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214)

살그머니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손바닥으로 감기며 입술을 포갰다. 인유신이 하려던 말은 겹친 입술 사이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입술을 맞댄 채, 현규하는 속삭였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는데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겠어요.”

만약 어머니가 제정신일 수 없는 ‘무언가’를 당했다면.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개입한 이가 있다면.

현규하는 거기에서 고의로 생각을 끊었다. 어머니의 진실도, 그로 인해 뒤틀린 제 어린 시절도,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두려움도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하지 않다.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인유신의 안전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사히 돌아갈 궁리만 하기로 해요.”

헛되이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뭐라고 말할 것처럼 달싹이는 인유신의 허리를 안으며 현규하는 깊이 혀를 섞었다.

  

그날 이후 현규하는 어머니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않은 사람처럼 태연해 보였으나, 오히려 그 모습이 인유신은 더 걱정이었다.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규하 씨의 어머니에 대한 일을 그냥 넘겨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못내 염려되었으나 현규하의 언행은 인유신 또한 그 일로 속앓이를 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인유신은 염려되는 마음을 삼키며 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현규하와 나누는 시간만을 온전히 누리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그게 평소와 같은 나날을 보내려 하는 그를 위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한양에 경복궁은 없지만 별궁은 있었다. 고려조에 건립된 이궁에 더하여 조선조에도 새롭게 증축했다는 행궁은 경복궁처럼 관광지로 개방되어 있었다. 알바도 없는 날이라 별궁 관람과 함께한 데이트는 즐거웠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복원했다는 개성의 만월대도 한번 가 보고 싶었다.

‘만월대도 경복궁처럼 한복을 대여할 수 있을까’

인유신은 문득 궁금해졌다. 한복이 현대적으로 변형된 스타일의 평상복을 입으니 그다지 성행하지는 않을 거 같기도 하고, 전통 복장이니 똑같이 성행할 거 같기도 하다.

솔직히 평상복으로 두루마기를 입고 싶었지만, 자기가 옷을 바꾸면 현규하도 커플룩을 입어야 한다며 방수가 되는 재킷을 벗을 거 같아서 참았다. 다행히 철의 시대의 복장이 많이 튀는 건 아니었다. 현대적으로 간소화된 옷의 디자인은 비슷비슷하기도 했고, 일부러 서양풍 디자인의 옷을 입는 사람도 있었다.

경복궁도 없고 종묘도 없고 남산타워도 없는 한양이지만 동일한 건 있었다. 튀르키예인이 파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사람 입맛은 별 차이가 안 나서 좋아요.”

인유신은 별궁 연못의 벤치에서 상인의 기나긴 장난 끝에 쟁취한 쫀득쫀득한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었다. 즐거워하는 인유신을 내려다보며 현규하는 얼굴을 갸웃했다. 그의 손에도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아까 그 장난이 재미있는 거였나’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던 현규하는 상인이 장난을 칠 때 사이코키네시스를 이용해 빼앗으려고 했었다. 인유신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걸 보고 그냥 두었지만.

인유신이 즐거워하는 장난이면 나도 나중에 따라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고 있으니 인유신이 아이스크림을 눈앞에 내밀었다.

“초콜릿 맛도 궁금해요”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하는 눈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물론 먹어도 된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현규하는 허리를 굽히고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인유신의 입술을 삼켰다. 무방비하게 열려 있던 입술 사이로 말캉한 살덩이가 미끄러졌다. 미끄덩 들어온 혀는 인유신의 입 안에 남은 아이스크림의 맛을 훔치고는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이스크림보다 더 맛있는 게 있었네요.”

“…….”

요즘에는 박력 있게 ‘규하 씨 입술이 더 맛있어요.’라고 하던 인유신은 귓불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밖에서 한 키스라 당황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난 얼굴이라 현규하는 짓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박력 넘치는 모습도 멋지지만 당황해서 굳은 모습도 맛있, 아니 좋다.

“아니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 한 번 더 가야겠습니다.”

놀라서 굳은 사이에 입술을 한 번 더 맛보겠다는 현규하의 야욕은 유감스럽게도 달성되지 못했다.

“얘야.”

현규하는 분명히 어떠한 마나의 흐름도,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하나 그의 인식보다도 빠르게, 나긋한 음성은 이미 도달해 있었다.

“……!”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의 예민한 기감을 속이고 이처럼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존재 따위는 없다. 그런데도 등 뒤로 느껴지는 선뜩함에, 현규하는 경악성을 씹으며 다급히 인유신을 막아서듯 돌아섰다.

그곳에는 스토얀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기색으로 서 있었다. 예민한 긴장감을 눈치챘는지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서렸다.

“왜 그리 놀라니 내가 오지 못할 곳에 온 것도 아니고.”

“……어떻게 온 건데요”

“내가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도 할 수도 있지. 힘을 제법 소모해서 자주 쓰는 건 아니지만.”

스토얀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뒤늦게 알아챈 인유신은 현규하의 뒤에서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직접 만나는 건 벌써 세 번째다. 처음에 느꼈던 격렬한 거부감은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으나, 마주 보고 얘기하는 건 역시나 껄끄럽다. 최진혁으로부터 자신을 조사하라고 했다는 얘기까지 들었으니 더욱이나.

‘용건이 있으면 규하 씨를 불렀었는데 오늘은 왜 직접 찾아온 거지’

긴장감으로 목구멍까지 깔깔하게 아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하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는데 스토얀과 시선이 마주쳤다.

“…….”

최진혁에게 따로 지시까지 했음에도, 정작 그를 보는 스토얀의 눈빛에는 어떠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물건을 감정하는 것처럼, 낯선 기물을 탐색하는 것처럼, 낱낱이 파헤치려는 기계적인 의도만이 숨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오싹했다. 저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다시 확인해 봐도 영문을 모르겠는걸.”

스토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 순간, 상태창이 저절로 떴다.

[히든 특성]

- ■■■■■ ■■■ ■■■■■■■ 태생

“……!”

이제는 임의로 확인할 수 있다는 걸 숨기지도 않으며 스토얀이 인유신의 상태창을 만지작거렸다. 스탯과 고유 능력을 지나, 히든 특성까지.

스토야가 보이지 않도록 지운 ‘크르스니크’ 항목으로 핏기 없는 손가락이 스르르 미끄러지려 했다.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인유신의 낯이 창백해졌다.

스토야가 지울 수 있던 부분이다. 그렇다면 스토얀이 복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

현규하는 인유신의 상태창을 보지 못하지만, 대신 그의 안색이 변하는 건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할 수 있었다.

‘크르스니크’에 스토얀의 손이 닿기 직전, 현규하가 반걸음 앞으로 나서며 막아섰다.

“뭐 하는 거예요”

“응 네 서번트 태블릿을 본 것도 아니잖아”

“입장 바꿔서 생각을 해 봐요. 누가 어머니 상태창, 아니 서번트 태블릿을 멋대로 띄워서 만지작거리면 아버지는 기분 안 나쁘겠어요”

“으음…….”

그 말에 스토얀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납득한 듯 턱을 주억거렸다.

“언짢아할 거 같긴 하구나. 하지만 그런 일이 있어도 소라가 내 아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걸.”

“…….”

그쪽으로 방향을 의도하긴 했지만, 정말 어머니에 대한 필터링 없는 언급을 들은 현규하의 표정은 미묘해졌다.

스토얀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는 어머니의 얘기를 들을 때면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반쯤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기억만이 남은 어머니가 그의 앞에서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서.

“뭐, 아무튼……. 왜 그런 건데요”

대답하기 전, 스토얀의 시선은 현규하의 재킷을 붙잡고 있는 인유신의 손가락에 닿았다. 여전히 알지 못할 괴이한 형체를 반죽하여 만든 저 반지.

[각성자 현규하가 제작한 아다만티움 반지]

언뜻 평범한 아이템 같지만 그 안에는 파계의 정수가 숨어 있다. 현소라가 현규하에게 건넸을, 바로 그 스킬.

최진혁이 보고한 인유신의 정보는 별거 없었다. 스토얀의 감상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해서 서번트 태블릿을 다시 확인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인유신은 크르스니크가 아니다.

게다가 정말 별거 아닌 평범한 청년이었다. 쓸모도 없고 유용하지도 않은 하찮은 능력 하나를 각성했을 뿐.

‘파계를 넘긴 이유는, 뭐……. 애인이라고 했으니 선물이라도 한 건가.’

크르스니크가 아니라는 게 명백하다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스토얀은 지금 당장 인유신의 손가락이라도 잘라 볼까, 잠깐 고민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불필요하게 현규하의 경계심을 돋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손가락을 자르는 것 따위야 언제든 가능하니.

“여기가 예전에 소라와 데이트하러 왔던 곳이거든.”

대답하는 잔잔한 음성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풍경을 보니 생각이 나서 문득 쫓아와 봤어.”

“30년 전에요”

“응. 왕의 별궁이었던가 소라와 왔을 때는 전통복을 대여하는 무슨 축제를 하고 있어서 같이 여러 가지 옷들을 빌려서 갈아입었는데…….”

천천히 말을 잇는 스토얀의 음성이 살짝 잠겼다는 건 현규하도, 인유신도, 심지어 스토얀 본인도 깨닫지 못했다.

“처음에는 소라가 용을 수놓은 황색 옷을 고르고 나는 짙은 녹색 옷을 입었는데, 알고 보니 거세한 사내들이 입는 옷이어서 소라가 엄청 웃었지. 그 뒤에 입은 게 이런 도포였는데, 잘 어울린다고 소라가 좋아해서…….”

스토얀의 말은 현규하와 인유신에게 전하는 게 아니라, 마치 자신에게 복기하는 듯한 혼잣말에 가까웠다.

여전히 입고 있는 도포의 옷자락을 내려다본 스토얀이 되물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때 소라가 무슨 표정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 넌 어떠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네가 배 속에 있을 때였는데 몰라”

“모르는데요.”

말도 안 되는 질문에 현규하의 얼굴에는 점점 더 어이없다는 감정이 새겨지고 있었으나, 스토얀은 고개를 갸웃할 따름이었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소라와 나누었던 대화들은 전부 떠올릴 수 있는데, 어째서 표정만 기억나지 않을까…….”

나직한 혼잣말에 인유신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측이 맞다면 스토얀과 현소라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듯했는데, 마냥 ‘정상적이지 않은’ 관계라 치부하기에는 스토얀의 말이 사뭇 아리송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한 의문을 좇을 시간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느닷없는 벨 소리가 현규하의 재킷 주머니에서 들려왔다.

걸려 온 전화를 받은 현규하는 성의 없이 건성으로 “네, 네.”라고 한 뒤에 끊었다.

“어머니와의 추억에는 아버지 혼자 잠기면 될 거 같고요, 나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무슨 일이니”

“아직 경보가 울리기 전이긴 한데 별궁에 돌발 게이트, 그러니까 여기 말로 갑형 게이트가 예측되어서 그거나 수습해 달라는데요. 유신 씨, 괜찮죠”

시틋하게 이어지다가 부드럽게 변한 뒷말은 물론 인유신을 향했다. 인유신도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쯤에서 적당히 헤어질 거라 예상했으나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내가 도와줄게.”

“……아버지가요 왜요”

“오랜만에 멀리 나왔으니까 겸사겸사. 여기는 소라가 좋아했던 장소거든.”

“됐……. 아니, 좋아요. 아버지가 해 주면 되겠네.”

필요 없다는 대답을 하려던 현규하는 생각을 바꾸었다. 스토얀과 직접 싸울 생각은 딱히 없지만, 그의 능력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해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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