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214)

침식 게이트는 음영이 생기지 않는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빛이 없는 것. 빛이 없는 것은 색채를 자아내지 못하며, 생명을 움트게 하지 못하는 것. 그렇기에 침식 게이트는 영구히 정체된다. 잊히지도 못하고, 멸망이 지배하는 처참한 몰골로 박제된 채.

스토얀은 침식 게이트를 걸어갔다. 곳곳에서 솟아나는 비정형의 검은 괴물은 그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불쌍한 것. 스토얀은 그들을 동정한다. 멸망한 세계의 망령들. 가엽지 않은가.

인간들이 보스 몬스터라 일컫는 망령이 그를 공격했다. 스토얀은 무방비하게 그 공격을 받아 냈다.

정신을 갈가리 찢어 삼킬 듯한 원념이 쏟아진다. 그것은 멸망에 이른 최후의 기억이다.

52년, 다시 52년, 그리고 다시 52년……. 무한히 반복되는 52년의 주기. 별의 악령들이 태양을 삼키고 세계를 파괴하려는 주기가 돌아왔다.

태양신의 전사들은 별의 악령들을 막지 못했다. 천공에서 태양이 사라지고 끝없는 암흑이 도래했다. 영원한 일식이 내려온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하나의 종말을 맞이한다.

모든 멸망의 기억을 받아들인 스토얀의 손바닥에 빛이 생겨났다. 침식 게이트가 모방하는 가짜 빛이 아닌, 멸망하지 않은 세계의 진짜 빛. 망령들은 비명인지 통곡인지 희열인지 분노인지 증오인지 설움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찬란한 빛 속으로 수속되었다.

스토얀은 그저, 기억되는 종말을 되씹을 뿐이다.

  

급박한 상황 때문에 공태성과 최진혁에게는 어느 정도 오픈하게 되었지만, 지하의 스토야와 연락을 취할 수단이 있다는 건 가급적 숨겨야 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정보를 전하지 않았다.

〈나는 유신 씨 외에는 아무도 안 믿습니다. 막말로 최진혁이 아버지에게 세뇌라도 당해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현규하의 그 말처럼, 언제나 주의하는 게 좋을 것이다.

마나의 눈 너머에 있는 게 거인들로 추측된다는 정보만으로도 헵타곤은 발칵 뒤집혔다. 처음에는 쉽게 믿지 않았다. 차라리 새로운 유형의 게이트였다면 모를까, 공간의 틈 사이에 거인들이 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사태였다.

그렇지만 녹화된 영상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고, 더하여 이아드에 남은 몇 안 되는 신들에게서 일제히 신탁이 내렸다.

우리아쉬를 조심하라.

우리아쉬. 인간의 인식에서는 까마득한 오랜 옛날에 신의 노여움을 사서 절멸한 태고의 종족들. 학자들은 모든 전승을 뒤지며 우리아쉬에 대한 조사를 했고, 헌터들도 거인을 막기 위한 준비를 갖췄다.

“산에서 전투하는 건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의 접경 지역은 대부분 마수들의 구역이다. 그쪽으로 거인이 넘어간다면 사냥하기 어렵다.

당장은 거인의 공격을 돌릴 방법이 되긴 하겠지만, 방치했다가 후에 어떤 위험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가급적 빠르게 거인들을 토벌해야 했다.

헵타곤은 거인들을 조선 땅으로 유인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백두산 아래에 방어진을 형성하도록 합시다.”

드문드문 있던 백두산 아랫마을의 주민들을 전부 다른 곳으로 소개했다. 만약 비슷한 일이 인유신의 세계에서도 발생했다면 이를 이행할 절차도 복잡할 터였고,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잡음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농지는 작물이 자라지 못하여 비어 있는 땅이고, 1차 산업이 거의 붕괴했기에 많은 이들이 이주 허가를 받아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백두산도 폐쇄되었으니 인근에 관광지나 관광 도시도 없었다.

또한 국가의 통제력은 독재 정권에 비할 만큼 막강하다. 남아 있는 소수의 주민들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농사를 짓는 농부나, 고향에서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뿐이었다.

주민들을 소개하고 건물을 철거한 마을에는 방어 본부가 설치되었다. 신탁이 내린 지 사흘 만이었다.

인유신도 임시 숙소를 배정받았다.

‘모듈러 건축으로 집 짓는 거 옛날에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튼튼한 거 같아.’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마공학자들이 뚝딱뚝딱하니 금세 철거가 끝나고, 튼튼한 건물들이 마을 곳곳에 올라갔다.

“8세야, 같…….”

어느새 8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위험한 곳에 6세를 데려올 수도 없으니 8세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같이 오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 때문에 6세는 최진혁이 맡아 주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아니, 힐링이다.〉

여기의 최진혁도 햄스터를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8세는 자고 있고 현규하도 회의에 참석 중이다. 무슨 논의가 오가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어차피 들어 봤자 하나도 모를 거 같아서 인유신은 그냥 숙소에서 기다렸다.

‘졸린데 잠이나 깰 겸 산책이나 할까.’

인유신은 작게 하품하며 문을 열었다가, 바로 돌아와서 얇은 카디건을 꺼냈다. 해가 지자 꽤 쌀쌀해졌다.

다른 때였다면 낯선 동네를 구경하며 놀았겠지만 영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을에서 보이는 사람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마나의 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언제 거인들이 몰려나올지 모른다. 마수와는 달리 인간과 같은 지성을 지니고 있는 적대적인 존재가.

유일하게 철거되지 않은 건물인 서낭당에는 마을에서 가장 큰 신목이 있었다. 수령이 몇백 년은 족히 된다는 나무 근처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을의 빛이 환하여 생각만큼 별들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스토야와 이야기를 나눈 후 머릿속이 내내 복잡했다. 인유신은 어수선하게 떠도는 그녀와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저에게 크르스니크 특성이 있는 게 어떤 상관이 있는 거예요〉

『으응, 담피르와는 달리 크르스니크는 온전히 인간의 표상이라고 볼 수 있거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년은 평범하게 성장하고 평범한 인생을 살다가 평범하게 죽었을 터였다. 그렇지만 뱀파이어와 삶의 궤적이 교차하면서 그 운명이 크게 바뀌었다.

평범했던 한낱 인간의 울림은 신까지 움직이게 했다. 신의 마법을 배우고, 신의 이름을 받고, 신에 의해 운명이 거두어진 평범한 인간.

그렇기에 ‘인간’에게 지독한 적의를 가진 우리아쉬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스토야의 설명을 들으면서 인유신은 조금 놀랐다. 최초로 뱀파이어를 사냥했다는 뱀파이어 헌터로서의 상징밖에 없다고, 과거에 현규하는 설명했었다. 그라고 하여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니 크르스니크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모양이다.

크르스니크로 각성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방주’에 대한 걸 알려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만약 인간들이 해석이나 분석 스킬을 써서 알아낸 게 있다면 나한테 전해 줄래 지상의 인간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더 빨리 파악할 수 있을 거야. 특히 그게 스토얀의 능력이라면.』

〈헵타곤 사람도 아닌 제가 의심을 받지 않고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해 볼게요.〉

울적한 기분이 감돌았다. 그가 아니라 스토야의 감정이었다.

『미안해. 너희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았을 텐데.』

〈규하 씨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한 번은 꼭 와야 했던 곳이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미안해, 정말.』

스토야는 거듭 사과하며 조용히 사라졌다. 정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유신 씨.”

“히야악!”

갑자기 귓불을 핥을 듯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인유신은 기겁하여 펄쩍 뛰었다. 파르르하는 그를 본 현규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유신은 가끔 현규하가 얄밉다.

‘잘생긴 얼굴로 이러니까 더 얄미워……!’

“유신 씨의 비명이 멋진 거 알아요 100억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비명을 질러도 애완쥐는 바로 주인님의 비명을 알아들을 수 있을 거랍니다.”

“발소리도 없이 오니까 놀랐잖아요!”

“발소리 따위가 없어도 알 방법이 있잖아요.”

“회의는 다 끝났어요”

“‘후긴의 눈’ 안 썼어요”

딴청을 피웠지만 현규하는 바로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인유신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현규하의 도착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스토킹 아티팩트를 꼭 써야 하는 걸까…….

눈꼬리까지 축 늘어뜨린 풀 죽은 표정을 보니 ‘당연히 써야지!’라는 대답이 나올 것 같았기에 인유신은 황급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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