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214)
  • “장 헌터님도 스토야와 만나셨어요”

    “엉.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명계로 연결되더라고. 외국인 이름이라서 금방 까먹었는데 스토야였던 거 같네. 기껏해야 10살밖에 안 되어 보이던 꼬마 말이야. 고모라고는 하는데, 오히려 조카인 규하가 첫사랑에 실패 안 했으면 딸뻘 아니야”

    “규하 씨 첫사랑은 전데…….”

    “……어, 그래.”

    어색한 침묵이 잠시 고였다. 장범이 헛기침을 짧게 했다.

    “여튼 너도 귀속 아티팩트 얻었어”

    “네. 저번에요.”

    “역시 규하가 구해 줬구만. 그 이어커프를 끼고 아티팩트를 해방하면 기운을 감출 수 있다고 하더라.”

    인유신은 이어커프를 귀에 착용해 보았다. 귓불을 감싸는 독특한 디자인의 이어커프는 귀속 아티팩트의 문신까지 완전히 덮었다.

    [이아드의 왕 스토야가 제작한 이어커프]

    이어커프를 감정한 현규하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감정의 의미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만든 사람이나 아티팩트 이름만 뜨고 효능이나 설명은 하나도 밝히지 않는 게 무슨 감정이죠”

    “그래도 감정할 수 있으니까 사기는 안 당하잖아요.”

    “맞네요. 감정도 쓸모가 있군요.”

    재빨리 제 말을 바꾼 현규하가 이어커프에 마나를 주입하며 내부를 살폈다. 인유신으로서는 아무리 마나를 넣으며 탐색해 봐도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과연 그는 달랐다.

    “다른 기능까지 전부 파악한 건 아니지만 일단 장범이 한 말처럼 기운은 덮겠네요. 귀속 아티팩트를 해방할 때 문신이 발광하는 건 마나가 일순간 급격히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어커프는 그 반응을 완전히 감출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요.”

    “규하 씨가 아티팩트 쓸 때 장갑을 벗는 것도 그래서였어요”

    “마나가 반응하는데 그 위가 덮여 있으면 좀 갑갑하거든요. 신경 안 쓰는 헌터들도 있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감각을 더 예민하게 하려고요. 평소에 반장갑을 끼는 건 사람들이 문신에 흥미 보이는 게 귀찮아서고.”

    이참에 평소의 궁금증도 해결한 인유신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자신이 전투를 하겠답시고 아티팩트를 해방할 일은 없을 테니 이어커프를 착용해도 무방할 듯했다.

    “지금 써 볼까요”

    “그래요. 관음증 환자에게 집에서 데이트하는 오붓한 장면이나 연출하도록 합시다.”

    현규하는 TV의 전원을 켜며 인유신을 당겨 안았다. 인유신은 그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이어커프를 착용했다.

    [귀속 아티팩트 ‘일곱 문 너머의 세계’를 일부 해방합니다.]

    익숙한 환상에 이어, 소녀의 목소리가 오랜만에 뇌리에서 울려왔다.

    『반가워! 그동안 잘 지냈니』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급해서 설명하는 걸 까먹었는데, 마나의 소모를 줄이려면 머릿속으로 생각해도 돼.』

    인유신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8세 덕분에 A급인 마나가 일부 해방한 것만으로도 쭉쭉 빨리는 게 느껴졌다.

    『규하 친구가 아이템을 잘 전해 줬나 보다.』

    ‘규하 씨 친구는 아니지만, 잘 받았어요.’

    『스토얀이 직접 보고 있지 않을 때는 마음대로 써도 되지만, 마주칠 일이 있다면 다른 곳에 보관해 두렴. 아공간에 넣어도 들켜.』

    예전부터 느끼던 미묘함이지만, 스토야는 어쩐지 스토얀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궁금해졌으나 일단 참고 가장 궁금했던 얘기를 꺼냈다.

    ‘규하 씨가 절 구해 줬다는 옛날 기억도, 규하 씨 어머니 기억도, 전부 스토야가 알게 해 준 거예요’

    『……응. 혹시 나와 스토얀이 산 제물이 되던 때의 꿈을 꾼 적도 있니』

    ‘네. 그것도 스토야가 꾸게 한 거였어요’

    『규하가 내 혈계를 갖고 있으니 스토얀처럼 선명하지는 않아도 그 애 주변의 흐름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되거든. 소라에 대한 건 바리공주께 들었고……. 내가 설명을 해 주는 방법도 있지만, 그보다는 너희가 직접 보고 겪으며 판단을 내리길 바랐어.』

    그러며 스토야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내가 실수를 했니』

    ‘아니요.’

    인유신은 심호흡을 크게 하며 다시금 대답을 읊조렸다.

    ‘아니에요. 규하 씨가 절 구해 줬다는 걸 알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알려 주지 않았다면 현규하가 혼자만의 기억으로 묻어 두었을 그 시간은, 이제 두 사람의 시간이 되었다. 그 시간을 알게 되었기에, 인유신도 현규하에게 저의 가장 못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

    ‘14년 전에 절 구해 준 사람이 규하 씨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순간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규하 씨가 절 구해 주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고.’

    적반하장이나 다름없는 그 말을 듣고도, 오히려 자신의 위태로움에 고통스러워하던 그의 힘겨움이 지금도 선연하다.

    나는 변할 수 있을까. 변하게 될까.

    인유신은 제 허리를 감싼 현규하의 품에 더욱 몸을 깊숙이 묻었다. 두근두근두근. 익숙한 심장 박동이 그를 부드럽게 감쌌다. 19년 전에도, 14년 전에도, 지금도, 언제나 그를 지탱해 주었던 그 고동.

    그리고 이 사람이 늘 그리워했던 또 다른 사람.

    ‘……이런 질문 조심스럽지만요, 규하 씨 어머니는 혹시 스토얀에게 세뇌 같은 걸 당하신 게 아닌가요’

    『나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

    머릿속에서 울리는 스토야의 어린 음성이 단호했다.

    『소라는 목숨까지 도외시할 만큼 스토얀에게 지나치게 맹목적이야. 그걸 연정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스토얀에게 정신을 휘저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다른 추측부터 떠올리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녀는 이어 뱀파이어로서 스토얀의 능력인 현혹에 대해 설명했다. 진조와 진조에 가까웠던 뱀파이어들이 그 현혹을 인간에게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확실히 비슷했다. 현혹으로 인해 뱀파이어를 사랑하게 된 인간들의 맹목적인 헌신은. 그렇게 헌신하여 스스로를 내던진 현소라의 이용당한 운명과, 그로 인해 평생 힘겨워했던 현규하를 떠올리니 못내 마음이 무겁다.

    『너도 정신을 방어하는 아티팩트나 아이템을 패용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할게요.’

    『또 궁금한 건 없니』

    많았다. 너무 많아서 뭐부터 질문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릿속을 찬찬히 가다듬으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질문부터 꺼냈다.

    ‘스토야도 규하 씨가 산 제물이 되어 세계를 지탱하는 왕이 되길 바라는 건가요’

    탄식하는 듯한 기척이 뇌리로 느껴졌다.

    『유신, 나는 이 세계를 사랑해. 산 제물로 바쳐지고, 강제로 영생불멸을 부여받고, 지하에 얽매였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묻힌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었어. 비록 지옥이라 명명되었을지라도.』

    ‘…….’

    『그렇지만 동시에 나는 산 제물이 될 때의 절망감을 알아. 죽지도 못하면서 원하지도 않은 영생을 누리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도. 사랑하는 이 세계가 종말로 치닫는 흐름이 늦춰지길 바라지만, 규하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 ……규하는 어떻게 하길 바라니』

    ‘돌아가고 싶어 해요.’

    『……응, 역시 그렇구나.』

    무거운 낙담의 기운이 순간 짙게 번졌으나, 스토야는 능숙하게 이를 거두었다.

    『그럼 돌아갈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구삼승할망이 그러시던데, 말세가 도래하면 길이 열린다고 하던데요’

    『구삼승을 만났니 어떻게』

    삼승의 부탁을 받았다는 구삼승과 만났을 때의 얘기를 전하자 스토야가 놀라워했다.

    『삼승께서 마지막까지 큰 도움을 주셨구나……. 사실은 말이지, 나는 여러 신들께 쪼개어서 청을 넣었어.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께는 둠네제울께서 형태를 새로이 빚은 칼리칸트자로스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고, 삼승께는 명계와 연결되는 아티팩트를 던전에서 기다리실 수 있는 신께 전해 달라는 식이었지.』

    현규하를 위해 여러 안배를 했다고 했으니 인유신이 철의 시대에서 미처 접하지 못한 청들이 더 있을 터였다.

    『너희가 어떤 경로로 나아갈지 모르니 내 손이 닿는 한 여러 신들께 부탁드린 것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신들이 정확한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거였어.』

    ‘어째서요’

    『……그분들이 무심코 스토얀에게 얘기를 흘렸을 때 너무 많은 정보가 흘러들어 가면 안 되니까.』

    미심쩍었던 기분은 차츰 확신이 되어 갔다. 스토야는 현규하를 이아드로 이끄는 계획을 설계했으면서도 진의는 스토얀에게 숨겼다.

    『스토얀의 목적이 규하를 새로운 왕으로 삼으려는 것만은 아니란 느낌이 자꾸만 들어. 스토얀은 이아드에 애정이 없거든. 나와는 다르지…….』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관점이었기에 인유신도 침묵했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가만히 되짚어 봤지만 그의 목적이 뭘지 전혀 짐작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얘기가 길어지면서 빠져나가는 마나로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죄송한데 얘기는 다음에 이어서 할 수 있을까요 마나가 거의 소진되어서요.’

    『아, 미안.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나. 말세가 도래할 때 길이 열린다는 정보는 한번 알아볼게. 말세라면 말 그대로 세계의 멸망이겠지 멸망을 겪는 게 나도 처음이라서 그 부분은 잘 몰라.』

    짐짓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스토야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나직이 가라앉은 속삭임이었다.

    『유신. 스토얀에게 대비하려면 네가 크르스니크로 각성해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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