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214)

그렇게 시작되는 공태성의 문자는 스토얀이 20년 전에 손을 쓴 뒤 백두산에 생명이 소멸하였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생이 불가능한 건 당연하고, 외부에서 나무를 가져와 심어도 채 1분을 버티지 못했다.

화산 폭발을 막는 대신 백두산은 죽음의 땅이 된 것이다.

‘스토얀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인유신이 오싹해하는 사이에도 현규하는 휴대폰을 보면서 손에 든 소총으로 마수들을 사격하는, 실로 기예에 가까운 실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마수들이 접근도 하지 못하고 죽을 때마다 밑에서 오오, 하는 다른 헌터들의 감탄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현재 게이트 밖에서 사냥, 아니 아르바이트를 뛰는 중이었다. 인구가 많이 줄어든 데다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으니 도심지 밖에는 빈 땅이 많았다.

그런 곳에 생긴 던전은 안에서 마수를 몰아 게이트 밖으로 유인한 뒤 사냥하는 방식도 쓰고 있었다. 헌터들이 전부 국가 소속이라 사냥터 싸움을 할 이유가 없으니 가능한 방법이기도 했다.

인유신은 현규하와 같이 낯선 세계를 구경한다는 취미가 생겼고, 밖을 돌아다니려면 돈이 들었다. 현규하는 방수가 잘되는 옷을 구입한 뒤 처음으로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사냥을 했다. 궁극적으로 이것도 데이트니까 만족도는 최상이었지만.

총소리는 몹시 시끄러웠으나, 현규하가 범죄 길드에서 강탈한 것으로 의심되는 음 소거 스크롤을 찢은 덕에 그들 주변은 조용했다. 외부로 말소리가 새어 나가지도 않으므로 인유신은 마음 놓고 대화를 했다.

“근데 스토얀이 화산을 멈추게 한 이 힘이요, 세계의 왕이 가졌다는 힘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제 추측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왜, 대홍수 신화 같은 이야기에서 결국 대홍수를 막지는 못하잖아요. 대홍수를 일으킬 거라는 예언을 신으로부터 받더라도 방주를 띄우거나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게 최선인데.”

수메르 신화의 우트나피쉬팀도, 기독교의 경전에 나오는 노아도, 인도 신화의 마누도, 한국 신화의 목도령도. 대홍수가 발생할 것이라는 걸 미리 알게 되었더라도 대피할 수단을 궁리했을 뿐이다. 대홍수 자체를 막은 ‘왕’은 없었다.

“……유신 씨. 남은 마수들 금방 정리할 테니까 과거에 있었던 다른 재해에 대해서 한번 찾아봐 줄래요”

“잠깐만요.”

자신의 휴대폰으로 인유신은 대강 기억나는 굵직굵직한 대재해를 검색해 봤다. 소빙하기로 인해 인육까지 먹을 정도로 참혹했던 경신 대기근, 인류의 역사를 바꿨다고 하는 탐보라 화산 폭발, 역대 최악의 피해가 발생한 산시성 지진…….

대재해는 철의 시대에서도, 이아드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했다. 그리고 미리 예견되어 대피하거나 방비하는 데 성공했던 대재해는 하나도 없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삽시간에 마수들을 처리한 현규하가 지면에 내려서자, 헌터들과 대기하고 있던 인부들이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현규하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는 인유신과 나란히 바이크로 걸어갔다.

“어때요”

“제가 기억하는 건 똑같아요.”

“이상하네요…….”

“그쵸”

전 세계에 수백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대재해는 방치했던 스토얀이 유독 백두산이 폭발하는 건 멈추어 주었다. 물론 백두산이 폭발했다면 유례없는 최악의 재난이 발생했을 테고, 안 그래도 멸망으로 치닫는 현 상황에서 관 뚜껑에 못을 박는 일이나 다름없긴 했다.

“백두산 폭발이 엄청나게 심각하니까 이번에는 특별히 힘을 써서 막은 걸까요”

“으음,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네요.”

인유신의 말에 호응하면서도 현규하는 의심스러웠다. 스토얀이 정말 인류를 위해서라는 숭고한 뜻 아래에 힘을 쓴 걸까.

“음”

새롭게 도착한 문자가 상념을 끊었다. 휴대폰을 확인한 현규하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확 찌푸려졌다.

[인왕산 호출. 시간은 오늘 네가 편할 때.]

스토얀의 뜻을 전하는 최진혁의 문자였다.

“지가 뭔데 나를 오라 가라 하는 거죠”

“아빠라서……”

“아버지는 애 생기는 과정에서 기분만 냈잖아요. 죽음을 무릅쓰고 낳은 사람은 어머니고, 키운 사람은 보육원 교사들과 할머니인데.”

“그래도 사택으로 찾아오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진짜 그렇네요.”

인유신과 마련한, 아니 최진혁이 마련해 준 것이지만, 아무튼 인유신과의 소중한 보금자리에 스토얀이 찾아온 광경을 상상해 버린 현규하는 치를 떨었다.

“자정까지 개기다가 가고 싶지만 그러다가 사택으로 찾아오면 큰일이니 유신 씨만 데려다주고 바로 가 볼게요.”

“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인유신이 걱정스레 시선을 올렸다. 파우치에 8세가 없다는 걸 거듭 확인한 현규하는 짐짓 풀 죽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제 볼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애완쥐에게는 기운을 내게 해 주는 주인님의 주문이 필요하니 사랑을 주십시오.”

주위를 둘러보니 그들을 특별히 주목하는 사람은 없다. 인유신은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쪽 소리가 나도록 현규하의 볼에 입을 맞췄다.

겨우 그뿐이었는데도 현규하의 낯에 몹시 흡족한 미소가 걸려서 미안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그의 진심을 믿고, 더 많이 해 줄 걸 그랬다.

  

인유신이 자고 있을 때 몰래 인왕산을 찾아가 ‘무닌의 눈’으로 몇 차례 확인했었다. 그때마다 반응은 늘 동일했다. 언제나 같은 위치에 ‘후긴의 눈’이 있다는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당장에라도 결계인지 마법인지 모를 것을 깨부수고 싶은 생각이 치솟았으나 현규하는 인내했다. 그는 이 땅에 혼자 머무는 것이 아니었고 인유신의 안전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쓸데없이 스토얀을 도발할 필요는 없었다.

‘어머니가 있을 거라는 게 확실하지도 않으니까.’

30년 전에 어머니가 ‘후긴의 눈’을 소유하고 있었다가 스토얀에게 주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섣부르게 희망을 걸었다가 더 낙담하게 될지도 모르니 현규하는 기대감 없이 스토얀을 방문하기로 했다.

어젯밤만 해도 공터였던 장소는 처음 보았던 것과 같은 오래된 한옥이 자리해 있었다.

“어서 오렴.”

상냥한 음성으로 맞는 스토얀을 보며, 현규하는 확신했다. 마치 거울에 비치는 눈동자를 보는 것만 같다. 색깔만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근원적인 감정까지도.

이 사람은 역시 자신과 동류다. 인류를 위한다는 숭고한 목적으로 힘을 쓸 이가 아니다.

현규하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불신한다.

인유신을 만났던 은행에서처럼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쓰레기를 정리했던 건 도의적이고 윤리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 일을 해도 자신의 계획이나 활동에 피해가 없기 때문이다. 민안나의 약을 구하기 위한 노력은 할 수 있지만, 결코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의미다.

필시 스토얀의 행동 원리도 같으리라.

그 이유가 자신과 같은 인간 불신 때문인지, 혹은 무감정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백두산의 폭발을 막은 건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었겠군.’

멸망하는 세계에서 떠날 수 있는 신과는 달리 스토얀과 스토야는 이 세계에 바쳐지고 묶여 있는 존재다. 이아드가 멸망하면 영생불멸하던 그들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기 싫어서 힘을 썼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걸까.

“멀뚱히 서서 뭘 하니”

“꽃이 많은 걸 이아드에서 처음 봐서요.”

현규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마당의 화단으로 옮겼다. 중요한 식량인 벼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데 정원이나 화초를 가꿀 사치스러운 짓을 할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 마당에 피어난 꽃들은 몹시도 생기가 넘쳤다. 봄에 피는 수선화, 여름에 피는 수레국화,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 겨울에 피는 동백……. 꽃들이 계절과 상관없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풍경은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앞서 섬뜩하다.

“소일거리야. 오래 살다 보니 취미가 종종 바뀌더구나. 어디 보자……. 이번 취미는 30년쯤 되었나 소라가 꽃을 좋아했거든.”

“그만큼 산 게 안 지겨워요”

“그만큼이나 살았으니 소라도, 너도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니겠니”

살가운 척하지만 과연 진심일지.

현규하는 무기질의 유리알처럼 투명한 스토얀의 눈동자를 마주 보면서 의심했다. 이 사람의 어디가 좋았기에 어머니는 그렇게나 매료되어 사랑에 빠졌던 걸까. 하나밖에 없는 자식까지 버리고 갈 만큼.

“그 말 하자고 부른 거예요”

“그렇기도 하고. 생각해 보니 너와 처음 만난 건데 변변찮은 얘기도 못 했더구나.”

처음 만난 아들의 남친을 조사하라고 했던 사람의 말이라기엔 꽤 부적절한 핑계다. 하지만 현규하는 내색하지 않고 선선히 응했다. 상대방을 탐색할 이유가 있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스토얀은 뒷마당의 작은 정자로 그를 안내했다. 다탁에는 간소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백인인 스토얀이 옥색 도포를 입고 쌍화차를 따르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불쑥 물었다.

“왜 맨날 그 옷 입고 있어요 안 불편한가”

“소라가 입으라고 했거든.”

스토얀도 자신처럼 애인에게 자아가 없는 남자였다는 사실에 언짢아진 현규하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버지가 마실 피는 없어요 여긴 차밖에 없는데.”

“태생적인 뱀파이어와 달리 인간의 피를 자주 흡혈할 필요는 없어.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왜죠”

“잊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원래 인간이었단다. 하루아침에 인간의 피를 흡혈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내키지도 않았지.”

같은 인간의 생명을 갈취해야 한다는 자괴감을 느낄 만큼 섬세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번에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럭저럭 제 성격을 잘 누르고 있었다.

대낮의 햇살 아래에서 서양인 뱀파이어가 따라 준 쌍화차라는 아이러니함을 느끼며 현규하는 찻잔을 입술로 옮겼다. 찻물이 목 안으로 넘어가는 따스한 느낌은 의외로 괜찮았다.

그리고 지그시 시선을 마주하던 스토얀은.

‘……왜 반응이 없지’

몹시도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현규하를 여기에 불렀을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지난번의 발언을 반복하는 건 아닌지 조금 긴장했던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 그는 이상한 말도 하지 않았고, 혀 짧은 코맹맹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대체 그때는 왜 그랬던 건지 의혹은 더 커졌지만,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의문은 일단 묻어 두었다.

아버지답게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분위기를 이완하기 위한 다과도 준비했다. 긴장을 풀어 주는 따스한 차는 현규하의 경계심도 누그러뜨려 줄 것이다.

뱀파이어의 현혹을 사용할 수 있게끔.

‘현혹이 통하지 않아.’

태연한 얼굴이었으나, 스토얀은 다탁 아래에서 손가락을 지그시 안으로 말아 쥐었다. 현혹은 인간을 보다 쉽게 유혹하여 흡혈을 하거나 자식을 낳기 위한, 뱀파이어라는 종족 특유의 매료 능력이다.

둠네제울에 의해 직접 뱀파이어가 된 스토얀의 능력은 다른 뱀파이어의 현혹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가 작정하고 현혹을 쓰면 정신 계열의 최상위 각성자라 할지라도 눈 깜빡할 사이에 무너트릴 수 있었다. 그에게 기꺼이 자신을 바치도록.

하지만 이 능력이 현규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어째서지 정신 지배에 선천적인 면역 능력이 있나’

현규하의 서번트 태블릿을 띄워 다시 샅샅이 뒤져 봤지만 고위 각성자의 기본적인 정신 방벽 외에 정신계 스킬은 없었다. 검기 발사라는 이상한 이름의 스킬 같은 것들은 있었어도.

‘아니면 현혹보다 상위 계통의 능력에 이미 지배당하고 있다는 뜻인데…….’

다른 뱀파이어의 현혹에 걸렸으리란 선택지는 제외했다. 철의 시대든, 이아드든 그를 제외한 뱀파이어 종족은 멸절한 지 오래다. 혹여 살아남은 뱀파이어가 있다 하여도 그보다 강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는 못한다.

‘다른 상위 계통의 능력이라면, 테이밍’

무심코 떠올린 가정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수라면 결정석, 아주 가끔 동물까지 통하는 능력자라면 영혼을 잇는 테이밍은 확실히 현혹보다 우위에 있다. 그렇지만 인간을 테이밍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현혹이 안 되니 난감해졌는걸. 이 애가 고분고분히 말을 들을 거 같지도 않고.’

현규하가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한 번의 만남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제 계획에 쉽게 따라 줄 것 같지 않았다.

인유신에 대한 조사를 명령한 한편으로 그를 설득할 궁리를 하던 스토얀은 그냥 쉽게 가기로 계획을 변경했었다. 현규하를 현혹시켜, 이 세계를 위한 산 제물로 바치는 절차를 밟기로.

그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졌으니 스토얀의 당혹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가 여기에 있어요”

“응 아, 아아…….”

그 때문에 현규하가 불쑥 던진 말을 듣고서, 저도 모르게 얼떨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말하고 난 뒤에 실언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처럼 쉽게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란 생각을 못 했는지 현규하도 놀란 눈치였다.

현소라는 현규하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남겨 두고 있었다. 현혹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현소라라는 패를 이렇게 꺼내선 안 되는 거였다.

‘……뭐, 됐어.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거니까.’

부자간의 신뢰를 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 스토얀은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소라를 만나러 갈래”

솔직히 말하자면, 스토얀의 반응이 어떨지 그냥 떠봤던 질문이었다. 순순한 대답에 외려 놀란 사람은 현규하였다. 스토얀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를, 정말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고

심장이 쥐어 짜이는 것 같기도 했으며, 몸 안에서 진동이 울릴 만큼 거세게 박동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규하야, 미안해. 엄마는 네 아빠가 걱정되어서 도저히 못 견디겠어. 정말 많이, 외로운 사람이거든.〉

그 한마디만을 남긴 채, 그를 버리고 아버지만을 위해 허위허위 날아가 버렸던 어머니.

그때부터 어머니를 찾아 끝이 보이지 않는 고독한 외길을 달려오며, 몇 번이고 곱씹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할까. 어떤 얼굴로 만날까. 그것은 왜 날 버리고 갔냐는 어린아이의 서러움이기도 했고, 다시는 버리지 말아 달라는 두려움과 공포이기도 했다.

이제는 아니었다.

현규하는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위해서든, 다른 이유가 있어서든, 나를 낳아 주어서 고맙다고. 어머니가 나를 낳아 주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엄마가 나에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무닌의 눈’이 반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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