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214)
  • 신들이 떠나며 사제와 무당처럼 신을 섬기는 이들도 차츰 힘을 잃어 가는 현재다. 신력이 많이 쇠하였음에도 변함없이 톱클래스인 손희애의 법당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최진혁이 중간에 없었다면 이처럼 빠르게 예약을 잡지는 못했으리라.

    “잘 지내셨어요”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얘기는 했다만 벌써 만나게 될 거란 생각은 못 했구만. 그래, 점사가 필요한 것이야”

    정말 신력이 있는 무당이니 점사나 사주팔자를 보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긴 했지만, 이번 방문의 이유는 달랐다.

    〈고래한테 알아보라고 하긴 했는데, 솔직히 그 녀석만 믿고 있는 건 불안하네요.〉

    〈그럼 신전 같은 데 찾아가서 신한테 직접 물어봐야 할까요 최고 사제 같은 분들이라면 신탁을 받을 수 있겠죠〉

    〈그것도 방법이긴 할 테지만 순순히 알려 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신들은 지금도 내가 제물로 바쳐지기를 눈이 벌게져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팔짱을 끼고 잠깐 생각에 잠겼던 현규하가 다시 말했다.

    〈이렇게 하죠. 내가 만나 봤던 신이라고 해 봤자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타베이라까지 포함해서 넷뿐이지만, 그중에서 그나마 사과라도 한 양반이 있었어요.〉

    그와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인유신은 공손히 말을 골랐다.

    “제가 살던 세계에서는 선생님 같은 진짜 무당이 없어서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큰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괜찮으니 편하게 말해 보거라.”

    “선생님이 모시는 신과 제가 직접 대화를 나누는 건 어려울까요”

    “흐음. 거야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고, 신령님이 내키셔야 가능한 일이지. 어느 분을 뵙고 싶은 게야”

    “삼승할망, 그러니까 삼신할머니요.”

    〈우리나라 만신전의 신이기도 하네요. 만신을 통해 삼승과 대화한다면 실마리를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에게 직접 물어서 의도를 노출한다는 선택을 하기 전에 고래가 뭔가 알아 오면 좋겠지만요.〉

    솜노로스가 실패했으니 이제 삼승에게 도박수를 던져 볼 때였다.

    인유신이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데 손희애가 곤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눌렀다.

    “불가능한 일이야.”

    “모시지 않는 거예요”

    “아니, 모시고 안 모시고를 떠나서, 삼신께는 말씀을 올릴 수가 없다. 그분은 19년 전부터 뵙지 못하고 있으니까.”

    혹시 삼승도 이 세계를 떠난 신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손희애의 말을 계속 들어 보니 그건 아니었다.

    “산모와 아기를 보호하는 힘까지 거두신 것도 아니고 이 세계에는 분명히 남아 있으시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19년 전부터는 통 뵐 수가 없어. 마치 깊이 잠드신 것처럼.”

    “……19년 전이요”

    “그래.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듣자 하니 우르시토아레의 세 번째 분도 같은 시기부터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19년 전에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

    19년 전이라면 현규하와 자신이 침식 게이트에서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와 삼승을 만났을 때다.

    【나는 인간의 세계에 현현한 게 아니라, 너의 오랜 기억에 있는 그림자가 투영되었을 뿐인 존재란다.】

    손희애의 설명에 떠올랐지만, 두 번째로 만났던 우르시토아레는 그런 말을 했었다. 19년 전처럼 직접 닿은 게 아니었나 보다.

    아무튼 이 땅의 가장 큰 무당이라는 손희애가 공수를 받지 못한다면 다른 무당들도 마찬가지일 터다.

    ‘어쩔 수 없네. 일단 돌아가서 규하 씨랑 다시 얘기를 해 봐야겠다.’

    인유신이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하려던 때였다.

    【기다리거라.】

    낯선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손희애, 아니 손희애가 아니다. 손희애의 육체를 빌렸으되 심유한 눈빛과 거칠고 위압적인 젊은 여성의 음성은 손희애가 아니었다.

    인유신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신중하게 물었다.

    “삼신할머니이신가요……”

    【하.】

    손희애의 육신에 깃든 무엇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나는 구삼승이다.】

    구삼승할망, 또는 저승할망. 삼승할망과는 달리 죽은 아이의 영혼을 보살피는 신은 냉정한 눈빛으로 인유신을 훑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사방에서 옥죄는 듯한 오싹오싹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네가 바로 19년 전에 삼승이 철의 시대에서 만났다던 그 꼬마로구나. 삼승은 그 때문에 잠들었다.】

    “잠이 드셨다니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억지로 그림자를 투영했으니 당연히 그 여파를 받아 내야 했지. 너는 이미 미쳐서 실추한 신을 보았으니 신의 말로가 어떠한지 알고 있으리라.】

    예전에 현규하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침식 게이트를 통해 신이 없는 세계로도 특정인에게 뜻을 전할 수는 있으나, 신 또한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고.

    ‘손상을 회복하지 못하면 아타베이라처럼 격을 잃게 된다는 의미인가 봐.’

    인유신은 19년 전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현규하의 말에 따르면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뿐만 아니라 삼승까지 우호적이었다. 한데 구삼승까지 우호적일까.

    옥황상제 앞에서도 할 말 다 하는 다혈질에, 난폭하고 우악스러운 그녀의 전승을 떠올리니 인유신은 몹시 회의적인 기분이 들었다. 구삼승에게 돌아가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질문을 해도 과연 괜찮을지.

    인유신이 고민에 대한 답을 내놓기 전에 구삼승이 먼저 입을 다시 열었다.

    【왕의 아들과 이곳까지 함께 온 것을 보니 삼승이 부여한 가호가 제때 발휘되긴 했나 보군.】

    “저어,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이신가요”

    【너는 섭리에 의한 능력을 갖지 않았나】

    “아……. 쥐 같은 동물들을 길들이는 능력이 있긴 한데요.”

    【그렇게 발현되었나 그 능력이 왕의 아들과 어떤 인연이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흥미롭군.】

    “……”

    인유신이 영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자 구삼승이 쌀쌀맞은 음성으로 뒤를 이었다.

    【본래라면 각성자가 되지 못할 터인 네가 각성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삼승이라는 뜻이다. 본디 인간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니 너희에게 한 가닥의 연을 남겨 주기 위해서.】

    “네! 나락이 락이라는 말을 삼신할머니가 하셨다고요”

    【무슨 헛소리지】

    구삼승이 조금 짜증을 내는 것 같았기에 인유신은 얼떨떨해하면서도 현규하와 어떻게 만났는지 설명했다.

    “그리고 락이라는 건, 어, 그러니까 음악의 한 종류인데요.”

    【되었다. 어쨌든 섭리가 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군.】

    “시스템, 아니 섭리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우기는 일이 자주 있나요……”

    【나도 처음 듣는다. 하지만 만상은 무한하니 장담하지는 못할 터.】

    갑작스러운 진실을 알게 되어서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리던 인유신은 한 번 생각을 되짚은 뒤에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삼승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현규하를 테이밍하는 일은 없었을 거란 게 아닌가.

    늑골 안쪽으로부터 언젠가 느꼈던 울림이 울렸다. 하지만 그때처럼 마냥 불온한 감각이 아닌……. 인유신은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폈다. 지금은 이 생각을 붙잡고 깊이 파고들 때가 아니었다.

    예상보다 대화에 호응을 해 주는 구삼승에게 조심히 입술을 움직였다.

    “삼신할머니께서 저와 규하 씨 얘기를 전하고 잠드신 건가요”

    【쯧.】

    못마땅하다는 투로 구삼승이 혀를 찼다.

    【삼승은 어리석어 보일 만치 선량하지만 그것이 아둔하거나 호락호락한 성품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런 삼승이 너희에 대한 죄책감으로 부탁을 했으니, 나는 이해할 수 없으나 그 죄책감은 타당한 것.】

    “…….”

    【말하라. 무엇을 청하든 한 가지 들어주마.】

    “그렇다면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해 보아라.】

    “파계나 세계의 틈을 통해 이동할 때처럼 무작위가 아니라 특정한 세계로 가는 방법이 있을까요”

    【있다.】

    구삼승은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인유신의 가슴에 기쁨이 차오르기도 전에, 서늘한 음성이 이를 짓눌렀다.

    【말세가 도래하면 길이 열릴 것이다.】

    인유신이 터덜터덜 사택으로 귀가했을 때도 현규하는 여전히 인왕산이었다. 얘기를 다 하고 나오는 길이란 문자를 보내긴 했는데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

    현규하도 없는 집에 혼자 멀뚱거리기는 싫어서 사택 내의 산책로 벤치에 멀거니 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말세. 그리고 그와의 테이밍.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눈을 잠시 내리감았다. 두근, 두근, 두근. 일정하게 맥동하는 심장 소리에 겹쳐서 들리는 건 언젠가의 그 울림. 가만히 제 안의 울림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변하기로 했으며 변한 것처럼, 가슴으로 직접 느끼는 이 울림이 품은 감정 또한 변하고 있는 것일까.

    ‘……규하 씨가 보고 싶다.’

    다시 문자라도 보내 볼까 싶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문득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발길 닿는 대로 걷느라 어디인지 잘 몰랐는데 지하 헬스장의 입구 근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아드에서도 헬스는 했다. 기구는 철의 시대와 좀 달라도.

    ‘앗. 헬스장이 있다는 걸 규하 씨가 알면 안 되는데.’

    현규하가 부재중일 때 근처를 둘러보다가 헬스장을 발견한 뒤 그에게는 입을 꾹 닫고 있는 중이다. 그가 귀가하기 전에 헬스장에서 멀리 떨어져야 할 거 같아서 일어서는데 문이 열리고 사람이 올라왔다.

    “부길, 아니 부장님! 안녕하세요.”

    “아, 유신 씨네.”

    허정현이 산뜻하게 인사했다.

    “헬스하다가 오셨어요”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이라서. 옆의 껌딱지는”

    “……그, 밖에 다른 용건이 있어서요.”

    헵타곤 사람들과 안면 튼 지 얼마나 되었다고, 현규하는 이미 이능부 사람들의 인식과 비슷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아무튼 잘 됐다. 시간 되면 잠깐 얘기라도 할까”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했는데 그녀와 얘기라도 나누면 좀 나을 거 같았다. 허정현이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 와서 건넸다.

    “부장님은 안 드세요”

    “근 손실 나.”

    음, 중요하지. 근 손실……. 묵직이 호응하는 한편으로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이혜연에게 듣기로 원래 세계에서의 허정현, 그러니까 허정현1도 자신과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허정현1이 바쁘다 보니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새로운 만남이 이어졌다.

    “하실 말씀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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