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214)

[현재 상태  애정. 살의. 분리 불안. 기막힘.]

상태창에 또 처음 보는 게 떠올랐다. 괜히 불안해져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인유신은 멀리 현규하의 모습이 보이자 바로 달려갔다.

“규하 씨!”

“유신 씨!”

몇 걸음 달리기도 전에 공중으로 몸이 붕 떴다. 현규하가 자신의 앞에 안전하게 착지한 인유신을 격정적으로 부둥켜안았다. 어처구니가 없던 심정이 그의 온기를 품자 사르르 녹으면서 정화되었다.

“나 칭찬해 줘요. 아버지 앞에서 패드립 참았어요.”

“우와, 진짜요 정말 잘했어요!”

인유신이 팔을 위로 뻗어서 현규하의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대번에 기분이 풀리는 걸 느끼며 현규하는 흡족하게 미소했다.

“근데 물을 게 있는데요. 내가 유신 씨보다 6살이나 더 많긴 한데, 꼰대는 아니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커플을 흰 눈으로 흘겨보면서도 손바닥에 놓인 8세를 조물조물하던 최진혁이 했다.

“넌 꼰대가 아니라 성격적 결함이 있는 거다.”

현규하가 갈수록 최진혁을 최진혁1로 만들고 있어서 인유신은 조금 서글펐다. 공태성까지 한마디 거들었다.

“꼰대가 되기 전에 나잇값을 못 하고 있다는 걱정부터 해라.”

“미친놈이 왜 갑자기 칭찬을 하고 지랄이야. 그런다고 해서 끝녀 누나한테 네 말을 좋게 해 줄 거 같아”

“……또 무슨 개소리지”

공태성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인유신은 그가 나잇값 못 한다는 발언을 칭찬으로 여긴다는 게 진심이라는 걸 알아챘다. 대체 안에서 뭔 얘기를 했길래 나잇값 못 한다는 게 칭찬이 된 거지…….

“꼰대보다는 나잇값 못 하는 어른인 게 훨씬 나으니까요. 그쵸”

“어, 맞아요. 그런 거 같아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현규하가 칭찬이라고 생각하니 열심히 호응했다. 그의 얼굴 옆으로 현규하가 허리를 숙였다. 다른 사람, 예를 들어 최진혁이나 공태성, 혹은 스토얀의 시선으로는 뺨에 키스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인유신에게만 간신히 들리는 낮은 속삭임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던전에 들어가면 아버지 눈을 피해서 고모와 연락할 수 있을지 알아봤는데 안 될 거 같아요. 던전에서 발생하는 일도 알 수 있다더군요. 구라일 가능성도 있지만 괜한 시도는 안 하는 게 낫겠죠”

“아, 진짜요 그럼 제 아티팩트 못 쓰겠네요.”

던전에서는 아티팩트를 써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확실히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근데 이런 얘기는 최진혁이나 공태성과 공유해도 되지 않을까

그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현규하가 싱긋 웃으며 그의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나는 유신 씨 외에는 아무도 안 믿습니다. 막말로 최진혁이 아버지에게 세뇌라도 당해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허리를 폈을 때 현규하의 얼굴에서 방금 나눈 대화의 조각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그보다 기다리면서 뭐 하고 있었어요”

“참, 아까 최 팀장님이 신기한 거 보여 주셨어요.”

인유신은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선홍색의 투명한 액체가 유리병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마시거나 상처에 뿌리면 힐이 된다는 포션이래요.”

“포션 게임에 나오던 그거요”

“힐러의 힐보다는 부족하지만 위급 시에는 꽤 유용할 거 같다.”

공태성이 부연 설명을 했다. 힐러의 능력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마법이 가미된 연금술로 제작한 것이어서 마법이 없는 원래 세계에서는 만들지 못할 약이었다.

유리병을 만지작거리던 현규하가 아공간에서 단검을 하나 꺼냈다. 그대로 제 손등을 꿰뚫으려다 멈칫하고는, 방향을 틀어 공태성의 손등을 찌르려 했다.

“……!”

당연히 공태성은 반사적으로 피했다.

“무슨 짓이야!”

“포션이 어떤 효과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또라이 새끼야! 그렇게 궁금하면 네놈 손등에 직접 찌르든가!”

“미쳤어 내 몸에 상처가 나면 유신 씨가 놀라서 안 돼.”

인유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션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상처를 내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기왕 할 거라면 공태성이 다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많이 풀리긴 했지만 그가 현규하를 죽이려 했다는 건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인유신은 아직도 꽁해 있었다. 정작 장본인인 현규하는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있긴 하지만.

“……하아.”

공태성은 이번에도 그냥 성질을 참으면서 손등을 내밀었고, 현규하는 칼로 푹 찔렀다. 인유신도 옆에 있으니 예전처럼 손등을 관통할 만큼 깊이 찌른 건 아니고 피가 흐를 정도로만.

포션을 부으니 상처는 금세 나았다. 현규하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상당히 괜찮네. 이거 어떻게 구해요 유신 씨 몫으로 많이 쟁여 두고 싶은데.”

“민간에서 개발하는 포션도 있지만, 현재 대용량 10개짜리 세트를 구매하면 덤으로 보관 케이스를 증정하는 할인 행사를 헵타곤 한양 지부에서 진행 중이다. 이번 주 중으로 마감될 거 같더군. 행사 기간에는 포인트 적립도 2배야.”

최진혁은 홈쇼핑의 쇼호스트 같은 홍보를 했고, 현규하는 즉시 예약을 걸어 놨다. 열심히 알바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할 이유가 또 생겼다.

“밖에 나왔으니 점심이나 먹고 찢어지…… 잠깐.”

최진혁은 말을 하다 말고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통화를 끊은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미안한데 집까지 데려다주지는 못할 거 같다. 버스 타는 방법은 알지”

“무슨 일 생겼어요”

“게이트를 닫으려고 보스를 사냥할 준비를 했던 던전이 있는데, 예상외의 놈이 나와서 버거운 모양이다. 도와주러 가야 할 것 같군. 공태성, 네 능력도 어느 정도 유용할 테니 동행했으면 한다만.”

“그러지.”

현규하가 있으니 인유신을 경호할 필요가 없는 공태성은 선선히 응했다. 최진혁은 다시 현규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나왔으니 오늘은 가서 쉬어.”

그 문제는 괜찮기도 했고 돈도 벌어야 했지만, 걱정스럽게 저를 보는 인유신의 시선에 현규하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때였다.

“뵤뵷!”

갑자기 8세가 코끝을 찡긋하더니 인유신에게 뭐라고 외쳤다. 물론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배고파”

“삐웅!”

“가고 싶은 데가 있어”

“미우우!”

뭐라는 걸까……. 인유신이 고뇌에 빠져들자 현규하는 간단히 해결책을 찾아냈다.

“야, 고래 불러.”

“하아아…….”

이번에도 공태성은 아무 말 못 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최진혁이 그 모습을 유심히 응시했다.

“저 둘은 대체 무슨 관계지 공태성도 성격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희한하게 현규하에게는 숙이고 들어가는 모양새란 말이야.”

죽이려다가 실패한 관계라는 진실을 밝히기가 뭣했던 인유신은 민끝녀를 떠올리면서 어설프게 둘러댔다.

“그으러니까……. 살짝, 처남이랑 매형과 비슷한…… 규하 씨가 길드장님의 전부인 되시는 분과 친하거든요.”

막 솜노로스를 호출하려던 공태성도, 그를 다그치던 현규하도 식겁한 표정으로 인유신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발상을 할 수 있느냐는 적나라한 감정이 드러나 있어서 인유신은 슬쩍 눈을 피했다.

현규하가 묵직한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주물렀다.

“……주인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그런 게 맞아요……. 매형, 고래 불러.”

“이 씹…….”

현규하의 입에서 ‘매형’이란 발언이 나오자, 공태성은 ‘재벌 3세와 위장 결혼한 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수백 배는 더 흉악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어금니를 꽉 깨무는 일뿐이었다.

최진혁이 몰래 인유신의 귀에 속닥거렸다.

“공태성, 저 친구를 갈구는 맛이 찰지지 않나”

“…….”

인유신은 진땀을 흘리면서도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이를 빠득빠득 갈며 공태성은 솜노로스를 불렀다. 자고 있을 시간인데 웬일로 한 번에 나왔다. 눈에 졸음기가 가득하다는 건 변하지 않았지만.

졸린 표정의 거대한 고래를 본 최진혁이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설마 솜노로스 솜노로스를 어떻게 불러낸 거지 대홍수에 떠내려간 게 아니었나 그 전에 솜노로스는 고래가 아니라 물고기인데”

“이따가 설명해 드릴게요.”

늘어지게 하품부터 하던 솜노로스는 현규하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랐다.

“아니야! 왕자님 몰래 수작 부리는 거 없어요!”

“뭔 헛소리야. 통역이나 해.”

“뺘우우!”

어느새 인유신의 어깨로 올라온 8세가 폴짝폴짝 뛰었다. 졸린 얼굴로 끄덕끄덕하던 솜노로스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방금 던전 얘기를 하고 있었어 그 던전에 가는 게 좋을 거 같다는데 다른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되도록이면 가 보래.”

“던전요 거기에 뭐가 있는데요”

“설명하기는 어려운가 봐.”

인유신은 ‘이번에도 스토야의 말을 전하는 거야’라고 물으려다가 삼켰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현규하의 말이 떠올랐다.

슬쩍 올려다보니 현규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할 일도 없는데 가서 돈이나 벌어 올까요.”

가는 길에 최진혁은 간단히 브리핑을 했다.

“우리 역사에 없던 사건이어서 던전의 배경이 뭔지 학자들도 정확하게는 밝혀내지 못했다만…….”

그의 설명에 따르면 키워드는 근대, 미국, 언덕 근처의 야영지, 한겨울, 눈보라, 선주민과 백인의 대립, 일방적 대학살이었다.

철의 시대만 해도 아메리카 선주민과 백인의 전쟁이 수백 년은 이어졌으니 어느 사건인지 인유신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공태성은 원래 관심이 없었고.

추측을 내놓은 사람은 현규하였다.

“이아드는 게이트가 일찍 열린 여파로 선주민과의 대립이 흐지부지되어 발생하지 않은 모양인데, 아마 운디드니 학살 같네요. 어머니의 기록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 세계가 있었다는 걸 봤던 적이 있어요.”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유령 춤이라는 의식으로 백인들이 사라지고 죽은 동족들이 살아나 좋았던 시절이 돌아오기를 기원하자, 미국 정부는 이를 철저히 금지하고 탄압했다. 대부분의 선주민은 유령 춤을 포기했고, 일부는 대추장 붉은 구름에게 의지하기 위해 피신했으나 도중에 체포되었다.

그 과정에서 추장을 비롯한 수백 명의 수우족이 학살당했다.

철의 시대에서는 신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에게 기원한다는 개념이 없었기에 발생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학살이 시작되면서 150명이 넘게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도망치다가 부상으로 죽거나 해서 결과적으로 300명쯤 사망자가 생겼을 겁니다. 미군도 어느 정도 사상자는 발생했는데 자기들끼리 오인 사격을 한 모양이에요. 애초에 그때 선주민들은 저항할 의사가 없었다고 하거든요.”

설명을 듣던 인유신의 놀란 얼굴에 현규하는 어깨만 으쓱했다.

“인간들이 하는 짓이 그렇죠, 뭐. 아무튼 그래서 보스는 뭔데요”

“살해된 사람들이 많으니 시체와 관련된 보스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이전의 던전에서 봤던 좀비가 떠올라서 인유신은 어깨를 움찔했다. 설마, 또……

최진혁이 핸들을 돌리며 덤덤히 말했다.

“유령이 나왔다.”

“…….”

인유신은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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