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방비하지 않은 재난들이 세계라는 이름을 가진 신들의 모형 정원을 망가트릴 수준은 아니었거든. 애초에 우리 남매가 세계의 주춧돌이 된 이유가 대홍수로부터 ‘의로운’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거였으니까. 그 뒤에는 기왕 새로운 주춧돌이 생겼으니 길게 써먹으려고 겸사겸사 불로불사로 만든 거지.”
“…….”
“이제 그 모형 정원이 근본부터 부스러질 때가 되니 어떻게든 기워 붙이려 하고 있지만, 글쎄다……. 그건 아끼는 모형 정원이 망가지는 게 당장 안타까울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신들에게는 우리의 세계 말고도 무한한 모형 정원들이 있으니까.”
말을 잇는 스토얀의 표정은 평연했으나, 호박색의 눈동자에는 냉담한 조소가 어렸다. 아마도 이것이 처음으로 접하는 그의 진심이고, 진면목이리라.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망가진 모형 정원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고.”
언제 조소를 품었냐는 듯, 그와 같은 색을 품은 눈매는 온화하게 가늘어졌다. 평소처럼 진의를 숨긴.
“또 궁금한 건”
현규하도 스토얀의 발언에 가타부타 솔직한 감상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그를 방문한 진짜 목적을 무심히 꺼낼 따름이었다.
“CCTV처럼 보는 거, 어떤 느낌이에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없었으니까 솔직히 상상이 잘 안 돼요.”
“보여 줄까”
스토얀이 손짓하여 아들을 불렀다. 작은 다탁을 돌아가 그의 뒤에 앉은 현규하의 얼굴에 희미한 놀라움이 서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어깨 너머로 보이는 스토얀의 앞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는데, 어느새 상태창과 비슷한 창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한 거예요”
“가시화하여 너에게도 잠깐 공유한 거지. 어렵지 않아. 너도 쓸 수 있을 능력이야.”
화면에 비치는 건, 바로 스토얀과 나란히 앉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신기해서 손을 가져가 봤지만 창을 그대로 통과했다. 정말 상태창을 보는 것 같다.
“한 번에 여러 명도 볼 수 있어요”
“그런 게 가능한 건 신이겠지. 대신 그곳이 땅 위라면, 세계의 어디라도 볼 수 있단다.”
“바닷속도요”
“바다도 땅 위에 채워진 물이잖니. 심해는 부감해도 깜깜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스토얀이 전능하지는 않지만 전지하다는 최진혁의 설명은 약간 잘못되었다. 그의 전지 또한 완벽하지는 않았다.
현규하는 감탄하는 척하며 재킷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른 나라도 좀 보여 줘요. 솔직히 이 동네는 내가 살던 곳이랑 크게 차이가 없어서 멸망이라는 게 실감이 잘 안 나거든요.”
“그럴까 어디부터 보고 싶어”
“음, 아버지 고향요. 이아드에 처음 왔을 때 아버지가 거기에 있는 줄 알고 루마니아나 세르비아로 가려고 했어요.”
“내 수발을 들던 아이를 보내지 않았다면 허탕을 칠 뻔했구나.”
눈썹을 깜빡하는 순간 변하는 창을 보면서 현규하는 주머니에 넣은 손가락을 톡톡 움직였다.
“아, 문자 왔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인유신은 얼른 휴대폰을 확인했다. 현규하의 연락이었다.
[ㄱㆍ브]
의미 없는 문자다. 하지만 인유신은 반색했다. 그가 문자를 보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추측이 맞다는 뜻이었다.
〈에이, 그게 가능하면 내가 신이지, 겨우 왕이겠어〉
제 한계를 인정했던 스토야의 말처럼, 세계를 부감하는 스토얀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 한계가 정확히 어떠한지는 현규하에게 들어 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현재 인유신의 운신은 자유로웠다.
타이밍 좋게 도착한 버스에 인유신은 얼른 올라탔다. 버스의 내부라든가 결제하는 방식은 조금 달랐으나 최진혁에게 배워서 미리 예습해 둔 보람이 있었다. 버벅거리지 않고 결제하는 데 성공한 인유신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후긴의 눈’.”
입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니 눈앞에 좌표가 떴다.
[‘무닌의 눈’과 ‘후긴의 눈’이 상호 작용되어 있습니다. 세트 효과가 나타납니다.]
언제 봐도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사용할 때 마나의 소모가 좀 덜한 것 외에는 무슨 효과가 적용된 건지 모르겠다.
현규하의 위치는 여전히 인왕산이었다. 그가 인왕산을 벗어나기 전까지 스토얀의 시선에서 자신은 자유롭다고 여겨도 될 것이다.
스토킹, 아니 위치를 추적하는……. 아니아니,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있는…….
“…….”
다른 말로 꾸며 봐도 스토킹이 맞는 거 같다. 얼떨결에 스토킹을 하게 된 제 처지를 떠올리면서 인유신은 얼굴을 붉혔다.
발단은 현소라의 주검을 수습하고 돌아왔던 며칠 전이었다. 귀가한 현규하는 수줍게 아티팩트 하나를 내밀었다.
〈‘무닌의 눈’이잖아요. 이건 왜요〉
〈아뇨, 이건 ‘후긴의 눈’이에요. 어머니가 갖고 있었더라고요.〉
〈와, 진짜요〉
신기해서 받아 봤는데 ‘무닌의 눈’과 똑같이 생겼다. 감정을 해 보니 확실히 ‘후긴의 눈’이라는 이름이 나왔지만.
〈세트 아티팩트를 어머니가 갖고 있었다니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느껴지는군요. 커플 아티팩트로 업그레이드할 때이니 사랑을 준비하십시오.〉
〈어, 이걸 제가 규하 씨한테요 규하 씨는 안 그래도 감정까지 저한테 다 보이는데…….〉
당연히 인유신은 망설여졌다. 자신은 분리 불안이라는 불가피한 이유 때문에 현규하가 추적하도록 했지만, 보통 위치 추적을 당한다면 언짢아할 테니까. 커플들이 주로 쓰는 위치 확인 어플도 속이거나 회피하는 꼼수가 있는데, 이 세트 아이템은 그럴 수도 없었다.
이어지는 현규하의 말에서, 인유신은 그가 왜 수줍어하면서 아이템을 내밀었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이유였다.
〈사실 주인님에게 내 감정이 낱낱이 드러나는 게 은근히…… 도착적인 쾌감이 있거든요. 마치 주인님에게만 알몸이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유신 씨에게만 발가벗겨져서 노출 중인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진짜, 하아…….〉
〈…….〉
〈이제 위치 추적까지 당하면 이 쾌감은 완벽해지겠죠, 후후후.〉
〈…….〉
〈주인님이 ‘무닌의 눈’으로 느끼던 쾌감을 나도 공유할 수 있게 되다니 정말 좋아요…….〉
맹세코, 현규하에게 위치 추적을 당하면서 그딴 걸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 이거 안 쓸 거니까 가져가세요.〉
〈네에 내 알몸 보기 싫어요 나 안 벗겨 줄 거예요〉
〈됐어요! 이미 벗겨진 기분이라면서요!〉
〈새로운 플레이네요……. 이게 바로 방치 플레이구나……. 나는 다 좋습니다. 주인님이 하고 싶은 거 뭐든 해도 돼요.〉
〈으아아아악.〉
인유신은 필사적으로 거절했지만 ‘안 그래도 낯선 세상인데 만약을 대비해 서로 위치라도 알아야 한다’라는 논리적인 이유를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현규하가 보는 앞에서는 ‘후긴의 눈’을 절대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재차 다지고 있을 때,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공태성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길드장님”
- 방금 솜노로스에게 연락을 받았다.
“한낮인데 안 자고 있었대요”
-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요즘 낮에 뭔가 하고 있는 모양이더군.
솜노로스는 여전히 공태성과 계약을 유지 중이었다. 계속 그를 통하는 게 번거롭기도 해서 현규하나 자신에게 계약을 옮길 생각도 해 봤는데, 스토얀이 상태창을 볼 수 있다는 게 걸렸다. 상태창에는 솜노로스와 계약하고 있다는 것도 나오니까.
다행히 공태성은 전혀 번거로워하지 않고 쾌히 조력했다.
신실계(神實界), 즉 신들이 현존하는 신계에서 솜노로스는 아직까지 이아드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만신전의 신들을 떠보았다. 인간이 특정한 세계로 갈 방법이 있는 것인지.
신들의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네놈이 알 필요가 있겠느냐.】
【글쎄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관심 없어.】
【‘인간’에게 가능한 방법이 있긴 하다만 너는 신어가 아니더냐. 너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니라.】
그나마 마지막이 유념할 만한 대답이었다.
- 도움이 되지 못해서 유감이다.
“그래도 방법이 있긴 있다는 거잖아요.”
- 더 캐물었다가는 의심할까 봐 솜노로스도 물러났다고 하는군. 아무래도 신들은 현규하가 스토얀처럼 왕이 되어 이 세계가 존속되길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인유신은 대답 대신 입술만 깨물었다. 왕이니 뭐니 하는 말로 포장해 봤자 결국은 산 제물이다.
주춧돌이 되기 위해 지하에 묻히고 지상에서 짊어지게 되었던 쌍둥이의 흐느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광경을 목격한 건 꿈이었지만, 필시 현실이었을 고통이.
지금은 일단,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거에 만족하기로 했다.
“도착했으니까 이따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버스에서 내린 인유신은 지도를 확인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멀리 보이는 산의 윤곽은 눈에 익지만 거리의 풍경은 현저히 다른 서울, 아니 한양의 길을 10분쯤 걸었을까. 마침내 목적했던 기와집이 보였다.
손희애의 법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