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4/214)

그에 대해 되묻기도 전에, 마나의 고갈로 인해 아티팩트가 저절로 거두어졌다.

“흐어억…….”

기운 빠진 신음을 뱉으면서 비슬비슬 쓰러지자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던 현규하가 깜짝 놀랐다.

“잠깐만요! 준비해 둔 게 있어요!”

그는 다급히 아공간에서 포션을 꺼냈다. 다른 때였다면 당당하게 입으로 먹여 주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상황이 급해서 추근거릴 틈이 없었다.

인유신은 입에 대 주는 유리병의 포션을 꼴깍꼴깍 마셨다. 맛이 없었다.

“우와……. 이거 뭐예요 어렸을 때 억지로 먹던 물약을 백 배로 응축한 거 같은 굉장한 맛…….”

“마나의 회복을 촉진하는 포션이요. 마나가 한 번에 뿅 회복된다면 좋겠지만 그 정도 수준의 연구는 아직 무리인 거 같습니다. 단번에 마나가 회복되는 포션이 개발되기 전에 세상이 망하겠더라고요.”

입가심으로 뭐라도 먹어야 할 거 같아서 더듬더듬 일어나니, 현규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 안에 사탕을 쏙 넣어 주었다. 혓바닥을 살짝 건드리고 빠져나간 그의 손가락이 입 안을 구르는 사탕보다 더 달았다는 건 비밀이었다.

사탕과 초콜릿을 까먹으면서 기운을 회복한 인유신은 현규하의 다리를 베고 누워서 스토야와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현소라가 세뇌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도 현규하는 눈썹만 한 차례 꿈틀했을 뿐이었다. ……역시 그도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었던 듯했다.

현규하가 인유신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소파에 깊이 몸을 묻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고모가 지적해 주네요.”

“규하 씨는 괜찮아요”

“뭐, 노망난 관음증 변태 영감에서 노망난 관음증 변태 영감 새끼가 되긴 했지만요.”

인유신의 얼굴에 걱정이 짙어지자, 이 화제는 여기서 접자는 양 현규하는 여상한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뭐라고 했죠”

“제가 크르스니크로 각성하면 스토얀에게 대비할 수 있대요. 근데 제 특성이 이미 크르스니크인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

현규하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떠오르기가 무섭게 흩어지며 순식간에 가라앉았기에, 바로 가까이에서 보던 인유신도 눈치채지 못했다.

“굳이 아버지를 대비하거나 대립할 이유도 없잖아요. 고모가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보겠다고 했으니 아버지한테 가운뎃손가락이나 들어 올리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죠”

“으음, 그러면 될까요”

“다음번에 고모가 또 그 얘기 꺼내거든 지랄하지 말라고 해요.”

“앗, 그래도 규하 씨 고모인데.”

“그럼 나불대지 말라고 해요.”

그 말이 그 말인 거 같았지만 마나 고갈로 피로하기도 하여 그냥 실없는 웃음만 흘리고 말았다. 이아드에 애정이 없다는 스토얀은 왜 현규하가 왕이 되기를 바라는 걸까. 자신의 목숨도 달린 문제여서 거기에 말세란 또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무엇보다 현소라의 진실을 완전히 밝히지 않아도 되는 걸까……. 현규하는 정말 괜찮을지 염려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결에 쓸리듯이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상념을 좇으며 인유신은 스르르 잠 속으로 잠겼다. 이마를 쓸어 주는 나른한 손길이 좋았다.

  

잣과 대추가 조금 남은 맞은편의 빈 찻잔을 보며 스토얀은 생각에 잠겼다. 몇 번 더 시도해 보았지만 현혹은 여전히 통하지 않는다. 현규하도 말을 듣는 척하지만 절대 고분고분하게 제 뜻을 따라 줄 성격으로는 안 보였다.

“소라, 우리 아들은 뭘 생각하는 걸까”

현소라의 흔적은 이미 완전히 사라지고 없음에도, 스토얀은 마치 그녀에게 말을 걸듯 속삭였다. 지난 30년 동안 늘 그러했던 것처럼.

“몹시 궁금하긴 한데,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거 같기도 해. 그 애는 뱀파이어의 대적자인 담피르도 아닐뿐더러, 그 능력 또한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너의 파계를 가진 그 인간 청년을 알아본 것도 별 내용 없으니 무시해도 괜찮을 거 같아.”

스토얀은 엷게 미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안 듣는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훈계가 필요하겠지”

17.

헵타곤 혜산 지부의 학지 종급 헌터 최 로베르트는 10년 전 폴란드에서 귀화한 헌터다. 줄어드는 인구는 게이트를 온전히 커버하지 못했다. 곳곳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고 마수들이 게이트에서 출몰하니 인간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땅은 마수의 서식지가 된 지 오래였다.

국가 간 교류와 왕래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민간인이 마수의 서식지를 지나 국경을 넘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조선으로 몰렸을 터였다.

로베르트도 각성자 동료들과 협력하여 겨우 조선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고향을 떠나기 전만 해도 기력이 쇠하여 거동도 어려웠던 어머니는 조선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회복됐고, 수년간 편안한 노후를 보낸 뒤 영면했다. 그것만으로도 로베르트는 마수의 서식지를 돌파하던 지옥 같은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백두산 순찰을 하는 건 귀찮지만, 배부른 소리이긴 하지.’

로베르트는 피식 웃으며 소형 무인 정찰기를 조작했다. 그는 헌터였기에 귀화한 뒤 바로 헵타곤에 등록되었고, 거주지로 혜산을 배정받았다.

조선 정부는 전 국토를 철저히 통제했다. 대도시에 인구가 과하게 집중되지 않도록 귀화하는 헌터들은 대부분 지방에 거주하게 했다.

같은 맥락에서, 귀화한 헌터를 비롯한 조선의 전 국민은 거주지를 이전할 자유가 없었다. 타 도시로 이동할 때도 철저한 검문을 받아야 했고, 계류 시간도 한정되었다.

게이트의 발생으로부터 전 국토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불만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산발적인 시위가 발생했지만 전부 헵타곤에 의해 진압되었다. 정부가 네트워크와 언론을 통제 중이었기에 국민들은 자세한 경위도 알지 못했다.

‘그런 불만도 배가 부르고 편안하니까 생기는 거고.’

로베르트는 중앙 정부가 붕괴하고 각성자 연합들이 중세 시대의 영주라도 된 양 사람들의 계급을 나눠서 지배하던 폴란드에서 탈출해 여기까지 왔다. 민주주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인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는 의미에서, 조선은 천국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백두산을 관찰하는 무인 정찰기에 익숙한 화면이 비치고 있었다. 세상을 침식하면서 몰려드는 병형 게이트의 내부와 흡사한 무채색의 경치.

‘하도 많이 봐서 지겨울 만도 한데, 볼 때마다 오싹하군.’

로베르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가 조선에 오기도 전의 일이라 자세한 정황은 모르지만, 백두산의 폭발을 막은 대가라고 했다. 백두산이 폭발했다면 조선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테니 싸게 먹힌 거 같긴 하지만.

‘대체 어떤 헌터가 화산 폭발을 멈췄을까’

소문으로는 최상위인 생지 정급 헌터가 목숨을 대가로 고유 능력을 발현했다고도 하고, 마도공학의 극의라고도 했다. 어느 쪽이든 평범한 헌터인 로베르트로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로베르트의 임무 중 하나는 이상이 없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백두산을 정찰하는 일이었다. 일주일마다 백두산을 등정하여 그 높고 큰 산을 육안으로 둘러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보통 무인 정찰기를 애용했다.

오늘도 익숙한 경로로 드론을 움직이며 화면을 신중하게 주시하던 로베르트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멀쩡하던 화면에 갑자기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끼더니, 드론과 통신이 끊어졌다. 오류 코드를 추적해 보니 게이트가 열릴 때 마나의 흐름이 일그러지면서 통신이 끊기는 현상과 유사했다.

‘백두산에 게이트가 열린다는 관측은 없었는데’

의문을 느끼면서도 관측소에 확인해 보니 역시 게이트는 아니었다. 죽음의 땅이 된 이래, 백두산에서는 단 한 번도 게이트가 열린 적이 없었다.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없겠군.’

준비를 마친 로베르트는 무채색의 세상으로 들어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2시간 넘게 산을 올라가 드론의 송출이 끊긴 구역까지 접근한 로베르트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하늘이 뒤틀리고 있었다.

  

장범은 생각 이상으로 이아드에 금방 적응했다. 여전히 아공간에 챙겨 온 정장을 입고 있는 공태성과는 달리 조선의 최신 유행을 따른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었다.

최진혁의 존재를 알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서울, 아 참, 한양이지 한양 들어올 때 고래가 진혁이한테 부탁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거든. 그때 봤지. 출입 통제가 아주 엄격하더라고. 진혁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못 들어왔을 거야.”

“진짜요 한양 근교 던전에 갈 때는 늘 헵타곤의 헌터들이랑 같이 다녔으니까 몰랐어요.”

“도로는 검문이 빡세던데 산길로 숨어들어 오는 건 또 어떨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우리 쪽 진혁이가 성장 환경 때문에 까칠한 줄 알았는데…….”

장범이 짐짓 과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그와 인유신 사이에 굳이 끼어서 걷고 있던 현규하가 말을 받았다.

“근본부터 글러 먹은 인간이라고요”

“맞는 말이긴 한데 네가 남 말할 처지냐.”

“규하 씨가 왜요”

“아무것도 아냐. 커플 등쌀에 치이니까 서럽다고.”

가벼운 수다를 떨면서 셋은 바지런히 시장에서 장을 봤다. 최진혁은 사택에 집 하나를 더 준비하기 귀찮다면서 공태성의 집에 장범을 넣어 버렸고, 그 탓에 공태성의 혈압은 나날이 상승 중이었다.

장을 보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인유신은 궁금했던 걸 물어보려 입술을 뗐다.

“장 헌터님.”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도 돼.”

“미쳤어요! 누구 마음대로 형이야!”

예민하고도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 사람은 현규하였다. 살기까지 서려 있는 흉흉한 시선에 장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어는, 진짜……. 나이 서른 다 돼서 첫사랑이라 그런가, 중증이구만……. 너도 형이라 불러 달라고 유신이한테 말하면 되잖아. 생각해 보니까 너희 사귄 지 꽤 오래되지 않았어 아직도 말 안 트고 내외해”

“주인님이 형이라고 불러 주는 게 얼마나 성은이 망극한 일인지 알기나 해요 심장에 마비가 와서 안 됩니다. 그 외에 호흡도 곤란하고, 혈압에도 이상이 오고 또, 거기다가…….”

“……으응.”

줄줄이 이어지는 증상을 들은 장범은 그 대답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흰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현규하는 그렇게 공태성도 막지 못하는 장범의 주둥아리를 가뿐히 막았다.

발개진 얼굴로 민망한 시선을 바닥에 박고 있던 인유신은 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궁금했던 걸 다시 슬쩍 물었다.

“규하 씨랑 제가 이것저것 알아보니까요,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진짜 엄청 오래 지나야 할 거 같거든요. 그나마도 못 돌아갈 확률도 있고요……. 장 헌터님은 그래도 괜찮으세요”

“늦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으면 태성이를 믿고 기다렸겠지만,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들었는데 어떻게 그냥 있냐. 나라도 따라가야지. 그러다 죽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장범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준수가 들었으면 걔도 따라오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홀어머니를 혼자 모시고 있는 애한테 엄마냐 태성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부회장님도 마음 같아서는 같이 오고 싶으셨을걸 그렇지만 아가씨도 있고 그분은 책임져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

“반면에 나는 집구석이랑 의절해서 신경 쓰일 가족도 없으니 자유롭잖아. 그래서 뭐, 그냥 왔고.”

대단할 것도 없다는 여상한 어조였으나, 모든 걸 다 버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곳으로 간다는 게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르샤가 우라노스였던 시절부터 있던 원년 멤버들 사이가 끈끈하다는 얘기는 이혜연도 했었다. 장범의 말을 들으니 그때 상상했던 것보다 길드원들의 관계가 더욱 돈독하게 느껴졌다.

인유신의 가슴이 조금 찡해졌을 때, 미처 눈치채지 못한 현규하가 평소처럼 가차 없는 말로 감동을 끊어 냈다.

“그쪽은 매형이랑 있으면 방화라도 잘하지만, 한준수는 따라와 봤자 써먹을 곳도 없잖아요.”

“대체 어쩌다가 파파가 하루아침에 네 매형이 되었는지 들을 때마다 정말 궁금한데 왜 아무도 설명을 안 해 줘”

인유신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뭐, 우리 준수는 그래 봬도 칼을 잘 벼리고, 칼을 잘 벼리고, 칼을 잘 벼리지.”

“매형만큼이나 쓸모없네요.”

“그리고 파파 수발드는 건 걔가 최고야.”

“매형보다 더 쓸모가 없네요.”

그러는 사이에 아파트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 인사하고 헤어지려는데, 그보다 먼저 문이 벌컥 열렸다. 안에서 나온 공태성이 셋을 둘러보고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데리러 갈 참이었는데 타이밍이 맞군. 장 본 거 대충 정리하고 나갈 준비 다시 해라.”

“갑자기 왜 그러세요”

“헵타곤 호출이다. 백두산에 트러블이 발생한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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