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214)
  • 솜노로스의 눈알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모르겠다. 알 수가 없었다. 햄스터 같은 소형 동물이 성인 인간의 크기를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저 거대한 것들을 쉬이 비교할 수가 없었다.

    “뭐야, 저거…….”

    헌터로서 산전수전을 겪은 장범의 입술에서도 떨리는 음성이 흘렀다.

    귀속 아티팩트의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인유신은 마나의 통제를 순간 놓쳐 버렸고, 스토야와의 연결도 끊어졌다. 그렇지만 그녀의 경고성은 뚜렷하게 남았다.

    “지금 당장 피…….”

    마치 그의 말을 잘라 내는 것처럼, 거대한 손이 허공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유신 씨!”

    현규하가 다급히 인유신을 등 뒤에 세우며 양팔을 높이 뻗었다. 하늘을 가리는 손바닥이 공중에 우뚝 고정되었다. 거대한 손은 힘줄을 꿈틀거리며 움직이려 했으나 이를 붙잡은 현규하의 사이코키네시스는 견고했다.

    “장범.”

    공태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발밑에서 돌풍이 몰아치며 그를 높이 띄웠다. 공중에서 도약하여 하늘을 가로지르는 팔뚝에 내려선 공태성이 더르누인을 뽑았다. 일렁거리는 불길에 백염이 덧씌워진 칼날이 날카롭게 팔뚝을 갈랐다.

    쿵! 거대한 손이 나무를 부러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손목이 잘려 나간 팔뚝이 고통으로 요동을 쳤다.

    피비린내 나는 광경에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불길이 잘린 단면을 지글거리며 태우고 있어서 팔뚝에서는 핏방울도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착지한 공태성이 허공 저편으로 보이는 부릅뜬 눈동자를 매섭게 응시했다.

    “생명체이긴 한가 보군. 살아 있는 걸 베는 맛이다.”

    “주인님, 지지예요. 저런 변태 살인마 같은 소리 들으면 안 됩니다.”

    “닥쳐, 좀!”

    “아무튼 살아 있는 거라면 저게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뜻 아냐 손 잘랐다고 빡친 거 같은데 얘들아. 저거 봐, 눈알에 핏줄까지 곤두섰어.”

    “스토야도 당장 피하라고 했어요…….”

    “피하기도 늦은 거 같아.”

    장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절단된 팔뚝이 뒤틀린 틈 안으로 사라졌다. 도망치는 거란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현규하가 인유신을 역장으로 감싸며 공중에 살짝 몸을 띄우고, 장범도 간디바를 꺼냈다.

    이어, 허공을 잡아 찢으며 저것이 나타났다.

    걸음을 내딛기만 하여도 산을 울리는 발, 인간 한둘쯤은 아귀힘만으로 으깰 수 있을 손, 하늘을 가릴 것처럼 높이 솟은 육체, 그리고 고통과 분노로 핏줄이 선 눈동자.

    인유신은 저것을 하나로 설명하는 단어를 알고 있다. 거인.

    “———!”

    거인이 울부짖었다. 우렁우렁한 울림이 음파가 되어 거세게 요동쳤다. 그 울부짖음은 스토야가 습득하게 해 준 언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다. 인유신은 직감했다. 이 시대에 통용되지 않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에 잊힌 언어로 고통스레 울부짖은 거인이 잘리지 않은 왼손을 휘둘렀다.

    쿵!

    주먹질 한 번에 나무들이 우수수 쓰러지고 땅이 깊이 파였다. 부옇게 일어나는 하얀 모래들이 사방을 자욱하게 메웠다.

    장범의 바람과 함께 몸을 피한 공태성이 칼을 휘둘렀으나, 방금과는 달리 쉽게 잘리지 않았다. 불길이 넘실거리는 칼날이 캉 하는 금속성의 소리를 내며 튕겼다.

    “쯧. 시험 삼아 가볍게 휘둘러 본 것이긴 하다만, 안 먹히는군. 신체를 강화한 듯하다. 아까는 방심했다는 건가.”

    “방심이고 나발이고 화력이면 정리가 다 돼. 알아서 피해.”

    하늘에 뜬 채로 아공간에서 대전차 화기를 꺼낸 현규하는 자신보다 아래쪽에 공태성과 장범이 있든 말든 무시하고 그대로 쐈다. 투콰아앙! 귀청이 찢어질 듯한 커다란 발사음에 공태성의 욕설은 묻혔다.

    고통과 분노로 눈이 뒤집힌 거인은 현규하가 꺼낸 로켓포가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무기라는 건 확실히 알아보았을 터였다. 발사음이 울리자마자 몸을 피하려 했으나, 낯선 무기는 거인의 인식보다 훨씬 빨랐다.

    쿠아앙!

    소리만큼이나 빠르게 허공을 날아간 포탄은 그대로 거인의 가슴에 명중했다.

    “끄아아악!”

    아이러니하게도, 그 비명 소리만큼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거인에게 현규하는 로켓포를 연이어 발사했다.

    투쾅! 쾅!

    지축을 울리는 폭음은 거인의 외마디 비명마저 먹어 치웠다. 쿠웅! 끝내 거대한 육체가 나무들을 산산이 부러트리며 산줄기에 나뒹굴고 하얀 모래가 연기처럼 뿌옇게 치솟았다. 찰나의 정적이 사납게 내려앉았다.

    “해치웠나”

    장범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내뱉은 금기어에 인유신은 식겁했다. 현규하도 그를 쳐다보고 공태성도 입을 막으려 했지만 늦었다.

    “크아악!”

    거인이 아까보다 더욱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공태성이 몸을 피하면서 신경질을 부렸다.

    “네놈이 그딴 소리를 한 탓이다!”

    “규하 화력이 모자랐던 거지! 터지는 폭탄을 썼어야 했던 게 아니냐고!”

    “폭탄 썼어도 뼈는 안 부러졌겠는데요.”

    몸을 일으킨 거인의 상체는 엉망이었다. 로켓포에 명중당한 살점이 움푹 파이고 상처에서 연기가 지글거리며 피어오르는 참혹한 중상이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포탄은 늑골을 관통하지 못했다.

    “크흐!”

    왼손을 가슴에 쑤셔 박아 로켓탄을 뽑아낸 거인이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며 그것을 투포환처럼 던졌다. 화기로 발사하는 게 아님에도 막강한 힘이 실린 포탄은 매섭게 현규하를 향해 날아왔다.

    인유신을 등 뒤에 숨긴 채 현규하는 포탄들을 피해 빠르게 움직였다. 살기등등한 거인의 눈이 저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긴 현규하를 사납게 좇아왔다.

    현규하는 생각을 이어 갔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단단해진 저 뼈를 뚫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지간하지 않은 힘을 써야 할 텐데, 어디를 공격해야 가장 효과적일까.

    거인은 살아 있는 생명체고, 대부분의 생명체에게는 공통된 약점이 있다.

    “매형, 뒤에서 공격할 테니까 어그로 좀 끌어.”

    “끝녀에게는 네놈 같은 동생 없다고!”

    짜증을 왈칵 내면서도 공태성은 몸 앞에 불길을 크게 돋우었다. 평범한 산이었다면 산불로 번질 우려 때문에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겠지만 이곳은 이미 죽은 산이다. 몰아치는 하얀 불길에 잡아 먹힌 죽은 나무들은 땔감조차 되지 못하고 스러졌다.

    불길이 몰아닥치자 주춤하는 듯했던 거인은 분노가 더 큰지 현규하를 다시 쫓았으나, 공태성의 공격은 끝난 게 아니었다.

    “장범!”

    “크으, 이름만 불러도 척하면 척인 우리 관계 제법 멋져!”

    한없이 가볍게 나불거리는 장범의 입과는 달리, 화염과 바람을 다루는 두 사람의 연계 공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공태성의 키만큼 솟은 최초의 불길은 장범의 회오리를 빨아들이며 삽시간에 체적을 키웠다.

    “———!”

    거인의 눈까지 닿을 만큼 거대화된 화염의 회오리가 이글거리며 몰아쳤다. 거인은 하늘에 뜬 현규하에게 암석이며 나무를 뽑아 집어 던지던 것도 멈추고 회오리를 피해야 했다.

    그리고 이 회오리는 공태성이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거인이 주춤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은 그의 손바닥에는 압축된 화염이 생성되어 있었다.

    바람의 흐름을 만드는 간디바의 화살이 몰아치는 회오리의 정점으로 응축된 화염을 정확히 인도했고, 그 순간.

    콰가가가가!

    화염의 회오리는 거인을 집어삼키며 폭발했다.

    “아아아아아악!”

    폭발하는 화마 속에서 거인이 비명을 질렀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와 피비린내가 짙게 휘돌았다.

    폭발이 살갗을 찢어발기고, 붉게 드러난 근육이 다시금 화마에 불태워지는 극통이 이성을 마비시킬 터였다. 그럼에도, 거인은 두 발로 굳건히 대지에 서 있었다.

    거인의 등 뒤로 피해 있던 현규하에게는 오히려 호기였다.

    “유신 씨. 말이 안 통하니 생포해 봤자 쓸모도 없을 거 같고, 바로 목 자를 거니까 눈 감아요.”

    “네, 넵!”

    인유신이 눈을 꼭 감은 걸 확인한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용두검을 꺼냈다. 칼 하나로는 저 굵은 목을 바로 자르기가 어려울 듯하다. 한 쌍의 칼인 용두검은 동시에 쓸 때 제일 위력적이다.

    등호처럼 나란히 칼을 쥔 현규하는 사이코키네시스를 이용하여 그대로 거인의 뒷목에 내리꽂았다.

    “끼아아!”

    울부짖던 거인의 비명에 새로운 고통이 더해졌다. 화염의 폭발을 뒤집어쓰며 육신을 감싸던 방호까지 약해졌는지 생각보다 칼날이 깊이 박혔지만 아직 모자라다.

    현규하는 뒷목에 박힌 칼등만큼 얇은 면적으로 세밀하게 조정한 중력을 거세게 때려 박았다. 쿵! 쿵! 쿵! 칼날과 뼈가 으직으직 마찰되는 새된 소리에 인유신은 귀까지 틀어막았다.

    단말마의 비명과 묵직한 무언가가 바닥에 쿠웅 하고 떨어지는 굉음은 거의 동시에 들렸다.

    핏기가 빠져서 해쓱해지긴 했지만 인유신이 안전한 걸 재차 확인한 현규하는 그를 안고서 바닥에 내려섰다. 불길을 거둔 공태성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시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다 태우다니 매형은 상도덕이 없군.”

    “죽자마자 재가 된 거다!”

    목이 떨어지며 완전한 죽음이 이루어지자, 거인은 삽시간에 재가 되어 스러졌다. 먼저 잘렸던 손목도 마찬가지였다. 엉망이 된 주변의 풍경만 아니었다면 환각을 본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허무한 결과였다.

    “시체가 사라졌으니까 눈 떠도 돼요.”

    “…….”

    “유신 씨”

    인유신은 벌써 눈을 뜨고 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지상을 둘러보던 거대한 눈동자가 눈꺼풀을 크게 끔뻑하더니, 뒤틀린 허공 너머로 사라졌다.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함이 스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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