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214)

좋은 표현으로는 친화력이 좋으며 나쁜 표현으로는 무례한 장범이다. 공태성과 같이 몇 번 게이트를 다니면서 그는 헵타곤의 다른 직원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최진혁의 사무실까지 가는 동안 마주친 직원들과 제일 많이 인사한 사람도 장범이었다.

공태성이 미간을 좁혔다.

“백두산에 큰일이 났다는데도 회사 분위기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군.”

“파파도 느꼈어 비밀 임무 같은 건가”

“씨발, 그놈의 파파 소리 좀 집어치워! 여기엔 네놈이 뭐 하는 새끼인지 모르는 인간들밖에 없으니까 좆같은 오해를 하잖아!”

“내가 뭐 하는 새끼인데”

“현규하 다음가는 새끼!”

“매형. 나는 왜 끌어들이지”

“너도 닥쳐!”

공태성의 혈압이 올라가거나 말거나 그도 현규하가 장범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인정하고 있어서 인유신은 뿌듯해졌다.

흐뭇함 속에 사무실 문을 빼꼼 열고 인사했더니 최진혁이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안쪽의 회의실로 따라가자 그는 문을 걸어 잠근 뒤, 스위치를 눌러서 방음 기능에 더하여 외부의 염탐까지 막는 마법 방벽을 회의실에 둘렀다. 장범이 오오 하는 소리를 내며 휘둘러보았다.

“얼마나 대단한 얘기를 준비하고 있길래 이렇게 철저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좋을 게 없는 일이니까.”

회의실의 테이블에 앉자 최진혁이 영상을 하나 재생했다. 인유신은 순간 침식 게이트 내부의 영상인가 했지만, 밝게 비치는 햇살을 보고 이내 깨달았다. 저기는 백두산이었다.

“보다시피 백두산이다. 게이트가 열릴 때처럼 마나가 뒤틀려서 전자 기기가 하나도 안 먹히는 바람에 결정석을 이용한 장비로 다시 촬영한 거다.”

“저번에 매형이 보내 줬던 영상이랑 똑같은데요.”

“여길 봐라.”

최진혁이 영상을 빠르게 뒤로 넘겼다. 이어 화면은 백두산 중턱 어딘가의 상공을 비추고 있었다.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현규하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하늘이 뒤틀린 거예요 꼭 태풍의 눈을 밖에서 본 거 같은 모양이네요…….”

녹화된 화면으로 보는 것인데도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저것은 좋지 않다.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최진혁이 짧게 수긍했다.

“그래서 임시로 마나의 눈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마나가 뒤틀리고 있는 게 정확히 저 지점부터거든.”

“저기를 조사하라는 건가 다른 사람들을 부르지 않은 거 보면 우리만 가서 알아보라는 것 같은데.”

“그래. 현재 극비로 다루고 있는 사안이니 은밀한 조사를 해야 하는데, 헵타곤의 헌터가 빠지면 아무래도 얘기가 돌 수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잉여 인력이라 이건가”

“잉여 인력이라기보다는 특수 부대 정도로 생각해 주면 좋겠군. 너희 셋 다 생지 급이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무사히 귀환할 수 있을 거란 믿음도 있다. 그렇긴 한데…….”

최진혁의 신중한 시선이 인유신에게도 닿았다.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유신이 너는 빠지는 게 낫지 않겠나”

“제가 같이 안 가면 규하 씨가 위험해져서…….”

“…….”

장범이 푸핫 웃음을 터트리며 의자에 늘어졌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진혁아. 유신이가 안 보이면 규하가 맛이 가는 건 진짜거든.”

‘이해는 못 하겠지만 동행하는 게 최선이라면 알아서 해라.’라는 얼굴로 최진혁이 주억거렸다.

“아무튼 백두산의 이상 현상을 조사해 주었으면 한다. 부탁이다.”

부탁이라는 말을 하며 최진혁이 고개까지 숙이자 공태성은 어깨를 흠칫했고, 장범은 “진혁이가 태성이한테 잘해 주는 거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네…….”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평범하게 대하고 있는데도 잘해 주는 거라니 최 팀장님1은 그동안 대체…….’

인유신이 이상한 깨달음을 얻고 있을 때 현규하가 물었다.

“스토얀은 아무 말 없어요 화산 폭발을 멈췄던 거랑 관련된 문제는 아니고요”

“안 그래도 아는 게 있는지 물어봤는데 ‘그러니’라고 한 게 끝이다.”

“흐음.”

곰곰이 생각하던 현규하가 고개를 숙였다.

“유신 씨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변화가 있다면 뭐든 알아보는 게 좋을 거 같긴 해요.”

행간에 숨긴 말은 현규하도 쉽게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말세. 구삼승이 말했던 그것이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도래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아드가 완전히 멸망하는 날까지 긴 시간이 남아 있으니 벌써 그 징조가 나타나는 건 아닐 테지만, 뭐든 조사를 해 두는 게 해가 되지는 않을 테니.

“유신 씨가 좋다면 나도 좋습니다.”

“그러면 나도 가마.”

“마수 잡는 거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공태성과 장범도 차례대로 동의하면서 백두산행은 금방 결정되었다. 인유신은 정지된 영상 속에 있는 마나의 눈을 다시금 응시했다. 이 불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다음 날, 그들은 백두산의 산길을 오르게 되었다. 혜산 지부의 헌터라는 로베르트가 길 안내를 해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하고, 결정석을 동력원으로 쓰는 무인 정찰기만 지원받았다. 2시간 넘게 산길을 걸어야 나온다는 말에 인유신은 심장이 덜컹했으나 다행히 현규하의 옆구리는 안락했다.

“직접 걸어서 운동하면 더 좋겠지만 주인님이 초장부터 힘을 빼면 너무 힘들 테니까요.”

이 세상의 모든 산이 무너지면 운동 겸 등산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북쪽으로 오니 날씨가 확실히 쌀쌀해져서 얇은 카디건을 티셔츠 위에 걸쳐 입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하여 혜산을 거쳐 백두산을 오게 되었을 때는, 처음으로 보는 백두산이 신기하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침식 게이트와 별다를 바 없는 무채색의 드높은 산을 보니, 신기함은 사라지고 오싹함만이 그 자리를 메웠다.

〈한순간에 생기를 전부 소진하여 죽음의 공간이 된 그곳이 마치 우리 세계 같지 않나〉

최진혁의 그 말처럼, 생기가 쇠락한 자연의 결과를 현실에서 목격하는 건 무척이나 섬뜩한 경험이었다. 백두산을 촬영한 영상들을 보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섬찟한 한기가 스멀거렸다. 상공에서 흑백의 세계로 비치는 평범한 햇살로 인해 현실과의 괴리감이 더욱 느껴졌다.

“8세야, 너는 안 무서워”

“뀩!”

파우치를 꼭 잡고 있는 8세가 힘차게 외쳤다. 하긴, 8세는 명목상일지언정 침식 게이트의 히든 보스로 있었으니까 오히려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8세까지 용감하게 있으니 인유신도 기운을 냈다.

한참을 올라가던 장범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무슨 일이지”

“내가 백두산을 자주 와 봤잖아. 지금 가고 있는 등산로도 익숙한 코스인데 눈에 보이는 산세가 좀 미묘하게 다른 거 같다고 해야 하나.”

“기분 탓 아니에요”

“야, 규하야. 청진이 낳은 헌터 중 최고의 아웃풋이 나야. 수학여행 갈 때마다 백두산에 왔고, 혼자서도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올랐다고.”

인유신도 조심스레 말을 얹었다.

“등산로나 산세가 저희가 있던 세계랑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건 아닐까요”

“으음, 그런 거 같기도 해. 뭣보다 숲이 다 죽었으니까 느낌이 확 달라서…….”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산길을 조금 더 올라가던 장범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찝찝해서 안 되겠다. 금방 둘러보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그는 붙잡을 새도 없이 발밑에서 작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하늘로 날아올랐다. 장범이 일으키는 바람을 따라 버석버석하게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휩쓸리며 파스스 흩날렸다.

산길을 지나 숲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장범의 뒤를 쫓던 인유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회오리바람이 사라졌나 싶더니, 나무의 우듬지가 불쑥 올라왔다.

현규하가 무성의하게 말했다.

“백두산에서 불법으로 벌목하다가 걸리면 감옥까지 갔던 거 같은데요.”

“저희만의 비밀로 해 둬요.”

“주인님과 비밀이 생기니까 너무 흥분되네요…….”

“에이, 말로만 그렇다는 거죠”

“하하.”

“말로만 그런 거 맞죠!”

시시덕거리는 사이에 장범은 끙끙거리며 나무를 날라 왔다. 한 아름은 될 듯한 나무가 길옆에 풀썩 쓰러졌다.

“아우, 무거워. 숲 안쪽을 보니까 확실히 좀 이상하긴 해.”

“어디가요 그냥 죽은 나무 아니에요”

“여기의 나무들은 고목처럼 바싹 말라서 죽었으니까 무게가 좀 덜 나가는데, 이건 다르더라고.”

장범이 나무의 굵은 가지를 부러트렸다. 기웃기웃하고 있던 인유신은 소맷자락으로 코를 막으면서 얼른 물러났다. 부러진 나무줄기에서 지독한 썩은 내가 풍겼다.

독한 냄새에 공태성도 미간을 찌푸렸다.

“20년 전에 죽은 나무인데 썩은 내가 아직도 안 빠졌다고”

“그 20년 동안 백두산의 내부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잖아. 죽은 나무들의 시간도 멈춰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나도 규하 말에 동감이야. 가다가 보니까 새끼 호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는데 하나도 안 썩었더라.”

“근데 나무만 썩었다고요 고목이 된 나무가 다시 썩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게 제일 이상해. 이 나무 말고도 숲 안쪽에 드문드문 썩은 나무들이 있거든. 비가 내려서 썩은 거라면 숲 전체가 이 모양이거나, 적어도 비가 내렸을 특정 지역의 나무들에 흔적이 남아야 했는데 말이야.”

숲에서 일부의 나무만 고른 것처럼 썩었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인위적인 뭔가가 개입한 걸까. 인유신은 오싹함이 더 커지는 걸 느끼며 팔뚝을 문질렀다.

“최 팀장님한테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매형, 빨리 전화해.”

현규하는 이번에도 공태성을 연락 셔틀로 부려 먹었고, 공태성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최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진혁. 백두산이 병형 게이트처럼 변한 원인이 생기가 쇠진한 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나”

- 글쎄 20년 전의 일이라서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잠깐만 기다려 봐라. 찾아보고 다시 연락하마.

최진혁이 전화를 끊은 틈에 장범은 다시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하늘 높이 몸을 띄웠다. 이리저리 비행하며 주변을 둘러본 그는 평소답지 않은 심각한 낯빛으로 돌아왔다.

“산세가 다른 거 맞아. 확실해.”

만약 서로 다른 역사의 흐름으로 인해 산세가 달리 변한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바뀐 것이라면. 그 변화가 눈으로 보일 정도라면. 대관절 그때는 언제였을까. 만약 20년 전에 산세가 바뀔 만한 일이 발생한 거라면…….

인유신이 잡힐 듯 말 듯 한 아리송한 느낌을 좇고 있을 때, 최진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 백두산의 대다수 지역은 생기가 쇠하여 죽은 땅이 되었지만, 일부는 물에 장기간 잠겨 있었던 것처럼 썩었다는군. 참고로 20년 동안 백두산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스피커로 통화한 덕분에 같이 얘기를 듣던 인유신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물에 잠겼다면……. 혹시 그거 아닐까요 대홍수요.”

“그렇네요. 홍수가 범람해서 멸망했다면 산세 정도는 바뀌었을 거 같습니다.”

“침식 게이트에서 두 개 이상의 멸망이 관측된 적은 없지 않나”

“여기가 통상적인 침식 게이트는 아니니까.”

다른 자료를 더 찾아본 최진혁이 사진을 하나 전송했다.

- 백두산의 천지다. 20년 전에도 대홍수까지 추측이 닿긴 했다는군. 하지만 화산 폭발을 막은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토얀이니까 깊이 캐거나 연구하는 대신 그러려니 하고 묻어 둔 모양이야. 이번 이변이 아니었으면 따로 조사할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을걸.

사진을 보자마자 장범이 혀를 내둘렀다.

“천지가 넓긴 한데 이 정도는 아니거든 병사봉까지 넘어서 흘러넘치기 직전이구만.”

약간의 궁금증은 풀렸으나 본질적인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멸망의 원인이 두 개인 것과 마나의 눈은 어떤 관계인지.

일단은 계속 산을 더 올라가기로 했다. 이변이 발생한 장소 근처까지 오자 장범이 무인 정찰기를 조작하여 촬영을 시작했고, 인유신도 현규하의 뒤에서 재킷을 꼭 쥐고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일그러진 상공의 뒤틀림을.

허공의 뒤틀림과 마주한 순간, 뇌가 뒤틀리는 것만 같은 불길함이 엄습했다. 영상으로 목격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선연한 감각이, 더 없는 흉조가, 전신의 감각을 선뜩하게 옥죄며 물어뜯었다.

저것은 인간을 배척하고 인간을 멸시하고 인간을 증오한다.

저것의 존재 자체가 인간의 해악이다.

저것이 바로…….

“유신 씨.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뇌리로 스며들던 오싹한 흉험함을 몰아내며 경직된 전신에 피를 돌게 했다. 현규하의 손이 닿은 뺨으로부터 비로소 온기가 번졌다.

“삐이이…….”

8세도 불안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인유신은 숨을 몰아쉬며 현규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규하 씨는 저거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뭔가 느꼈어요 기분이 나쁘다는 느낌밖에 안 드는데…….”

공태성과 장범도 비슷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최초로 목격했다는 로베르트의 보고서에서도 이런 내용은 없었다.

예민하게 느낀 사람은 자신 혼자뿐인 것 같아서 인유신은 더욱 오싹해졌다. 이 느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파우치에서 8세가 외쳤다.

“뀨잇! 삣!”

당혹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인유신은 8세가 앞발로 제 오른쪽 귀를 건드리는 걸 의아하게 내려다보기만 했으나, 현규하가 바로 이해했다.

“고모한테 물어보라는 거 같은데요”

“아…….”

“이 현상이 뭐든 인간이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일이니 고모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오래 살았잖아요.”

그의 말이 맞았다. 인유신은 아공간에서 이어커프를 꺼내 착용하고 귀속 아티팩트를 일부 해방했다.

『어 유신 네가 물어봤던 건 아직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감사합니다. 오늘은 그 전에 여쭤볼 게 있어서요.’

인유신은 백두산의 이상 현상부터 그걸 본 자신의 느낌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언어가 아니라 의념으로 바로 전달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은 그리 오래 소모되지 않았다.

『현실을 침식한 두 개의 멸망에 대홍수……. 네가 느끼는 불길함…….』

생각을 곱씹는 듯하던 스토야의 경악성이 불현듯 뇌리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당장 거기에서 도망쳐!』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가시화된 불길함이 인유신의 뇌리를 다시금 하얗게 굳히고, 일행은 놀란 신음을 내뱉지도 못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더없는 흉조와.

뒤틀린 허공의 너머에서, 커다란 눈알이 번들거리며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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