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214)

“얼굴로 밀어붙이는 거 금지예요!”

“그럼, 규하의 귀여움으로”

“그것도 안 돼요!”

“알았어요. 하루에 72번씩 쓰는 걸로 타협하죠.”

“하루에 72번씩 벗겠다고요!”

결론적으로 하루 3번, 아침 점심 저녁마다 쓰기로 타협했다.

물론 ‘후긴의 눈’을 쓴다고 해 봤자 현규하가 감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와 지금처럼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고, 일정 시간마다 전화하기로 했던 것처럼 약속을 쌓는 게 즐겁다.

“‘후긴의 눈’.”

인유신이 우물쭈물하면서 아티팩트를 쓰는 걸 본 뒤에야 현규하는 흡족해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요 아까 보니까 계속 멍하니 서 있던데.”

“스토야랑 했던 얘기가 자꾸 생각나서요.”

크르스니크의 의미만이 아니라 스토얀의 진의와 우리아쉬의 대처 등 그를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들은 무척 많았다.

“스토얀도 자기가 멸망의 원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겠죠”

“고모도 듣자마자 깨달았는데 몰랐다면 등신이죠.”

“행동 앞뒤가 좀 안 맞는 느낌이어서요.”

멸망의 결정적 원인인 스토얀이 그 멸망을 늦추기 위해 자식을 낳고, 이 세계로 불러들였다. 과오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의지라 볼 수도 있겠으나, 영 회의적인 생각만 들었다. 긍정적으로 판단하기엔 그간 겪은 스토얀의 이미지가 영 좋지 않았으니.

무엇보다 책임감을 가졌다는 사람이 그 책임을 자식한테 떠넘긴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막상 일을 저질러 놓고 죽을 때가 되니까 쫄았을지도요. 지금 인왕산과 연락도 안 되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걸 보면 일 저지른 거 들통나니 회피 중인가 회피 성향이라면 방주에서 거인이 나올 조짐이니까 튄 것도 이해가 가네요.”

“근데 스토얀은 이아드를 별로 안 좋아한다던데요.”

“죽고 싶지 않다는 인간이 못 할 게 뭐가 있겠어요. 한순간에 태세 전환해서 이아드에 엉겨 붙겠다는 결심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옹졸한 인간이라면 차라리 쉽겠지만.

인유신은 현규하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물으니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대답하긴 하지만, 인유신처럼 고민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마치 깊이 파고들려는 의식을 고의로 멈추는 것만 같다. 그게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망설이는 기색으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자 현규하가 싱긋 미소하며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하고 싶은 말 있죠”

“……으, 네.”

“뭔데요”

“제가 규하 씨한테 해도 되는 말일지 잘 모르겠어서…….”

“당연히 나랑 헤어지자는 말 외에는 다 해도 되죠. 스리 사이즈 알려 주면 더 좋고.”

장난스러운 대답이 자신의 웅크림을 풀어 주려는 의도라는 걸 잘 안다. 인유신은 그의 다정함에 용기를 냈다.

“부모님 돌아가시면서 제가 했던 후회가 또 있거든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엄마랑 아빠라고 부를걸, 하는 거였어요.”

“…….”

“규하 씨가 부모님을 생각하는 건 저와 조금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요, 우리가 돌아가면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된다는 건 똑같잖아요. 어떤 감정을 느끼든 그걸 전부 스토얀에게 부딪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자신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혓바닥 안에 웅크린 그 말을, 현규하도 이해한 표정이었다. 장난기가 서려 있던 눈매가 더없이 부드러워졌다.

“유신 씨 말이 맞아요. 이대로 아무것도 해소하지 않고 돌아가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때 그 관음증 변태 영감을 조져 놓고 왔어야 하는데, 하고요.”

조져 버리겠다는 말에 뭐라고 대답하기 곤란하여 어설프게 웃기만 했는데, 그것마저도 좋은지 현규하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스토얀에게 신경을 쓰다가 유신 씨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 후회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겁니다.”

느릿느릿한 음성으로, 현규하는 말을 이었다.

“예전에 이아드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던 거 기억하죠”

“네…….”

“돌아오지 않겠다는 건, 내가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상상할 수조차 없었죠. 이아드로 가는 것만이 내 인생의 목표였고, 골인 지점이었고, 종막이었고, 최후였으니까. 그대로 죽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

“그런데, 당신을 만났어요.”

아득히 멀었으나 더할 나위 없는 압박으로 존재하던 그의 최후가 서서히 흐려졌다. 현규하는 종막 너머에 새로이 생겨난 시간을 보았다. 그것의 이름은 미래였다.

“유신 씨. 나는 38살이 되어서 32살의 당신에게 나잇값을 못 한다는 핀잔을 받고 싶어요. 같이 떡볶이도 먹고 싶고, 노래방도 가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고요.”

“운동도요”

“당연하죠. 돌아가면 개인 헬스장 하나 사야겠습니다.”

서로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섞였다. 웃음의 끝에 현규하가 인유신의 눈꺼풀 위로 입술을 가만히 눌렀다. 그의 온기를 느끼듯이 머물러 있던 입술 사이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달싹거리다, 이내 입 안으로 삼켜졌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 더 있는데, 이건 비밀로 해 두겠습니다.”

“혹시 에베레스트 등정은 아니겠죠”

“괜찮네요. 굿 아이디어입니다. 우리 40살이 되기 전에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셀카 한번 찍어 봅시다.”

“그, 그건 좀…….”

농담으로 던진 말에 진지한 대답이 돌아와서 히익 하는 얼굴이 된 인유신에게 그가 다정한 눈웃음을 지었다.

“유신 씨와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이렇게 많은데, 자다가 깨서 후회하는 것 정도는 감당할 만하죠”

인유신은 대답 대신 현규하의 어깨에 기대었다. 넓은 어깨와 단단한 팔. 자신을 감싸는 것. 그 온기. 탄탄하게 단련된 강인한 육신 아래의 붉은 심장. 번져 오는 심장의 울림. 생명의 증거. 살고 있음을. 살아지는 게 아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삶. 나의 삶. 나의 시간. 나의 미래. 혼자가 아닌.

그가 보고 있을 미래가, 인유신에게도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국왕 이호는 다른 나라였다면 벌써 사망했을 나이, 즉 백발의 노인이었다.

“짐이 만월대로 자네를 부른 게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로군.”

“백두산에서 뭔 일 터질지 모르는데 호출하니까 솔직히 귀찮죠.”

“크흠, 큼.”

심드렁한 현규하의 말에 안색이 안 좋아진 궁인이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줬으나 그는 무시했고, 이호는 그냥 웃을 뿐이었다.

국왕을 알현할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아드의 조선은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별로 없었다. 외왕내제도 하고 독자적 연호도 제정하면서 높은 콧대를 유지해 왔다. 그 때문에 알현에 귀찮은 절차만 많아졌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경복궁과는 다른 느낌으로 웅장하고 화려한 멋이 있는 만월대였으나, 정작 현규하는 심드렁했다.

인유신과 같이 왔다면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그를 보며 즐거웠겠지만, 일만 처리하고 금방 돌아가려고 혼자 왔다. 그와 함께 개성을 구경하는 건 거인들을 처리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인유신을 번거롭게 하지 않기 위해 혼자 오긴 했으나 멀리 떨어진 건 사실이다. 현규하는 꽤 마음이 불안했다. 그와 떨어져 있으면 늘 느끼는 감정이긴 하지만.

입 속으로 ‘무닌의 눈’을 작게 읊조려 위치를 띄워서 확인한 후에야 조금 안정을 찾았다.

“그래서 조사한 결과가 뭐예요”

이호는 해석 계통의 능력을 가진 각성자였다. 게이트 이후의 혼란기 때 왕실의 장자 승계는 무너지고, 능력을 각성한 자가 왕위 계승에서 우선되었다고 들었다. 입헌 군주국이 된 이후에는 큰 의미가 없어졌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큰 성과는 없네. 아무래도 신대의 마법이 아닌가 싶더군.”

이호가 출력한 자료를 건넸다. 그녀를 비롯한 각성자와 학자들이 며칠 내내 철야하여 머리를 맞대었지만 끝내 마나의 눈을 분석하는 건 실패했다.

애초에 별 기대도 안 했던 현규하는 자료를 빠르게 넘겼다. 정말 별거 없었다. 겨우 이거 때문에 사람을 개성까지 부르다니.

“겨우 이거 때문에 사람을 개성까지 불렀어요”

필터링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의 발언에 궁인은 다시 창백해졌지만, 이호는 언짢아하지 않았다.

“바쁜 사람을 붙잡아서 미안하지만 자네에게 개인적인 용무도 있었네.”

“뭔데요”

“자네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지 그 세계의 조선은 어찌 되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현규하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당장 백두산에서 거인이 기어 내려올지도 모르는데, 최고 능력자를 후방으로 불러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썰이나 풀라는 거라니.

‘바지 사장인 국왕이라서 사태 대응 능력이 좀 떨어지나’

무시하고 갔다가는 더 귀찮을 일이 생길 거 같았다.

“선조의 묘호가 여기에서는 뭐였더라 아무튼 명종 다음 왕 때 일본이 침략해서 나라가 망할 뻔했습니다. 왕은 도주라는 재능을 개화했고.”

“음”

“그다음에는 여진족 앞에 머리를 잘 박아서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위기 탈출한 왕도 있었고요.”

“여진족이 조선을”

“그러다가 일본한테 한 번 더 당해서 진짜 망했네요. 조선 역사 강의 끝.”

이호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현규하는 조선의 역사를 세 마디로 요약하여 대충 말한 뒤 물러났다.

용건을 끝내자마자 사라진 현규하의 빈자리를 보며 이호는 쓴웃음을 흘렸다. 당혹스러움은 차치하고도, 그녀 역시 위급 상황에서 멍청한 짓을 벌였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다.

하나 잠깐이라도 현규하를 개경에 부르라는 신탁이 내렸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가 신앙을 보내지도 않는 둠네제울의 신탁이 왜 내렸는지는 이해 못 하겠지만…….’

언제는 인간이 신의 뜻을 온전히 이해한 적이 있던가. 이호는 상념을 떨치고 마나의 눈을 조금이라도 더 조사하기 위해 연구실로 향했다.

주차장으로 가던 현규하는 잠시 발길을 돌렸다. 기왕 개성까지 왔으니 인유신에게 뭐라도 선물을 주고 싶었다.

개성의 분위기는 한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 더 넓고, 사람이 좀 더 많을 뿐.

마나의 눈에 대한 정보는 통제되어 있다. 덕분에 그로 인한 불안감이 개성까지 번지지 않아 평화로웠다.

만월대의 기념품 숍을 둘러보던 현규하의 눈앞에 문득 나비가 날아왔다. 건물 안까지 들어왔다는 게 의외라서 나비가 날아가는 궤적을 따라 무심코 눈을 움직이던 그의 귀로 누군가의 음성이 들어왔다.

“아빠. 또 엄마한테 혼날 짓 했어”

전화 통화를 하는 듯한 음성은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하다. 익숙한 음성이, 한순간에 사슬처럼 현규하를 얽어맨다.

이곳에서 들리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할 목소리가.

그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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