사람들이 일컫길 마나의 눈, 기능에 적합한 명칭은 방주.

‘이름 따위야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지만.’

현규하는 하늘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 변함없이 괴괴한 허공의 뒤틀림만을 응시했다.

‘징조가 없다는 게 더 불길한 느낌이군.’

섣불리 튀어나와서 살해되었던 최초의 거인과 달리 안에서 충분히 주변을 탐색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 그와 함께 경계를 서고 있는 다른 헌터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닌의 눈’을 띄워 보니 방어 본부에 머무르고 있는 인유신의 좌표가 보인다.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안전한 곳, 예를 들어 한양 같은 곳으로 대피시키고 싶었는데 인유신이 거절했다.

〈제가 여기에서는 뭐든 규하 씨 말 다 듣겠다고 했는데요……. 이번만 다시 생각해 주면 안 돼요〉

현규하는 왜 인유신이 약속까지 어기면서 부득불 제 가까운 곳에 남으려 하는지 이유를 알고 있다. 스토얀 때문이다.

스토얀의 진의가 불분명하다는 게 드러났음에도 현규하는 동요하지 않았다. 인유신은 그런 그의 감정을 대신하려는 듯, 마치 제 일처럼 불안해했다.

그야 물론, 현규하는 지금도 가능하다면 스토얀을 죽여 버리고 싶다. 어머니를 세뇌하여 멋대로 휘두르며 그를 버리고 가게 했다. 그의 머릿속에 폭탄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을 심어 강제로 삶을 재단했다.

자식이든 아니든, 현규하는 마땅히 스토얀을 죽여도 되는 당위성이 자신에게 충분히 있다고 확신한다.

‘막상 붙었을 때 내가 정말 기원전부터 존재한 괴물의 목을 날려 버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하지만 그가 언제는 냉정하게 승패를 계산하고 싸움에 임했던 적이 있던가. 그의 삶이 냉정한 계산과 공존할 수 있던 것이었나.

현규하는 익숙하게 여기에서 생각을 끊는다.

무용하며 무의미한 공상일 뿐이다. 그는 다만, 인유신의 불안감을 덜 수 있을 방법만을 골몰했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인을 풀어 놓으면 세상이 더 빨리 멸망하는 게 아닌가.’

멸망에 생각이 미치자, 현규하의 시선은 저절로 남쪽을 향했다. 인유신이 있는 후방의 본부가 아닌, 더 먼 남쪽.

그곳에 있을 사람.

“어, 어어”

불현듯,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터로부터 당혹성이 흘렀다. 현규하의 시선도 퍼뜩 돌아왔다.

방주가 열리고 있었다.

멸망의 때.

둠네제울이 빚은 두 번째 인간, 거인 우리아쉬들은 신벌 속에 죽어 가고 있었다. 세상에 범람하는 대홍수의 거친 물결 가운데에서 그들은 분노하고, 절망하고, 증오했다.

〈둠네제울이여! 만신전의 신들이여!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오!〉

자신의 피조물을 늘 가까이에서 굽어보던 둠네제울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계곡과 계곡을 건너다닐 만큼 거대한 거인들도 세상을 휩쓰는 신의 징벌을 버티지 못하여 휩쓸리고, 익사했다. 고통스러운 죽음의 운명이 그들에게 내려왔다.

땅 밑에서 새로운 세계의 왕이 된 소녀는 처참하게 죽임당한 거인들의 영혼이 흘러올 때마다 흐느껴 울었다.

그들이 처절하게 죽어 가는 와중에도 둠네제울이 빚은 네 번째 인간들은 대다수가 살아남았다. 그것이 우리아쉬들의 울분에 더욱 불을 지폈다.

왜 우리만 죽어야 하는가.

왜 우리만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

둠네제울이 빚은 네 번째 인간은 뜨거운 것을 식힐 때도 입김을 불고, 차가운 것을 데울 때도 입김을 분다. 하나의 육체에 두 개의 영혼을 지닌 위선자들이다. 우리아쉬들은 이 위선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여 네 번째로 빚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고, 산 채로 사냥하여 먹고, 자신들의 불신과 분노를 전파하여 타락한 인간들이 서로를 해치게 했을 뿐이다.

쿠르릉, 콰광!

거인인 그들조차 지탱하는 게 힘들 만큼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사납게 번쩍거리는 번개가 난폭한 물살에 떠내려가는 우리아쉬들의 주검을 비추었다.

우두머리 곁으로 생존한 우리아쉬들이 몰려들었다. 한때 지상을 제 것처럼 활보하던 종족이 겨우 이것밖에 남지 않았음에 우두머리는 비통한 비명을 우짖는다.

〈도와줄까〉

아비규환의 폭우 사이에서 그 목소리는 유달리 선명하게 귀에 닿았다. 거인이 아닌 자들이 맨몸으로 나왔으면 이미 흔적도 없이 폭풍우에 쓸려 죽어 버렸을 터인데도, 그는 흔들림 없이 섰다.

우두머리는 높은 몸을 굽히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이다. 인간이었다. 증오스러운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단번에 청년을 쳐 죽이지 않은 것은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네놈이 산 제물로 바쳐져 새로이 네 번째 인간들의 왕이 되었다는 작자냐〉

〈인간이 아니라 세계의 왕이라 하더군.〉

〈세계에 둠네제울이 빚은 네 번째 인간밖에 남지 않게 되는데 무엇이 다를까!〉

〈다르지. 나는 이 세계를 좋아하지 않거든.〉

담담하지만 그 안에 깃든 농밀한 감정이 우두머리의 눈을 움직였다. 우두머리는 제 손가락보다도 작은 인간의 눈동자에서 자신과 같은 것을 보았다. 수렁처럼 깊은 증오와 신들을 향한 적개심을.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들이 증오를 발산하게 해 줄 수 있지.〉

청년은 말했다.

그들을 위한 방주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적절한 때가 되면 방주에서 그들을 나오게 해 줄 것이라고.

〈물론 나는 당신들의 목숨을 붙인 채 방주를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온존할 수는 없어. 당신들은 살아 있는 시체가 될 거야.〉

〈…….〉

〈영혼이 외나무다리를 지나 낙원에서 안식하지도 못할 테고, 주검이 자연으로 돌아가 순환하지도 못할 테지.〉

〈크하하하.〉

우두머리는 광소를 터트렸다.

〈기껍다! 오히려 기껍다! 둠네제울이 창제한 낙원에서 안식하는 것을 누가 바랄까! 증오스러운 인간과 세상을 위한 거름이 되고 싶지도 않음이니!〉

우리아쉬들도 그에 호응했다. 청년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둠네제울을 비롯한 신들의 눈길을 끌어 줘.〉

신들의 눈을 돌리게 할 미끼 역할을 맡은 거인이 방주에 탈 수 없으리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우두머리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왔다.

〈그 역할은 나의 것이다!〉

우두머리는 하늘을 향해, 둠네제울을 향해 외쳤다.

〈이까짓 비바람 따위가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느니!〉

우리아쉬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거대한 우두머리가 손을 뻗자 그 손은 천공에 닿았으며, 그 다리를 받친 지반은 기우뚱 기울었다. 신의 재정에 순응하지 않고 거역하는 그에게 신들이 주의를 기울였다.

폭우가 더욱 거세졌다. 세상을 쪼개 버릴 것 같은 사나운 파도가 몰아쳤다. 둠네제울은 벌레를 보내어 그를 물어뜯게 하였다. 신어까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떠내려간 범람에 기어이 우두머리도 휩쓸렸다.

그의 마지막 숨결이 떨어지기 전, 생존한 우리아쉬들은 신의 눈을 속이고 방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이면의 세계를 부유했다. 찰나. 또는 영겁.

마침내 우리아쉬들의 의식이 세상에 닿게 되었을 때.

〈오랜만이야.〉

청년은 전혀 변하지 않은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내가 구현한 종말이 당신들이 나올 출구가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청년은 사라졌지만 우리아쉬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밖의 세계에, 그들이 겪은 멸망과 흡사한 조각이 뿌려져 있음을.

이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어린 우리아쉬가 세상을 훔쳐보다가 ‘인간’을 발견하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둠네제울이 빚은 네 번째 인간은 그들의 예상보다 뛰어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다. 어린 우리아쉬는 절명하여 먼지로 돌아갔다.

우리아쉬들은 이면 뒤에서 차분히 세상을 살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대홍수도 거뜬히 버텨 냈던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약해졌다. 종말로 치닫고 있는 세계는 더할 나위 없이 나약하다. 그들의 발 구름만으로도 대지가 두 동강이 나 쪼개질 것처럼.

우리아쉬들은 둠네제울에게 감사했다. 멸망하는 세계를 미련스레 붙잡고 있던 창세신에게. 그가 애착하던 세계와 인간을 이 손으로 몰락시킬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둠네제울이 다시 한번 그들을 벌하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킨다면, 너덜너덜해진 이 세상은 버티지 못하고 확실히 멸망할 것이다.

우리아쉬들은 방주와 세상을 이어 주던 뒤틀림을 찢으며 종말이 도래한 세상으로 넘어왔다.

증오스러운 인간이 눈앞에 있었다.

마나의 파동이 산중을 휩쓸었다.

방주를, 거인을 숨기고 있는 허공의 뒤틀림이 더없이 불길하게 느껴졌다던 인유신의 말을 현규하는 떠올렸다. 종이를 찢듯이 거칠게 열린 방주 너머에서 우리아쉬들의 기운이 물씬 흘러나오자 그도 뚜렷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저것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증오심만을 원동력으로 삼은 흉조다.

“———.”

오랫동안 굳어 있던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거인의 육체가 삐걱거렸다.

하나, 둘, 셋, 넷……. 험준한 산 중턱에 겨우 네 명의 거인이 나온 것만으로도 시야가 꽉 찼다. 새로 나타난 자들은 일전에 죽였던 거인이 아이처럼 여겨지는 체구였다.

‘며칠 전에 죽였던 그놈은 꽤 작은 편이었군.’

방주 안에는 좁아서 나오지 못한 거인들이 도사리고 있다. 현규하는 힐긋 시선을 내렸다. 같이 경계를 서던 헌터는 몸이 굳었는지 도망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2인 1조로 경계 태세를 유지하다가, 마나의 눈에 이변이 발생하는 즉시 최소 한 명이 본부에 상황을 알리는 거였다. 본부와 통신을 하려면 마나 파동의 범위에서 벗어나야 하니.

‘뭐, 상관없나.’

이 정도 크기라면 본부에서도 육안으로 확인이 될 터였다.

“거기.”

“……네, 네!”

“내가 시간 끌면서 유인하고 있을 테니까 튀어요. 걸리적거려.”

도망치려면 거인들의 육체가 회복되지 않은 지금뿐이었다. 헌터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했다.

현규하는 거인들의 눈높이까지 조금 더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몸이 풀리자 바로 공격할 기세였던 거인이 현규하를 보더니 입을 벌렸다.

“———”

“뭐라는 거야. 한국 땅에 왔으면 한국말을 해. 아, 여기에서는 조선말인가”

쿠웅.

몸체만큼이나 커다란 나무 곤봉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다른 거인 하나가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입술에서 나온 말은 어눌하게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다. 통역 마법 같은 건가.

“너는 스토얀과 어떤 관계인가”

“정자 제공자와 수취인.”

“…….”

“인간이 어떻게 번식하는지 몰라 우리아쉬들은 번식 방법이 다른가 먼저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고 자서 정자와 난자를 만나게 한 뒤에 수정란을 스토어에 등록해서 애를 다운로…….”

“스토얀의 자식이 어째서 우리의 동족을 죽인 것이냐”

“너희한테 스토얀이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던데.”

“무엇이지”

대답하기 전에 도망치라고 했던 헌터의 기척을 살폈다. 거인들을 자극하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공포 때문에 제대로 못 움직이는 탓인지 아직도 근처다.

쯧, 귀찮게. 시간을 더 끌어야 했다.

현규하는 스토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걸 속냐 방주에 숨겨 준다는 말을 진짜 믿었어 이런 빡대갈들만 모여 있으니 홍수로 떼 몰살이나 당하지. 너희 이제 다 뒤짐ㅋㅋㅋ’.”

“…….”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거인들이 그의 말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었다. 시간이나 끌다가 유인하면 되는 현규하로서는 그들이 흥분해서 날뛰면 더 좋고.

“……무엇이 진실일지는 네 사지를 비틀어 보면 알겠지.”

아름드리나무를 잘라 만든 곤봉이 부웅! 하며 허공을 날았다. 그와 동시에 외마디 비명성이 색채를 잃은 산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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