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214)
  • 무인 정찰기는 거인과의 전투만이 아니라 인유신이 목격했던 두 번째 눈동자까지 촬영했다.

    “유신이가 본 게 진짜네. 우리가 죽인 거인과는 눈 색깔이 다른데”

    “마나의 눈이 뭔지는 몰라도 그 안에 거인 한 쌍만 있는 건 아니겠지. 처음에 나온 거인은 정찰이라고 보면 되나.”

    “경솔한 놈일 수도 있고.”

    세 헌터는 부족한 단서나마 의견을 나누었으나, 인유신은 거인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문제보다 다른 의문이 들었다. 재로 스러진 거인의 흔적이 마치 현소라의 마지막을 보는 것만 같았다.

    사라진 눈동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허공의 뒤틀림도 고요했다.

    “일단 최진혁에게 얘기하고 오마.”

    이 근처에서는 전파 기기가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공태성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팔 놈은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요”

    “거인 보고 많이 놀랐나 봐요.”

    “용케도 심장 마비로 안 죽는 걸 보면 튼튼하긴 하네요.”

    파우치 안에서 기절한 8세를 쓰다듬은 인유신은 아공간에서 ‘만두카이의 부스’와 ‘중긴 카툰의 벅특’을 꺼내서 한 팔로 안았다. 위험을 예고한 직후에 연결이 갑자기 끊겼으니 스토야가 많이 걱정하고 있을 거 같았다.

    “스토야에게 괜찮다고 말해야 할 거 같아서요. 아까 거인이 뭔지 알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요.”

    “음.”

    현규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주변을 둘러본 그는 장범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나의 눈을 경계하고 있는 걸 재차 확인한 뒤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나직한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유신 씨가 그러한 것들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돌아갈 단서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더 파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규하의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염려하는 그의 말에 인유신도 망설여졌다. 뒤틀림으로부터 느껴지는 직감은 여전하다. 인간으로서 더없는 불길함.

    당장에라도 등을 돌리고 이곳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안에서 또 거인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건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하지만 그 불길함이 현규하와 같이 돌아간다는 목적에 우선하느냐, 라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인유신은 짐짓 얼굴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괜히 예민하게 느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진짜 괜찮아요. 그럼 아티팩트 쓸게요!”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그의 걱정을 불식할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인유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안색을 가다듬으며 아티팩트를 일부 해방했다.

    [귀속 아티팩트 ‘일곱 문 너머의 세계’를 일부 해방합니다.]

    『유신!』

    의념이 이어지자마자 스토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앗, 아니에요. 거인이 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연결이…….’

    『맙소사! 다치지는 않았어』

    ‘규하 씨랑 다른 분들이 바로 막았어요. 뒷정리를 하느라 연락드리는 게 좀 늦었구요.’

    설명을 들은 스토야의 의념에 감탄하는 기색이 짙게 번졌다.

    『인간이 거기까지 강해졌구나……. 정말 굉장해.』

    ‘규하 씨의 상태창, 어, 그러니까 서번트 태블릿 보지 않으셨어요’

    『보긴 했지만 계량화된 수치가 무엇을 증명하는지 나는 모르니까. 지상의 일은 거의 몰라. 혈계로 살폈던 것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는 정도거든.』

    ‘인간이 강해졌다기보다는 규하 씨 같은 헌터들이 강한 거니까요. 저 혼자였으면 꼼짝도 못 하고 당했을 거예요. 그 거인은 대체 뭐예요’

    스토야는 말을 잠깐 멈췄다. 대답하기 곤란한 게 아니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리를 하는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얘기를 해 줘야겠다. 게이트가 발생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니』

    거인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던 인유신은 조금 당황했다. 거기까지 얘기가 거슬러 올라가는 거야

    ‘아니요. 연구하는 학자들도 명확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으음, 그렇겠지. 너희 세계에는 진실을 일부나마 전해 줄 신도 없을 테니까. 쉽게 표현하자면……. 일종의 배수구』

    ‘배수구요’

    배수구라니 어쩐지 좋은 뉘앙스는 아니었다. 스토야는 적당한 단어를 찾는 게 어려운지 말을 우물거렸다.

    『아니, 배수구라기보다는 바닥에 뚫은 순환 통로 으으으, 대충 그런 느낌인데…….』

    무슨 느낌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어리둥절해하는 인유신의 의념을 읽은 스토야가 설명을 더 다듬었다.

    『세계의 틈이 생기거나 소라처럼 아주 가끔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되기는 하지만, 만상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서로 격리되어 있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모를뿐더러, 알았다고 한들 교류할 방법도 없지.』

    ‘…….’

    『격리되었다는 건 한곳에 고여 있다는 뜻이야. 고여 있는 건 필연적으로 썩기 마련이지. 그렇게 썩어 가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손을 댈 수도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말겠지』

    ‘아, 그게 설마…….’

    『응. 세상이 멸망하는 가장 큰 원인이었어.』

    그녀의 설명은 과거형이었다.

    멸망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환경을 파괴하든, 제어하지 못할 무기나 능력을 사용하든 인간이 선택한 결과로 인한 멸망은 신이 관여해서는 아니 되는 것.

    신의 분노로 인한 멸망은 더 이상 그 세계의 인간에게 가능성과 미래를 보지 못한 것.

    생기가 쇠진하거나 자연이 인간을 거부한 멸망은 우주의 이치이니 역시 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

    하지만 정체되어 고인 탓에 비롯된 멸망은 어찌해야 하는가.

    『그래서 신계의 모든 신들이 합의하고, ‘섭리’를 창제했지. 고여 있는 바닥을 뚫고 그 흐름을 만상의 세계에 이어 주자고.』

    세계의 바닥에 고인 시간과 기억이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흩어진 파편은 게이트, 던전, 균열, 마경, 이계의 문 등 각각 적절한 이름이 되어 만상의 세계에 박혔다.

    『그렇게 형성된 게이트의 내부는 인간에게 이로운 것들을 제공해. 하나 무조건 퍼 주기만 했다가는 인간이 나태하고 교만해지겠지 이를 방지하며 시험하기 위한 게 바로 마수야.』

    ‘게이트와 각성이 같은 시기에 시작되는 것도 비슷한 의미인 거예요’

    『으응. 각성 또한 신이 섭리를 통하여 인간에게 베푼 은총이라고 할 수 있지. 인간은 게이트 내의 자원과 각성으로 인해 과거와는 다른 방향의 발전을 도모하게 되니까. 고인 채 정체되지 않고, 흐르게 되는 거야.』

    ‘…….’

    인유신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신의 은총이든 뭐든, 바로 그 게이트 때문에 부모님을 잃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게이트와 마수로 인해 죽고 다치고 가족을 잃는다. 그것을 과연 축복이라 하여 마냥 기뻐할 수 있는가.

    그 심정을 아는 것처럼 스토야가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알아. 나도 그래. 신들의 관점은 우리와 다를 수밖에 없어. 피조물 하나하나를 분별하여 인식하지 않거든.』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이 순간에도 마나는 시시각각 소모되고 있었다. 인유신은 잠시 머릿속의 헝클어짐을 밀어 두고 재차 이야기를 이었다.

    ‘8세를 만났던 유형의 게이트를 저희는 침식 게이트라고 불렀거든요. 침식 게이트는 멸망한 세계라니까 다른 거예요’

    『멸망하여 변질된 파편이야. 예를 들어 이아드가 멸망하게 되면, 다른 세계에 박혀 있던 이아드의 파편은 전부 침식 게이트가 되겠지.』

    ‘아…….’

    『얘기가 길어졌네. 원래의 논점으로 돌아가자면, 어떤 수단인지 나로서도 알 수 없지만 백두산에는 두 개의 멸망이 겹쳐 있어. 하나는 이아드의 미래고, 다른 하나는 과거라고 할 수 있겠네.』

    생기가 쇠진하여 멸망한 침식 게이트에 이아드를 연결했던 것과 비슷한 의미라고, 스토야는 말했다. 백두산에 겹친 멸망 중 이아드의 미래다. 그렇다면 과거는…….

    『과거에 이아드에서는 실로 멸망에 비할 정도의 대홍수가 있었지.』

    그 말을 듣자 생각나는 게 있었다. 대홍수 때 떠밀려 갔던 솜노로스. 대지를 지탱하는 거대한 신어마저도 속절없이 휘말리게 했던 신의 징벌.

    『둠네제울께서는 거인, 우리아쉬와 그에 동조한 인간들을 징벌하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키셨어. 우리아쉬들은 종족 자체가 절멸했지. 산 제물로 바쳐졌던 나와 스토얀은 그 홍수로부터 의로운 인간을 보호할 격을 얻기 위해 영생불로를 부여받은 거야.』

    줄곧 다정하게 이어지던 스토야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희미한 분노가 서렸다.

    『나는 스토얀이 대홍수 이후 인간을 보호하지 않아도 이해했어. 그 애는 이 세계를 좋아하지 않으니 모든 걸 무책임하게 손 놓을 법도 했으니까.』

    ‘…….’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네. 둠네제울의 대홍수로부터 우리아쉬들을 위한 ‘방주’를 세계의 이면에 만드느라, 더 이상 인간을 보호할 여력이 없던 거였어.』

    주춧돌은 집을 튼튼하고 오래도록 지탱하기 위한 용도로 놓는다. 한데 그 주춧돌이 세워지자마자 내부부터 썩고 마모되기 시작했다면 집은 어찌 되는가.

    세계를 존속하기 위한 토대가 정상이 아니었다면 그 세계는 어찌 되는가.

    오싹한 깨달음에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현규하의 손을 붙잡았다. 스토야가 억누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아드가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스토얀이었어.』

    인유신은 그녀의 결론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그러니까 뒤틀린 허공 너머가 몰살당했다고 알려진 거인들을 위한 방주란 뜻이죠 거인들을 가엽게 여긴 어느 신이 몰래 방주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없나요’

    『절대 없어.』

    스토야가 단호하게 말했다.

    『신이 직접 세계에 징벌을 내리기 위해서는 만신전 모든 신의 동의가 있어야 해. 그뿐만 아니라 우리아쉬의 창조주는 둠네제울이셔. 겉으로는 동의하고 뒤로는 막대한 힘을 소모하여 만신전 몰래 그 많은 우리아쉬들을 위한 방주를 만들 신이 있을까 자신이 직접 빚은 피조물이 아닌데도』

    ‘…….’

    『게다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대리자인 나와 스토얀을 내세운 건, 신들이 징벌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현세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야. 어느 정도 간접적인 영향이나 축복을 내리는 건 가능하지만, 특정 종족을 위한 방주를 직접 만들 수는 없어.』

    인유신은 자신을 따르는 자식들이 전부 죽은 고통으로 괴로워했으나, 끝내 힘을 투사하지 못하고 미쳐 버린 신을 떠올렸다.

    『스토얀 말고는 불가능해.』

    무거운 탄식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백두산에서 뭘 할 속셈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직접 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나는 지상으로 올라가는 게 불가능하니…….』

    혹시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인유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규하 씨랑 다른 분들은 못 느꼈다고 하던데, 제가 마나의 눈을 봤을 때는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뭔가 관계가 있을까요’

    『…….』

    생각이 직접 연결되는 의념의 대화인데도, 침묵이 가라앉았다. 아주 오랜 침묵이 지나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왜인지, 죄책감에 젖은 음성이었다.

    『아마도 네가……. 크르스니크이기 때문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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