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214)
  • “개성은 어땠어요 만월대는요”

    돌아온 현규하와 만나자마자 궁금해서 물었지만 정작 반응은 미묘했다.

    “경복궁이랑 비슷하더라고요. 복원한 게 조선 때라서 그런가.”

    “아, 진짜요”

    휴대폰의 사진으로 봤을 때는 경복궁과 좀 다른 느낌이었는데 직접 목격하면 별 차이가 없나 보다. 원래 세계에서는 홍건적의 침략 때 불탄 이후 끝내 복원되지 않은 만월대였으니 좀 아쉽기도 했다.

    “여기 일 정리되면 같이 가 봐요.”

    “둘 다 대도시이다 보니까 개성이나 한양이나 거기서 거기던데요 그보다는 다른 관광지를 둘러보는 건 어때요 대도시만 보는 건 재미없잖아요.”

    그것도 그런가.

    고향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긴 했는데, 현규하의 말을 듣다 보니 그럴듯했다. 게다가 달가사를 보면 기분이 많이 이상해질 거 같기도 했고. 혹은 아예 달가사가 없을 수도 있다.

    ‘괜히 확인해서 심란해지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모르는 게 나을까’

    국왕을 알현하는 절차에 대한 귀찮음을 토로하는 현규하의 투정을 들으면서 맞장구치다 보니 어느새 손에는 조사 자료도 들려 있었다.

    “받은 복사본은 본부에 제출했고, 이건 복사본의 복사본입니다.”

    “헉. 저한테 막 유출해도 괜찮은 거예요 나중에 규하 씨 잡혀가면 어떻게 해요”

    “잡혀가면 탈출하면 되죠. 그 전에 날 잡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가”

    그 말을 듣고도 인유신이 영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자 현규하는 씨익 웃으며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허락받은 거예요. 사실 밝혀낸 게 없어서 별 내용도 없거든요.”

    어쩐지 조사 자료가 꽤 얇다 싶었다.

    “천천히 읽고 있어요. 밖에서 잠깐 볼일 좀 보고 올게요.”

    “그래도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스토야한테 바로 전할게요.”

    숙소를 나온 현규하는 그제야 숨을 크게 몰아쉬었으나, 가슴 안쪽에서 치받히는 듯한 갑갑함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문밖에 한참이나 서서 얼굴을 문지르던 그는 허공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전화 통화하는 목소리가 인유신에게 들리지 않을 거리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 뭐냐, 바빠.

    “좀 알아봐 줬으면 싶은 게 있는데요.”

    - 바쁘다니까.

    한양 지부에서도 인력이 차출된 탓에 최진혁은 정신없이 바빴다.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그는 이어지는 현규하의 부탁에 고민하다가 결국 승낙했다.

    - ……금방 알아보고 다시 연락하지.

    통화를 끊은 현규하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사 내용은 정말 별거 없었다. 인유신으로서는 이게 과연 거인을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은 자료들이었지만 스토야는 실마리를 찾았다.

    『시간이 중첩되었다는 게 확실하니』

    ‘네. 두 종류의 멸망만 섞인 게 아니라 시공간이 뒤틀려 있대요.’

    해석 계열 스킬 중 최고 능력자가 조사했지만 뒤틀리게 한 원인은 도출하지 못했다. 시간을 중첩하고 뒤틀어서, 태곳적에 멸망한 거인을 현재에 나타나게 했으리란 추측 정도였다.

    ‘그리고 먼지가 된 거인의 잔해에서 뚜렷한 유전자가 검출되었다는 얘기도 있어요.’

    거인이 환상이나 마수가 아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다.

    다른 정보들도 전부 들은 스토야는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말해 주었다.

    『일단……. 시간의 뒤틀림으로 과거의 거인을 불러왔다는 추측은 틀렸어. 스토얀은 시간의 흐름에 손을 댈 수 없거든. 둠네제울이나 네쿠라툴과 같은 만신전의 주신들이라면 시간의 불가역적인 성질 외에 다른 부분을 조정하는 게 가능해. 하지만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 하고.』

    ‘…….’

    『시간이 뒤틀린 건 스토얀이 의도한 게 아닐 거야. 멸망된 과거의 거인이 현세에 나타나게 된 이상 현상으로 인한 결과라고 봐. 상황을 보니 스토얀이 백두산에 불러왔다는 멸망인 대홍수가 방주와 현세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어 있는 거 같아.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거였네.』

    ‘그럼 거인들의 방주가 기원전부터 지속되었다는 뜻이에요’

    『아마도. 그런데 방주에 거인이 몇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그 안에서 생존하려면 쉽지 않을 것 같거든.』

    인유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토얀이 내부의 환경을 지구처럼 조성할 수 있을 리도 없을 테고, 식량 등의 문제도 있을 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가사 상태였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다른 생각이 들어. 거인이 마치 소라의 시신처럼 변했다고 했지』

    ‘……네.’

    『스토얀은 침식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죽은 소라의 육신이 붕괴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지. 그와 비슷한 조치를 우리아쉬들에게 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어.』

    그 말의 뜻은……. 인유신의 안색이 창백해진 걸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스토야가 쓰게 웃었다.

    『우리아쉬들은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을 거야.』

    ‘…….’

    『무엇보다 규하와 친구들이 우리아쉬 한 명을 죽였다고 했을 때 나는 영혼이 지하로 넘어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거든. 그 이유는 두 가지뿐이야. 소라처럼 세계의 경계를 넘는 순간에 죽은 사람, 또는 아주 오래전에 죽어 있던 사람.』

    거인들은 당연히 후자일 터였다.

    인간에게 적의를 가진 거인들이 저 너머에 존재하고 있다는 건 무척이나 오싹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럼 스토얀은 이아드의 멸망을 늦추기 위해 규하 씨를 여기로 불러온 게 확실히 아닌 거겠네요.’

    동정심으로 거인들을 위한 방주를 만들어 주는 행위 가능하다.

    그렇지만 거인들을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로까지 만들면서 그 긴 시간 방주를 유지하는 게, 과연 동정심이나 이타심만으로 가능한 행위일까.

    인간을 증오하는 거인들을 은밀히 거두고 있던 이가 세계를 존속하고자 한다는 건, 더더욱 가능한 행위가 아니다.

    스토야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스토얀과 좀 더 얘기라도 많이 나눠 볼 걸 그랬어. 걔가 무슨 생각인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진짜.』

    ‘원래 남매들은 안 친한 게 정상이래요. 나이 차이가 적을수록 특히 더 그렇고요.’

    위로하기 위해 건넨 농담에 스토야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너에게는 정말 미안해.』

    ‘에이, 저는 신경 쓰지 마시라니까요. 규하 씨만 혼자 이아드로 보내지 않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데요.’

    『……그것만이 아니라.』

    그녀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머뭇거리는 기색이다가 끝내 말을 삼켰다.

    『유신.』

    ‘네’

    『너는 규하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니』

    스토야와 얘기를 끝내고 숙소에서 나왔을 때도 현규하는 여전히 상공에 떠 있었다.

    ‘통화 중인가’

    휴대폰으로 뭔가 얘기를 듣는 듯하던 그는 인유신이 나온 걸 보고는 얼른 전화를 끊고 내려왔다.

    “고모랑 얘기는 다 했어요 뭐래요”

    스토야와 나눈 대화를 생각나는 대로 전했으나 어쩐지 현규하는 집중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전화로 심각한 얘기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아까 누구랑 전화한 거였어요”

    “최진혁이요. 별건 아니었어요. 아, 최진혁 이름이 나와서 생각이 났는데요.”

    “어떤 거요”

    “우리가 원래 알던 최진혁은 동생이 살아 있지만 여기 최진혁은 아니잖아요. 만약 유신 씨의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어땠을까 싶어서요.”

    최진혁을 핑계로 댄 궁색한 질문이었지만 인유신은 의심 없이 대답했다.

    “친어머니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넘어가고…….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냥 다른 가족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있지 않았을까요”

    종종 부딪치거나 꾸지람을 들어서 삐치기도 하지만, 따뜻한 애정으로 이루어진 가족이기에 금세 화해하고 재잘거리며 수다를 떠는, 이따금 상상했던 가족의 모습. 그가 온전히 누리지 못한 가족들의 일상과 평범한 행복.

    그런 얘기를 하며 인유신은 실없이 웃었다.

    “사람을 테이밍했다는 얘기를 하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엄마한테 등짝을 맞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때는 내 등짝을 대신 때리라고 내밀어야겠습니다.”

    “우리 엄마 힘 진짜 세요. 규하 씨라도 그냥 맞으면 엄청 아플 텐데.”

    중대한 비밀을 얘기하는 것처럼 낮은 소리로 속닥거리는 장난스러운 얼굴을 지켜보던 현규하가 문득 한숨을 삼키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묵직한 숨을 거듭하여 몰아쉬는 것 같았기에 인유신은 걱정스러워졌다.

    “어디 안 좋아요”

    “……아뇨, 아니에요. 갑자기 현기증이 좀 나서요.”

    거칠게 얼굴을 문지른 뒤 손바닥을 뗀 현규하의 낯빛은 평소와 같았다. 인유신도 걱정을 거두고 그의 손을 다정히 붙잡았다.

    현규하가 삼킨 괴로움은 붙잡은 인유신의 손등에 입 맞추는 입술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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