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214)

쉽게 설명하자면 원혼의 영체였다.

“학살을 주도한 미군은 7기병연대인데 제임스 포시스라는 대령이 지휘했고, 학살당한 선주민의 추장은 큰 발입니다. 원혼이라니 후자가 아닐까 싶은데요.”

누구인지 알았다고 해서 덜 무서운 건 아니었다. 게이트에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인유신은 현규하의 재킷을 생명줄처럼 붙잡았다.

“그, 그렇지만 귀신을 어떻게 잡아요!”

“무서우면 밖에 있을래요”

인유신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귀신은 무서운데, 분리 불안이 있는 현규하를 던전 안에 혼자 보내는 게 더 걱정이었다.

“뀽!”

걱정하지 말라는 듯 8세가 짧은 앞발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지하 출신이라 그런지, 의외로 유령이나 귀신에는 강했다.

마침 게이트에 도착했다. 과거에 과수원이었던 폐허에 열린 게이트였다. 적당한 곳에 주차하는 사이 공태성이 말을 받았다.

“영체에는 물리적 타격이 통하지 않지. 내 불도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이고.”

“히약.”

“이런 일이 생기면 신성력을 발현한 성직자나 영능력자가 보스를 퇴마했다만, 여기 방식은 어떻지”

“여기도 원리는 같아. 영체를 진혼할 분이 오실 거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호위하는 거고.”

이아드에도 엑소시스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인유신은 조금 안도했다.

일행이 게이트 앞까지 막 걸어왔을 무렵에 최진혁이 말했던 사람도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먼저 내린 사람은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이어 조수석에서 무복을 갖춰 입은 중년의 여자도 내렸다. 최진혁이 꾸벅 인사했다.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년 여자가 투덜거렸다.

“먼 길이고말고. 내 나이가 곧 있으면 쉰인데 언제까지 일 터지면 불러서 혹사시킬 작정이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죠.”

“당장 죽어도 세상에 미련이 없을 놈이 말만 번드레하구나.”

냉소적으로 내뱉는 그녀에게 쓴웃음으로 대답한 최진혁이 일행을 소개했다.

“저희 지부에 임시 고용되어 일하는 헌터들인데, 이번 토벌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러고는 일행에게 눈짓했다.

“만신 손희애 선생이시다.”

동행한 여자는 손희애의 신딸이라고 소개받았다.

“음”

불현듯 손희애가 현규하를 올려다보며 얼굴을 갸웃했다.

“왜요”

“너 혹시……. 아니다. 일단 시급한 건 던전을 닫는 일이니 그 뒤에 얘기하자.”

인유신도 궁금해졌지만 그녀의 말처럼 보스부터 정리해야 했다. 제한 시간을 넘겨 사냥에 실패한다면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다.

[던전 리셋까지 남은 시간  05시간 37분 14초]

최진혁의 브리핑에 따르자면 던전 내의 환경은 눈발이 날리는 냇가와 언덕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한낮의 후끈한 열기가 밀려왔다. 눈앞에 펼쳐진 건 3층짜리 탑이 있는 넓은 호수와 그 안에 있는 섬이었다. 호수와 붉은색의 다리로 연결된 섬에는 사당이 있었다. 호수를 둘러싼 수목으로 보아 동남아 같았다.

“최 팀장님. 이 던전 맞아요”

“귀속 아티팩트를 해방한 것 같군. 그, 무슨 장군이었더라. 외세와 싸우고 황제까지 되었다는 유명한 장군이었는데……. 아무튼 베트남의 아티팩트를 소유한 녀석이 있어.”

“아하.”

명나라의 지배에서 독립을 이끈 레 러이 같았다. 이아드에는 명나라가 없으니 아마 중국의 다른 나라와 엮였겠지만.

현규하의 뒤에 숨은 채 던전의 입구를 지나 진입하니 곧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유령과 말이다.

인유신은 더욱 현규하의 뒤에 바짝 붙었다. 원래 배경은 겨울이니 추울 거라며 현규하가 아공간에서 패딩을 꺼내 주었다.

낮 시간의 귀속 아티팩트도 전체 해방하고, 화염 스크롤도 찢고, 딱 하나 있는 화염술사의 마나도 박박 긁어모으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헌터들이 울먹울먹 외쳤다.

“최 팀장님이랑 만신 선생님 오셨다! 다른 두 분도 오셨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최상위 헌터인 현규하와 공태성은 헵타곤에서 꽤 유명 인사였다.

공태성은 인사 따위로 시간 낭비를 하는 대신에 바로 더르누인을 발검하여 휘둘렀다. 으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화염으로 불타는 칼날에서 용틀임을 하듯 뻗어 나가는 백염은 솔직히 좀 멋있다.

괜히 입술을 한 번 삐죽한 인유신은 뒤에서 현규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규하 씨가 더 멋있어.

“규하 씨, 가요!”

“적극적인 주인님 존나 멋집니다. 일하는 남자가 섹시하다는 건 만고의 진리네요. 애완쥐는 행복하답니다.”

“…….”

무슨 일을 했는지 당사자인 인유신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거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그, 밑에는, 괜찮죠”

“괜찮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닐까요 해면체로 반응이 안 간다는 뜻인데.”

“……!”

생각해 보니 그 말도 맞았다. 말 한마디로 인유신을 혼란에 빠트린 현규하는 그대로 가볍게 몸을 띄웠다. 공태성이 화염으로 막아서고 있는 영체 형태의 마수가 아닌 다른 마수들에게 총소리가 쏟아졌다.

귀속 아티팩트를 해방하고 있던 헌터가 탈력하여 나가떨어지자, 던전은 금세 햇살이 흐릿한 한겨울의 아침이 되었다. 방금까지 열대 기후였던 환경이 삽시간에 눈보라가 흩날리는 건조한 겨울 날씨로 돌변했다. 찢어지고 훼손되어 피에 얼룩진 야영지의 천막과 마차들이 솟아났다.

헌터들이 원래 마수들을 막고 있던 곳은 언덕인 듯했다. 그 가운데에 일단의 마수가 있었다. 이 던전의 보스인 ‘상처를 입은 무릎에 묻힌 최후의 꿈’이었다.

군체라 칭하는 게 더 적절할 ‘상처를 입은 무릎에 묻힌 최후의 꿈’은 헌터들을 전혀 공격하지 않았다. 대다수가 전사도 아닌 노약자와 여자로 보이는 마수의 군체는 둥글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를 따름이었다. 그들이 바란 건 백인이 없던 과거와 같은, 평화로운 나날뿐이라는 것처럼.

생명체를 말살하려는 마수의 본능마저 뛰어넘은 간절한 염원이었다. 막연히 유령이 무섭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인유신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신장대(무당이 사용하는 무구의 하나)를 쥐고 영체를 주시하던 손희애가 혀를 끌끌 찼다.

“총에 맞아 죽고, 얼어 죽고, 끌려가서 죽었구나. 얼마나 원통하였으면 저들 가운데에 생령까지 있어. 거친 깃털이나 선회하는 매라는 이름을 알고 있느냐”

일반 마수들을 금방 정리한 현규하가 그녀의 옆에 내려섰다. 영체는 그로서도 도리가 없으니 마음 편하게 공태성에게 밀어 놓았다.

“생존자들의 이름까지는 기억 못 하죠.”

‘상처를 입은 무릎에 묻힌 최후의 꿈’은 헌터들을 공격하지 않았으나, 노래와 춤이 이어질 때마다 땅이 뒤집힐 것처럼 점차 거세게 흔들리고 버펄로 형상의 새로운 망령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끌면 좋지 않았다.

“진짜 살해당한 당사자들의 유령도 아니니까요. 빨리 진혼해요.”

“알고 있다, 이놈아.”

손희애가 숨을 몰아쉬며 입 속으로 법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겨우 그뿐이었는데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망령들에게서 반응이 나타났다. 약식 지노귀굿(망자의 넋을 달래고 진혼하는 굿)이 시작되었다.

[던전의 보스 ‘상처를 입은 무릎에 묻힌 최후의 꿈’이 사망했습니다.]

인유신도 물론 무당을 접한 적이 있다. 자신이 살던 곳이 신이 떠나간 세계라는 걸 알게 된 뒤에는 잡귀가 들렸거나, 사기꾼이겠구나 싶었지만.

카타스트로피 이후 무당의 정의는 바뀌었다. 영적인 고유 능력을 각성한 각성자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헌터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과거의 무당처럼 점사도 보았다.

손희애를 보고 나니 신으로부터 진짜 신명을 받은 무당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발 한 걸음을 내딛거나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조차 허투루 하지 않았다. 무복이 흩날릴 때마다 신령한 기운이 넘실거렸으며, 그악하게 발을 구르던 버펄로 형상의 망령들은 접근도 하지 못했다.

인유신은 던전 보스가 토벌되었다는 알림창을 올려다보았다. 허신 인안나도, 용궁차사 수언백도 전부 히든 보스로 나타났었기에 이번에도 혹시나 했지만 잠잠했다.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지는 않을 듯하다.

“휴우.”

손희애가 지친 기색으로 뒤집혀서 부서진 마차의 잔해에 걸터앉았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걱정스럽게 다가온 신딸이 이마와 목을 흠씬 적신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그 옆으로 현규하가 인유신과 나란히 걸어왔다.

“왕년에는 가뿐했는데 큰 신들이 떠나가시니 갈수록 버겁구먼.”

“떠나지 못하게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 보질 그랬어요. 세계가 완전히 망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거야 신들한테는 짧은 시간일 텐데.”

“어찌 그래. 애정으로 가꾸던 세상이 망하는 꼴을 계속 보고 있는 것처럼 잔인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머물겠다고 하시던 분들도 내가 보냈다.”

손희애가 혀를 쯧쯧 차며 일렀다.

“나니까 버티고 있는 거지 다른 무당들은 더 심각하다. 여기 내 딸만 해도 받았던 신이 떠나셔서 신력을 잃었지. 그러니 너희도 지인이 신병에 걸렸다고 하면 잡귀일 가능성이 다분하니 섣불리 신내림을 받게 하지 말고 나에게 데려오도록 해라. 점사를 볼 게 있다면 모든 신들이 떠나가시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하는 게 좋고.”

“할 말이 있다고 한 게 그거였어요”

“성미 한번 급한 놈이로구먼.”

눈짓으로 신딸을 물린 손희애의 앞에 인유신도 앉았다. 현규하는 그의 등 뒤에 선 채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희애의 눈길이 현규하를 스윽 훑었다.

“어렴풋이 비슷한 기운이 묻어나는데 혹시 네 어미가 세계를 여행하는 유랑자였더냐”

어깨에 부드럽게 얹혀 있던 현규하의 손끝이 움찔하는 게 인유신에게도 느껴졌다.

“……어머니를 알아요”

“30년 전이었나,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손희애는 30년 전에 만났던 현소라와의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었다. 현규하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가 맞나 보네요.”

“같이 왔느냐”

“돌아가셨어요.”

“뭐 언제”

“20년쯤 됐어요.”

“이상하군…….”

손희애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일찍 죽을 명운이 아니었는데…….”

그녀의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인유신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죽을 명이 변하는 일이 자주 있어요”

“운명이 불변은 아니나 어지간해서는 없지. 다만 다른 세계의 사람이 간섭하면 바뀌기 쉽다.”

비슷한 얘기를 과거에도 들었던 적이 있었다. 용궁차사 수언백이 했던 말이었다.

〈어쩐지 근래 이쪽 세상의 인간들이 종종 사고로 죽을 수명을 넘어서 살거나 일찍 명이 다한다 했더니 현 공이 원흉이었구먼.〉

같은 생각을 했는지 마침 내려다보던 현규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현소라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만한 사람. 무수한 세계를 넘나든 그녀이니 많은 이들을 만났겠지만 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바리공주께서도 떠나가셨으니 여쭐 분이 없구나. 그래, 장례는 잘 치렀고”

“음, 뭐. 유골 수습했으니 잘 치렀다고 할 수 있겠죠”

손희애는 행간에 숨은 뜻을 금방 알아듣고는 안쓰러운 표정이 되었다.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못한 것이냐.”

“어머니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날 만나긴 했으니까, 그걸로 됐어요.”

“그리되었구나…….”

눈을 감고 가만히 현소라의 명복을 비는 듯하던 손희애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잘 보내셨겠지”

“할머니요 더 옛날에 사고로 돌아가셨는데요.”

“네 어미 말이다. 모친이 수년 안에 명을 다할 거라는 걸 전해 주었기에 돌아가서 모셨을 거라고 생각했다만.”

현규하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거라는 걸 30년 전에 어머니가 알고 있었다고요”

“설마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게냐”

그 무엇보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손희애가 입을 작게 벌렸다.

“바리공주께서 네 할머니의 수명에 대해 전해 주신 건, 이전에 만났던 세계에서 모녀간의 갈등이 깊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던 탓이었다. 당연히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에게 돌아갔으리라고 바리공주께서도 말씀하셨고,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만……. 네 어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게지”

어깨에 얹혀 있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인유신은 숨을 삼켰다. 현규하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떨어졌다.

“30년 전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제일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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