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214)
  • 〈인간들은 멸망에 대해 많이 상상하잖니 전염되는 인자를 지닌 시체들이 사람을 뜯어 먹는다든가, 신의 분노라든가, 운석이 부딪힌다든가, 인간이 제어하지 못할 무기를 사용한다든가.〉

    스토얀은 나긋한 음성으로 뒤를 이었다.

    〈그런 것들은 멸망이 빠른 만큼 절망도 빠르지. 하지만 얘야, 이 세계에 닥친 멸망은 훨씬 잔혹하단다. 서서히 말라비틀어지고 있는데 아직은 살 만하다고 느껴. 마도공학이 발달해서 식량도 그럭저럭 충당되고 있으니 더 그렇지. 절망과 체념에 익숙해지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 같다고 생각하게 돼.〉

    〈…….〉

    〈그렇게 익숙해지는 게 제일 무서운 거야. 사실상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데, 마치 자신이 미래를 보고 있는 거 같거든. 그 익숙한 절망이 가장 극대화된 곳이 바로 이 조선이란 나라고.〉

    그러며 스토얀은 입가를 끌어 올렸다.

    〈우습지 않니 고작해야 아이를 조금 더 낳고, 조금 더 오래 산다고 이 땅으로 꾸역꾸역 몰려오는 인간들이. 차라리 멸망을 직시하여 희망을 버리는 게 나을 터인데.〉

    〈…….〉

    〈이 세계의 이름은 이아드, 바로 지옥이니까.〉

    현규하는 조선의 네트워크 통신망이 국내로 한정되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멸망하는 세계의 현실을 인유신이 알아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와, 진짜요 날것의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느낌일 거 같아요.”

    “진짜 날것이죠. 프라이버시가 하나도 보장이 안 되니까.”

    “……안 보는 게 낫겠네요.”

    현규하는 인유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의 체향에 담뿍 취하며, 저 먼 땅의 어딘가에서 마수들에게 산 채로 해체당하던 이의 미쳐 버린 얼굴을 지웠다.

    신분제가 부활한 어느 땅에서 마수를 사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의 처우가 어떠한지도, 자포자기하여 절망한 인간의 그악한 민낯이 어떠한지도, 기반을 구성하는 윤리가 붕괴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마수와 게이트로 인해 시시각각 좁아지는 인간의 영역과 그로 인한 아비규환도, 전부, 지웠다.

    〈많이 낡은 지금의 나로서는 무리지만 네가 왕이 된다면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 안전한 지역을 생성할 수 있을 거야. 그것만 해도 인간들의 삶은 지금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아지겠지. ‘방주’의 일종이라고 할까.〉

    〈…….〉

    〈나와 스토야가 왕이 되어 둠네제울의 대홍수로부터 인간을 지켜 냈듯이.〉

    낮은 숨을 토하며 스토얀의 목소리를 떨쳐 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 땅이 멸망하는 세계라는 건 알고 왔다. 그 어떤 지옥 같은 풍경도, 품에 안은 이 사람의 안전보다 우선되지 못한다.

    “온갖 프라이버시를 강제로 시청하느라 많이 피곤해요…….”

    축 처진 기색으로 웅얼거리자 인유신이 얼른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담쓰담해 주었다. 정말 핸들링을 하는 것처럼 살살 어루만지며 조물조물하는 손길에 현규하는 푸근하게 감싸이는 듯한 기분으로 젖어 들었다.

    “얼른 올라가서 쉬어요.”

    “근데요, 아까부터 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뭐가요”

    “옹골찬 근육의 떨림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저 앞에 있는 간판도 주인님을 위한 장소라고 말하고 있네요.”

    “아! 세탁기 돌리고 나온 걸 깜빡했네! 빨리 올라가야겠다!”

    인유신은 다급히 튀려고 했으나 현규하가 더 빨랐다. 그는 인유신이 벤치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번쩍 들어 올려 허리와 다리를 안았다.

    그리고 헬스장 입구로 직행하기 시작했다.

    “빨래요! 빨래!”

    “주인님은 구겨지고 덜 말라서 축축하게 냄새나는 옷을 입어도 멋져요.”

    “저 오늘 법당까지 갔다 오느라 진짜 피곤하거든요!”

    “유산소 운동은 피로를 푸는 데도 좋습니다. 근육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에요.”

    “언제는 뱃살 만들고 싶다면서요!”

    “뱃살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에요.”

    현규하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인유신을 다정하게 끌어안고는 두 사람만의 데이트 장소로 즐겁게 걸어갔다.

    인유신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땀 흘리고 난 뒤에 먹는 식사는 꿀맛이라는 것을.

    ‘분하다……! 오늘도 운동을 하고야 말았어……!’

    이 분노를 고기로 해소하기로 한 그는 현규하가 구워 주는 고기를 열심히 먹었다. 고기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이럴 때는 치맥이 제격이겠지만, 식량이 풍족하지 않은 이아드에는 기름을 많이 소모하는 튀김 요리가 거의 없었다. 대신 익숙한 마수 고기는 많았다.

    “한우를 구할 수 없어서 아쉽네요. 키워 봤자 새끼도 제대로 못 치니까 사육은 거의 안 하는 거 같더라고요.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조선은 야생 동물 사냥도 금지했대요.”

    “레드훅도 맛있어요.”

    여기에서는 레드훅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부르겠지만, 사람 입맛은 비슷비슷한지 역시 마수 중에서도 레드훅 고기를 주로 먹는 듯했다. 푸드 프린팅이나 배양육 기술도 많이 발전해서 인공 고기도 맛에 큰 차이는 없었다. 8세도 옆에서 같이 고기를 찹찹 먹고 있었다.

    “근데 유신 씨. 쌍화차 마셔 봤어요”

    “쌍화차요 스님들이 드실 때 가끔요.”

    “거기 노른자, 비리지 않아요”

    “쌍화차에 넣으면 별로 안 비리던데……. 비린 거 못 먹으면 노른자만 찻물에 살살 익혀서 먹으면 돼요.”

    “……!”

    어째서인지 문화적 충격을 받은 듯한 그에게 손희애의 법당에서 있었던 얘기를 했다. 삼승이 잠들어서 부탁을 받은 구삼승이 대신 공수를 내린 것. 이어 그녀가 알려 준 것. ……각성할 수 있게끔 해 준 신이 삼승이라는 사실도 전해야 하나, 전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현규하가 대화를 이었다.

    “말세가 도래하면 길이 열린다고요 음, 무슨 뜻이지…….”

    “계속 생각을 해 봤는데요, 말세가 어차피 종말이란 뜻이잖아요. 세상이 멸망하면 가능할 거란 의미가 아닐까요”

    “그러게요. 지금으로서는 유신 씨의 추측이 합리적인 거 같네요.”

    곰곰이 생각에 잠기면서도 현규하는 집게와 가위로 고기를 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입속의 고기를 꼴깍 삼킨 인유신이 심각한 느낌을 주지 않도록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규하 씨.”

    “응”

    “종말이란 게 바로 닥치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한테는 아주 오랜 시간일 테고. 저는 그때까지 이대로 계속 규하 씨와 여기서 살아도 돼요. 저 혼자 여기에 남았다면 많이 무서웠을 텐데 그런 게 아니니까…….”

    “…….”

    현규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 인유신이 그 공백을 느끼기도 전에 부드러운 미소를 덧그리며 잠자코 고개를 숙였기에, 인유신도 따라 웃었다.

    [던전 리셋까지 남은 시간  14시간 57분 22초]

    바깥은 슬슬 가을에 접어들고 있는데, 게이트 안에는 훨씬 더 깊은 가을이 찾아왔다. 인유신은 선선한 가을 공기를 느끼며 열심히 포도를 수확했다.

    던전의 배경은 어느 귀족의 라티푼디움(고대 로마의 대농장)이었다. 반란에 휩쓸리긴 했으나 밭은 멀쩡했다. 마수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인부들은 열심히 포도와 올리브를 수확했다.

    본래 던전 안의 식물에도 마나가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었다. 섭취로 인해 체내에 축적되는 마나는 신성력에 중독되는 것과 흡사하게 신체의 균형을 망가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하며, 마도공학으로 인해 마나의 사용법이 월등히 발달한 이아드에서는 마나를 추출하는 마법을 개발했다. 인유신이 수확하고 있는 이 포도도 마나를 추출하여 사람이 먹어도 문제가 없게끔 가공될 것이다. 마나를 추출한 열매나 곡식의 원형까지 보존되는 건 아니었으나, 이만하면 쓸 만한 식량 자원이었다.

    “8세야, 맛있어”

    “먕.”

    인간들의 사정이야 어떻든 8세는 상관없이 그의 어깨에서 포도알을 갉아 먹고 있었지만.

    개량된 현재의 포도보다는 당도가 낮고 알이 작지만, 탱글탱글한 포도알은 꽤 맛있어 보였다. 목이 말랐지만 먹어서는 안 되니 참았다. 대신 포도를 소쿠리에 넣은 뒤 물병을 열었다.

    문득 머리 위에 그늘이 드리우나 싶더니 현규하가 포도가 가득 담긴 소쿠리를 들고 허공에서 내려왔다.

    “피곤하지 않아요”

    “날이 별로 안 더워서 할 만해요.”

    “운동을 한 덕분입니다. 오늘도 합시다.”

    “…….”

    뭔가 반박하고 싶지만 할 말이 없었다. 현규하에게 반강제로 끌려다니면서 운동을 한 덕분에 체력이 붙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인유신이 괜히 끙끙거리는 얼굴이 되자 싱긋 웃은 현규하가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두 사람은 현재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현규하의 알바야 늘 하던 것처럼 마수 사냥이지만, 인유신도 새롭게 일을 시작했다. 꽤 오래 이아드에 머물러 있게 될 거 같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알바하느라 현규하와 떨어져 있을 수도 없으니 생각난 게 던전에서 자원 채취를 하는 인부였다. 여기에서는 헌터 라이선스가 없어도 헵타곤에 고용되기만 하면 얼마든지 던전을 드나들 수 있었다. 인구 부족으로 인한 인력난이다.

    현규하는 마수 사냥을 하고, 사냥이 끝나면 인유신이 자원 채취를 하고. 자원 채취하는 인유신을 도우며 겸사겸사 데이트도 하고. 일석이조였다.

    ‘단순노동보다는 마수를 해체하는 일이 돈을 더 벌긴 하지만…….’

    마수를 해체하는 발골도 기술이 있어야 하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게 아쉬웠다. 하지만 현규하와 같이 화창하고 맑은 남유럽 날씨를 만끽하고 있으니 여행을 온 것 같아서 즐겁다.

    “정리하시고 던전 밖으로 나가 주세요!”

    마수들의 리젠 타이밍이 되기 전에 헌터들이 던전 안을 돌아다니며 나갈 시각임을 환기시켰다. 인유신도 포도를 잔뜩 딴 컨테이너 박스를 사이코키네시스로 든 현규하와 나란히 던전을 나왔다.

    수당은 현장에서 바로 입금되었다.

    “오늘은 제가 저녁 쏠게요.”

    “나는 주인님의 입술이 제일 맛있는데요.”

    태연한 한마디에 인유신은 얼굴이 발개지면서도 대담하게 받아치려고 노력했다.

    “규, 규하 씨가 더 맛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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