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손희애도 떠나고, 인부들이 부지런히 던전을 정리했다. 인력 부족으로 헌터들도 손을 거들고 있었다.
인유신과 현규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진 야영지에 쌓인 상자들 위에 앉았다. 어떤 유령들인지 정확히 알기 전에는 놀랍기도 했고 무서웠지만 지금은 씁쓸한 안타까움만이 남았다.
오히려 아까 들은 손희애의 말 몇 마디가 더 놀라웠다.
‘스토야는 만신의 말을 전해 주고 싶었던 걸까’
은징가를 통해 현규하가 14년 전에 그를 구했다는 진실을 알려 준 것처럼, 손희애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네가 소라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라는 아마도…….〉
지하에서 잠깐 접했던 그녀의 말을 떠올리니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슬쩍 손바닥의 8세를 내려다보았지만 제 용무를 다 했다는 것처럼 간식으로 갖고 왔던 초콜릿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삭막한 하늘을 멀거니 올려다보고 있는 현규하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규하 씨는 무슨 생각 해요”
“주인님 생각요. 옆에 주인님이 있는데도 주인님이 그립네요.”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발언에 인유신의 뺨이 붉어졌다.
“그, 그거 말고는요”
“뭐어. 우리는 일심동체니까 유신 씨랑 비슷한 생각 하고 있지 않을까요”
자신을 돌아보는 현규하의 얼굴이 평소 같기도 했고, 손희애에게 들은 말도 있다. 아까 현소라의 시신을 수습할 때 떠올랐던 의문을 그와 나누어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인유신은 말을 고르면서 신중하게 입술을 뗐다.
“규하 씨한테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요.”
“으응”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진짜 진짜 규하 씨를 상처 주려고 하는 말은 절대 아니거든요.”
그렇게 시작한 질문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오해 없이 말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움직이던 입술은, 그대로 현규하의 숨결에 삼켜졌다.
말하느라 벌어진 입술 틈으로 매끄럽게 들어온 몰캉한 살덩이가 놀라서 멈칫한 혓바닥을 장난스럽게 감았다. 가벼운 자극을 주며 당기는 움직임에 목 안에서 저절로 신음이 낮게 울렸다.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떨면서 현규하의 재킷 소매를 붙잡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머릿속을 스친 것도 잠깐이었다. 허리를 긁으며 올라오는 달콤한 울림이 복잡하던 머릿속까지 흐물흐물하게 녹여 버렸다.
이젠 익숙해져서 신경도 안 쓰는 8세가 현규하의 흉부에 눌리면서도 꿋꿋하게 초콜릿을 다 갉아먹고 났을 때야 입술이 떨어졌다. 현규하가 타액으로 젖은 인유신의 입술을 혀끝으로 훔치며 가쁜 숨까지 핥았다.
“애완쥐의 미덕 3조는, 주인님이 유혹하면 바로 넘어가기입니다.”
“제, 제가 언제요”
“주인님의 붉고 도톰하고 맛있고 달콤하고 중독적인 입술이 오물거리고 있는데, 키스하라고 요구하는 거 아니었어요 규하는 연신 달싹거리는 도톰한 입술과 그 사이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분홍색의 혀를 거부할 방법 같은 건 알지 못해요.”
적나라한 묘사에 인유신의 얼굴에는 불이 붙었다.
“으, 여긴 밖인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해요.”
뒤늦게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지만 기원전 꼰대까지 겪은 현규하는 더욱 뻔뻔해졌다.
“기원전에는 엄빠가 동생 만드는 소리까지 애들이 다 들었을 텐데요, 뭐. 그래서 뭘 묻고 싶은데요”
스산하게 몰아치는 눈보라가 사방에서 흩날리고 있었기에 꽤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냈을 법했지만, 현규하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마냥 부드럽기만 했다.
갑작스러웠던 입맞춤에도 분명히 제 긴장감을 풀어 주려는 의도가 있었을 거 같아서 인유신의 뺨은 더 빨개졌다. 그래도 그 덕분에 힘을 빼고 물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질문을 곡해하지 않을 것이다.
“규하 씨 어머니에게 제일 중요하셨던 건 이아드로 돌아가는 것이었겠죠 어쩌면 가족보다 더욱이요.”
“네. 할머니는 남자에 미쳐 가지고 어미도 아들도 갖다 버렸다고 화를 내실 정도였거든요.”
씁쓸하긴 하였으나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담담한 어투였다. 비록 어머니와 썩 좋은 추억은 없었지만 그 과거는 더 이상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고유 능력까지 포기하시면서 규하 씨에게 파계를 주셨는지 조금 의문이어서요. 거의 유일한 수단이나 다름없는 거잖아요. 물론 어머니가 침식 게이트를 지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셨을 수도 있지만…….”
현규하의 눈빛이 다시 복잡하게 가라앉았다.
“파계로 찾아도, 찾아도 답이 안 나오니 자포자기해서 도박하는 심정으로 침식 게이트에 뛰어든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긴 했었는데.”
“이건 제가 규하 씨의 어머니를 뵌 적도 없고 그분의 상황을 잘 몰라서 생긴 의문이긴 한데요, 아무리 그래도 침식 게이트를 통과하는 것보다는 파계를 쓰는 게 확률이 높을 거 같아서요. 능력을 쓸 때마다 몸이나 정신에 부담이 크거나 부하가 걸리는 게 아니라면요.”
인유신이 완곡하게 넘긴 행간의 뜻을 현규하는 어렵잖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버지만이 중요했던 어머니가 자신에게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수단을 넘길 리가 없다는 것을.
‘……유신 씨 말이 맞아.’
어머니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그는 깨닫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면 뻔한 얘기다.
‘어머니가 고유 능력을 어떻게 넘겨줬었지’
현규하의 시선이 오래된 과거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실종되기 전날 밤, 아버지를 찾아가기 전날 밤, 그를 버리기 전날 밤. 그를 부둥켜안으며 흐느끼던 어머니의 눈물이 가슴에 맺혔던 그 밤으로.
어머니를 본 건 세 달 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는 세 달 전보다 더욱 초췌해 보였다. 핏기 없이 허옇게 뜬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광대뼈가 도드라질 만큼 깡말라 있었다. 눈 밑도 침침하게 어두워서 영락없는 병자의 행색이었는데, 오직 눈동자만이 번들거렸다.
현규하의 어린 기억에 남은 어머니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유독 심했다. 그렇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걱정이 되었을 뿐이다.
〈엄마, 밥은 먹었어〉
낚아채듯이 현규하의 손을 잡고 걷는 어머니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곧 돌아오실 거라고 말했지만 그 말도 무시했다. 입 속에서 뭔가를 연신 중얼거리는 그녀의 귀에 제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현규하는 입 속으로 괜찮으냐는 말을 더 웅얼거려 보다가 포기했다. 지금 어머니가 옆에 있으니 되었다. 어머니의 앙상한 손가락을 더욱 힘주어 움켜쥐었다.
어머니가 현규하를 데리고 간 곳은 낡은 여관이었다. 관리도 되지 않던 집의 전세는 할머니가 뺐고, 모자가 갈 곳은 없었다.
여관도 좋았다. 방이 한 칸밖에 없는 여관에서는 어머니와 같은 이불에 누워서 잘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관에 오자마자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규하야. 곧 초등학교 들어갈 때가 되었으니 혼자 며칠만 지낼 수 있지〉
〈응. 괜찮아.〉
이미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얘기를 현규하는 굳이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마 제 나이도 정확히 모를 것이다.
〈엄마 금방 올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근처에 식당이 많으니 밥 먹을 때 쓰라면서 현금을 준 어머니는 다시 사라졌다. 현규하는 어머니의 온기가 남은 지폐를 만지작거리면서 여관방의 작은 창문 밖으로 어머니를 전송했다.
그 말대로 주변에 식당은 많았다. 하지만 밥은 맛이 없었다.
어머니를 만났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었던 가슴이 삽시간에 꺼진 아이는 무엇을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울지 않고 참았다. 착한 아이가 되면 엄마가 버리지 않을 테니까.
어린애 혼자서 여관방에 멀거니 앉아 있는 걸 보다 못한 여관 주인이 식사 시간마다 불러 주지 않았다면 내내 굶었을 것이다.
일주일 만에 어머니는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처음 보는 작은 구슬이 놓여 있었다.
〈규하야. 너한테 이걸 줄게.〉
〈이게 뭐야〉
〈엄마의 고유 능력인 파계를 추출한 거야.〉
현규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이는 어리지만 각성자인 그는 고유 능력을 추출한 정수를 알고 있었다. 고유 능력을 추출한 당사자는 두 번 다시 그 능력을 쓸 수 없다는 것도.
〈이걸 나한테 주면 엄마는 아빠한테 어떻게 가〉
당연한 질문이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의 말에 어머니는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흠칫했다.
〈……그러게. 이게 없으면 스킬을 못 쓰는데 왜 추출했지. 왜 너한테 주려고 한 거지.〉
기괴하게 번들거리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굴렀다. 한동안 혼란스러워하던 그녀는 두통이 올라오는 듯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누르면서 힘겹게 말했다.
〈근데 엄마는 너한테 줘야 해. 하지만 능력을 추출하면, 나는…….〉
어머니가 무척 괴로워 보였으므로 뒤늦게 자책했다. 그냥 받았으면 될 텐데 괜히 물었다. 현규하는 짐짓 활기차게 말했다.
〈아빠한테 찾아갈 다른 방법이 있는 거지〉
〈……아, 그래, 맞아. 침식 게이트가 있었어. 응, 그래. 침식 게이트……. 거기를 통해서 갈 거야. 그러면 돼.〉
〈엄마가 아빠 만나러 가면 나도 나중에 엄마 찾으러 갈게. 엄마 능력을 이제 나도 쓸 수 있는 거 맞아〉
〈안 돼.〉
정신없이 웅얼웅얼하던 어머니의 표정이 갑자기 일변했다. 무섭도록 표정을 굳힌 그녀가 아들의 작은 손을 세게 움켜잡았다.
〈너는 절대 파계를 써서는 안 돼.〉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움켜잡혔으나 현규하는 아프다는 말도 못 했다. 그런 말을 하기엔, 어머니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고유 능력을 추출한 건 일회용이야. 한 번 쓰면 깨져. 네가 써서는 안 되는 거야.〉
〈으, 응…….〉
‘그럼 왜 나한테 준 건데’라는 질문은 할 수 없었다. 아까 했던 질문으로 어머니는 무척 힘겨워했으므로.
한데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힘겨워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아니라고……!〉
멍하니 그를 보던 어머니는 갑자기 머리를 감싸면서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란 현규하가 겁에 질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웅크려서 고통스러워했다.
〈엄마, 아프지 마…….〉
자신도 울컥해서 울음을 터트릴 거 같은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어깨를 만졌는데도 오열은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참이 지나서야 얼굴을 올렸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는, 처음으로 맑아 보였다.
〈……규하야.〉
〈으응.〉
〈너는, 이 구슬을 아마 누군가에게 주게 될 거야. 그렇게 될 거야. 하지만…….〉
평상시처럼 말하던 어머니는, 갑자기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게 어려워진 사람처럼 거친 숨을 헐떡거렸다. 이마에 핏대까지 세운 채 그녀는 단어 하나하나를 힘겹게 발화했다.
〈아무에게나 주어서는 안 돼. 네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사용하면 깨지는 능력이니 그 애를 이정표로 삼아 돌아오지도 못해. 한 번 쓰면 끝이야. 절대 쉽게 넘겨줘서는 안 되는 거야. 알겠니〉
헐떡거림이 섞인 어머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현규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머니가 바라는 게 그것이었으니.
〈그러니까 이건……. 너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에게 주렴.〉
거의 내장을 거꾸로 쏟아 내는 듯한 고통 속에 말을 맺은 어머니는 그대로 쓰러졌다.
〈엄마!〉
현규하는 허둥지둥 어머니를 붙잡았다. 온몸에 땀이 흥건하고 이마가 몹시도 뜨거웠다. 여관 주인의 도움으로 약국에서 약도 사 오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열이 오른 이마도 물수건으로 닦았다.
〈……규하야.〉
어머니는 앙상한 팔을 뻗어 그를 꼭 품에 안았다. 열이 오른 가슴이 후끈후끈하여 답답하고 땀 냄새도 많이 났지만, 현규하는 매달리듯이 그 품을 파고들었다.
〈엄마가 미안해. 널 낳아서 정말 미안해…….〉
밤새도록 아이를 품에 안고서, 어머니는 그렇게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을 때.
어머니의 눈동자에는 다시 기광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규하야, 미안해. 엄마는 네 아빠가 걱정되어서 도저히 못 견디겠어. 정말 많이, 외로운 사람이거든.〉
그렇게 어머니는, 그를 떠났다. 돌아오지 못할 길로. 아버지를 찾아서.
엄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었는데도 버림받았다. 나는 엄마에게 쓸모없는 아이인 걸까…….
현규하는 여관방에 오도카니 앉아 기다렸다. 때때로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구슬만을 만지작거리면서. 찾고 있을 할머니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서.
아이를 버리고 갔다는 여관 주인의 신고로 아동 보호 센터로 옮겨지기 전까지. 계속. 유리 관에서 고요히 눈을 감은 어머니와 마주하게 되는 날까지. 계속.
이야기를 다 들은 인유신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가 닫혔다. 그리고 다시 살짝 열리면서 조심스러운 말이 흘렀다.
“어머니가 많이 힘드셨었나 봐요.”
현규하는 피식 웃었다.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고 말해도 됩니다. 사실이니까요.”
인유신의 손이 위로하려는 것처럼 손등에 얹혔다. 현규하는 그의 어깨를 당겨 안으며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어머니와 있었던 과거의 시간들은, 그 누구에게도 평생 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다는 걸 몰랐어요.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그런 모습이었거든요.”
〈예전에도 네 엄마는 세계인지 뭔지를 구경한다고 정신이 팔려서 할머니랑 인연까지 끊고 살 정도였지만, 이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어. 쟤는 지금 너도 나도 눈에 안 들어오는 거야.〉
할머니의 탄식을 들었을 때도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으로 미치지 않은’ 어머니는 여물지 않은 머리로 상상하기 힘들었으므로.
현규하는 가볍게 털어 내듯이 화제를 바꾸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정표가 될 사람에게 주라.’는 말만은 머리에 깊이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연금술사에게 의뢰해서 추출한 정수를 조금 손봤고요. 결과적으로는 능력이 다운그레이드되긴 했지만요.”
어머니의 당부처럼 파계를 사용한 사람이 이정표가 되어 마나를 각인한 자신이 갈 수 있도록. 일회용의 정수지만 이를 개량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에, 대신 다른 세계에서도 이정표를 추적할 수 있던 힘은 약화되어 불가능해졌다.
“어쩌면 규하 씨의 어머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