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경보음이 울리고, 사람들은 빠르게 대피했다.
세 사람이 돌발 게이트가 관측된 후원의 누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변이 텅 비어 있었다.
“규하 씨, 몇 분 남았어요”
“음, 대충 8분쯤”
현규하는 스토얀을 돌아보았다.
“혹시 여기도 죽은 땅으로 만들려는 건 아니죠 백두산을 그렇게 만든 게 아버지 능력이라면서요”
“과한 힘을 불필요하게 쓸 필요는 없지. 근데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거니”
“게이트가 열리려면 시간이 좀 남았어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듯 스토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기다려”
“기다려야 게이트가 열리니까요.”
“어차피 갑형이면 내부에 던전이 형성되는 것도 아니고, 마수만 토해 내고 사라지는 게이트잖아. 지루하게 기다릴 필요 없이 찢어서 꺼내면 되는데”
“……네”
예상하지도 못했던 방식에 현규하와 인유신이 순간 멍해졌을 때, 스토얀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게이트가 열리기 직전의 허공을 그대로 찢었다.
그 너머에서 형성되고 있던 마수의 기성이 삽시간에 주변을 난도질했다. 현규하의 낯에 경악이 어른거렸다. 당혹한 와중에도 인유신을 안고 몰려오는 마수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몸을 피하려 했으나, 곧 그 행위조차 불필요하다는 게 증명되었다.
스토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어 몰려오는 마수들을 향해 손바닥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그가 취한 행동은 겨우 그뿐이었으나, 결과는 하찮지 않았다.
“큭……!”
섬광이 한차례 빛나고, 눈을 찌를 듯한 빛살이 비산했다. 두 사람이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모든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
단말마의 비명조차 없이 사방에 널브러진 마수들 사이로 스토얀은 여상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손바닥을 가볍게 털고는 현규하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보자, 아들.”
스토얀은 불시에 나타났을 때처럼, 징조도 없이 사라졌다.
후원에 남은 건 동시에 절명한 마수들의 사체와 이를 아연하게 바라보는 두 사람뿐이었다.
먼저 냉정을 회복한 건 현규하였다. 그는 주저 없이 성큼 다가가 사체들을 살펴보았다. 인유신도 뒤늦게 허둥지둥 쫓아왔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정확한 건 부검이라도 해 봐야겠지만 아마 정신을 파괴한 것 같습니다. 정신 계통의 능력이나 마법이겠죠”
사체들을 분석하면서 현규하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말도 안 되는 이적을 행한 게 아니다. 분명히 어떠한 능력의 발현이었다.
“히든 보스는 예외지만, 이성이 없는 마수들은 원래 정신 공격에 취약합니다. 그 덕분에 정신계 헌터들 가운데서도 S급이 나오는 거고요.”
“아하…….”
“아버지가 방금 쓴 건 S급을 몇 배로 뻥튀기한 능력 같지만요.”
차분한 설명을 듣다 보니 인유신도 차츰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현규하는 짐짓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가 무슨 힘을 갖고 있든 안 걸리면 장땡이죠. 그쵸”
현규하의 말이 맞다. 인유신은 가슴을 쓸면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세상 어디든 관찰하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사람에게 안 걸린다는 전제가 몹시 어려운 일이긴 할 테지만 말이다.
‘잠깐만……. 세상 어디든 볼 수 있다고’
문득 그의 능력에 한 가지 의문이 생긴 인유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규하 씨. 이건 어때요”
그리고 10분 뒤.
남친이자 주인님의 천재성에 현규하는 뻐렁치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방에 널린 마수의 사체 앞에서 키스를 하려다가 저지당했다.
스토얀의 앞에 놓인 빈 찻잔을 보면서 현규하는 저기에 피라도 뽑아서 줘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찻잔에 스토얀이 쪼르륵 따르는 쌍화차를 보며 고민했다.
고민한 지 1초도 안 되어서 그냥 물어 버렸다.
“아버지한테 쌍화차 따위의 노인네 입맛을 가르쳐 준 사람이 도대체 누구예요”
“소라가. 어린 시절 감기에 걸렸을 때 어머니가 쌍화차를 타 준 이후로 입맛에 맞아서 계속 마셨다고 했어.”
“고풍스럽고 전통적인 입맛이란 뜻이었어요.”
“나는 인간의 음식을 먹지 않으니 어떤 맛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면서 스토얀은 쌍화차에 달걀노른자까지 톡 까서 넣었다. 노른자까지 띄운 쌍화차는 대체 어떻게 마시는 거지 평소라면 마당에 뿌려서 버렸겠지만, 오늘은 거의 바닥인 자신의 사교성을 마른오징어에서 물을 얻듯이 쥐어짤 필요가 있었다.
현규하는 달걀노른자부터 호로록 마셔 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썼다. 존나 비렸다. 하지만 어머니 입맛이었다니 꾹 참고 마셨다.
쌍화차의 진한 계피 향으로 비린내를 지우면서 그는 살갑고 애교 많은 아들을 흉내 내 보았다.
“아버지는 영업직을 했으면 실적도 못 채우고 한 달 만에 잘렸을 거 같네요.”
“무슨 뜻이니”
“나한테 무작정 산 제물이 되라는 말을 할 게 아니라, 장점을 영업해야죠. 명색이 세계의 왕이 되는 건데 쓸 만한 건 없어요”
“뭐가 있을까.”
스토얀은 고민되는지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영생불로”
“별로 관심 없는데요. 아, 근데 산 제물이 된 건 어렸을 때 아니었어요 다 늙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고모는 딱 10살처럼 보이던데.”
“스토야와는 달리 나는 육신을 갖고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어린애의 몸으로는 여러모로 곤란하지. 너도 원하는 나이부터 늙지 않게 될 거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어려지는 건 불가능하지만.”
별로 관심도 없는 얘기를 주의 깊게 듣는 척하며 다른 것도 물었다.
“백두산을 그렇게 만든 것도 왕으로서의 능력인가요”
“그렇지.”
“침식 게이트에 가깝던데요.”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지. 뭐라고 해야 할까…….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면, 역으로 부수는 것도 가능하다고 이해하면 되겠구나.”
현규하는 비린 맛을 지우기 위해 쌍화차를 조금 더 마셨다.
“그전의 재해는 그냥 놔뒀다면서요.”
“재해를 예견할 수 있으니 최대한 피해가 적을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지. 하지만 제법 귀찮은 일이야. 둠네제울의 대홍수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너는 모를걸.”
빈 찻잔에 쌍화차를 다시 따라 주며 스토얀은 무심히 읊조렸다.
“전 세계의 인구에 비하면 자연 재난으로 몇십만 명이 죽든, 몇백만 명이 죽든, 별 차이는 없지 않니”
현규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면서 터지려는 빈정거림을 막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빌어먹을 만큼 자신을 닮았다. 아니, 내가 그를 닮은 건가.
“산 제물로 바치기 전에 인적성 검사부터 해야겠는데요. 아버지나 나는 분명히 거기에서 탈락하겠군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
스토얀의 입술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기껏 창조해서 빚어 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거인 우리아쉬들을 대홍수로 몰살하고,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난쟁이 피티치들을 햇빛도 들지 않는 지하에 강제로 옮긴 게 바로 신이야. 그분들이 과연 백만 명이 죽든 천만 명이 죽든, 죽어 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의미를 부여할까 나는 대홍수와 백두산을 제외한 모든 대재해를 방기했지만, 그 때문에 질책받은 적은 한 번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