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상태 애정. 살의. 두근. 흥분. 벽쿵.]
그의 감정 변화를 보고는 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규하가 박력 넘치는 포즈를 요구할 틈은 없었다.
전화가 걸려 왔다.
“또요 네, 네. 알았어요.”
성의 없이 전화를 대충 받은 현규하가 한숨을 폭 쉬었다.
“아버지가 또 부르네요.”
“최 팀장님 전화예요”
“중간에 끼여서 노인네 말이나 전하려고 최진혁이 팀장 직함을 달고 있는 건 아닐 텐데 말이에요.”
여전히 스토얀은 가끔 현규하를 거처까지 부르곤 했다. 만나서 하는 대화라고는 ‘나와 스토야의 뒤를 이을 준비는 되었니’와 ‘좀만 생각해 보고요.’의 반복이었지만.
그의 경계를 사서 좋을 건 없었기에 현규하는 쌍화차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마치 오늘내일하는 영감의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비위 맞추고 있는 후손이라도 된 기분이에요.”
저라도 같이 갈까요, 하는 말이 목구멍에 걸렸지만 인유신은 꾹 참았다. 이아드에서는 현규하의 말을 잘 듣기로 했고, 현규하는 그가 스토얀에게 불필요하게 노출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대신 기운 내라는 의미를 담아 그를 꼭 끌어안았다. 현규하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정수리로 가벼운 입맞춤이 떨어졌다.
이번 던전에는 공태성도 참여했다. 뒷정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나온 공태성을 현규하가 불렀다.
“매형, 유신 씨를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줘.”
“네놈은 진짜…….”
빠지지 않게 된 ‘매형’ 소리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공태성의 낯이 다시금 흉악해졌지만, 어금니를 꽉 깨물며 참았다. 이 일의 원흉이 된 인유신은 애써 딴청을 피웠다.
‘그치만 왠지 부회장님은 규하 씨가 길드장님을 매형이라고 하는 걸 좋아하실 거 같아.’
확인하려면 아주 긴 시간이 지나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럼, 주인님……. 귀엽고 사랑스러운 규하를 잊으면 안 돼요…….”
겨우 몇 시간 헤어질 뿐인데 몇 년 동안 헤어지는 것처럼 절절한 현규하의 태도에 공태성의 눈총이 따가워졌다.
애절한 작별을 한 뒤, 새로 배운 운전에도 완전히 익숙해진 공태성의 차를 얻어 타고 사택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였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데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몹시도 익숙한 음성이긴 한데, 이아드에서 들리면 안 되는 소리였다.
“파파!”
인유신은 반사적으로 공태성을 올려다보았다. 공태성의 얼굴이 ‘매형’ 소리를 들을 때만큼이나 일그러져 있었다.
“방금……. 못 들으셨어요”
“못 들었다.”
“파파! 여기야!”
“어디서 장 헌터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그럴 리가. 잘못 들었겠지.”
“야, 공태성! 나 무시하냐!”
“장 헌터님 맞는 거 같은데요.”
“환청이다.”
공태성은 꿋꿋하게 무시하며 인유신의 팔을 잡았다. 서둘러 자신을 데리고 아파트로 들어가려는 그의 손길에 이끌리며 힐끔 돌아본 인유신의 눈동자가 커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돌풍이 공태성에게 몰아쳤다.
“미친놈이!”
가뿐히 피한 공태성이 돌풍 사이에 있던 장범의 멱살을 붙잡아서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프지도 않은지 벌떡 상체를 일으킨 장범이 공태성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와, 그 먼 길을 왔는데 인사 한번 화끈하네. 그런다고 내가 돌아갈 거 같아 이대로 네 바지를 벗기면 벗겼지, 절대 안 가!”
“이 씨발 새끼야! 미쳤다고 여기에 기어들어 와 뒈지고 싶어!”
“못 돌아온다며! 너 죽었을 때 무덤에 흙 끼얹어 줄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할 거 아냐!”
“네놈부터 죽여 버리겠다!”
“태성아. 그리고 말이야, 규하랑 유신이가 염천 떨 게 뻔한데 이혼이나 당한 너 혼자 있으면 얼마나 우중충하겠어. 나라도 네 편을 들어 줘야 밸런스가 맞지.”
“그냥 죽어!”
“네 무덤에 흙 뿌리기 전에는 못 죽어!”
난데없는 소동에 아파트 주민은 물론이거니와 근처를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쏠리고 있었다.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 인유신은 두 사람의 대화를 곰곰이 분석했다. 한 명은 걱정되어서 찾아온 거고, 다른 한 명도 걱정되어서 쌍욕을 하는 게…… 맞겠지
“안녕하세요!”
엄마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가온 아이가 발랄하게 배꼽 인사를 꾸벅했다. 올리비아의 아들이었다. 아들의 손을 잡고 있던 올리비아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공태성과 장범을 돌아보았다.
“미스터 공의 친구분 같긴 한데, 들리는 얘기가 재밌네요. 저분들 어떤 관계예요”
인유신은 침착하게 설명했다.
“저는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뽀얗게 쌓인 먼지를 씻고 나온 장범은 허겁지겁 입에 음식을 쓸어 넣었다.
“아니, 나도 아공간에 먹을 걸 쟁여 오긴 했거든 근데 이 정도로 허허벌판일 줄은 상상도 못 해서 중간에 식량이 똑 떨어졌…… 쿨럭!”
“처먹고 얘기해라!”
식사와 수다를 동시에 하다가 기어이 목이 멘 장범의 앞에 물통을 탕 내려놓으며 공태성이 윽박질렀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식사를 끝마친 뒤에야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장범은 안나를 치료할 성수를 건네받으며 솜노로스에게 대강의 사정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평행 세계인지 나발인지 그건 모르겠고, 그 문을 더 붙잡고 있는 건 가능하다길래 후딱 서울 가서 약만 전해 주고 다시 왔어.”
“설마 회령에서 걸어오신 거예요”
“어. 무슨 이동할 수 있는 게이트가 있다던데 신분증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못 쓰겠더라고. 고래가 길 안내를 해 주지 않았다면 헤매다가 굶어 죽었을 거야. 우리 조상님들은 가도 가도 산밖에 안 보이는 이 땅덩어리를 대체 어떻게 걸어 다닌 거지”
공태성이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며 이마를 눌렀다.
“어쩐지 고래가 지도 보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더니…….”
솜노로스는 해가 뜬 시간에도 잠을 자지 않고 매일 장범에게 날아가서 한양까지 오는 길을 안내해 준 모양이었다.
“너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내가 부탁했어. 들으면 난리 날 거 같아서.”
“당연하지! 멱살 잡아서 도로 문 너머로 처넣었을 거다!”
“이미 닫혔지롱.”
배 째라는 얼굴로 장범이 소파에 늘어졌다. 살벌하게 그를 노려보던 공태성이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안나는”
“깔끔히 나았어. 아가씨 병세를 봐줬던 추기경님이 다시 검진을 했는데 신성력은 완전히 사라졌대.”
“……그래.”
손으로 얼굴을 덮은 공태성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참 지나서 세수를 하고 나온 그의 눈가가 벌겋게 되어 있는 걸 인유신은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내가 설마 그냥 왔겠냐 파파를 위한 특대 서비스를 준비해 왔지.”
장범이 싱글거리며 휴대폰에 담아 온 영상을 재생했다. 엄마의 무릎에 앉은 민안나가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아빠! 안나는 하나도 안 아파! 옛날에도 안 아팠지만! 왜 아빠랑 엄마는 안나가 아프다고 한 거야
이제 병원에 자주 가야 할 필요도 없으니 실컷 놀 거라면서 아이는 즐거운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민안나가 실컷 수다를 떤 뒤에야 민끝녀가 영상을 촬영 중인 장범에게 물었다.
- 장 헌터님, 그래서 안나 아빠가 어디로 간 거예요
- 무슨 게이트라던데요
- 무슨 게이트요
- 무슨 게이트요.
- ……안나야. 언니랑 방에 올라가서 놀고 있을래 엄마는 범이 삼촌이랑 할 얘기가 있어.
민안나를 베이비시터와 내보낸 민끝녀는 따가운 시선을 내쏘았다. 영상을 보던 인유신까지 움찔할 만큼 매서운 눈빛이었다. 특히 공태성은 눈에 뜨일 정도로 어깨를 흠칫 떨었다.
- 어디에서 약을 구했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보고서를 쓰는 것처럼 상세하게 설명해요.
- 아, 그게 좀 복잡한데. 대충 요약하자면 약 구하러 간 태성이는 죽을 때까지 못 옵니다!
“장범! 이 미친 새끼가!”
공태성은 거의 비명을 질렀고 휴대폰 너머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범이 촬영하던 휴대폰까지 놓친 바람에 영상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높은 천장만 계속 비추었다.
영상에 녹화된 대화만이 멀리서 들려왔다.
- 공태성 어디에 있냐고! 이거 붓기 전에 제대로 말해!
- 어, 어 부회장님 아무리 제가 A급이라도 전기 포트 물 부으면 화상 입는데요!
- 내 얼굴에 부을 거야!
영상은 거기에서 끊겼지만 인유신의 떨리는 동공은 멈추지 않았다.
〈끝녀 누나는 어떻게 민노식 밑에서 참고 살았는지 의아한 성격이거든요. 유신 씨에게는 언제나 천사처럼 상냥하겠지만요.〉
불현듯 현규하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헌터 앞에서 진심으로 자해 공갈 협박을 하다니 정말 범상한 성격은 아니었다.
공태성의 목소리도 떨렸다.
“끝녀가 다친 건가!”
“그 말부터 나올 줄 알았지.”
장범이 이어 다른 영상을 재생했다. 아까보다 꽤 긴 시간이 지났는지, 민끝녀가 입은 옷은 똑같은데 창밖이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민끝녀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한마디만 했다.
- 공태성! 너! 꼭 돌아와야 해!
짧은 영상은 그렇게 끝났다.
공태성은 영상이 끝난 뒤에도 고개를 푹 숙인 채 계속 휴대폰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걸기에도 어려운 분위기라 잠자코 있던 인유신은 장범의 눈짓을 받고 살그머니 일어났다.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옆방으로 들어온 인유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
“부회장님은 괜찮으세요”
“괜찮은 척하고 있으시지. 정말 파파가 못 돌아가도 그분은 버텨 내실 거야. 그보다, 유신아.”
말문을 돌리며 분위기를 환기한 장범이 아공간에서 작은 물체를 하나 꺼냈다. 받아 보니 작은 이어커프 한 쌍이었다.
“이게 뭐예요”
“규하 고모가 너한테 주라고 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