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214)

인유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재 상태가 뭔가 더 길어졌다.

“왜, 왜요”

“마음이 하나가 되었으니 이제 몸이 하나가 될 차례라고 할까…….”

“대낮인데요!”

현규하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인유신을 포획하더니 번쩍 들어 올려 무릎에 앉혔다. 엉덩이로 느껴지는 수납된 무언가의 감촉에 인유신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과 비례하여 최진혁의 표정은 썩어 갔다.

“난 갈 테니 좋은 시간 보내라.”

“하던 얘기는 끝내고 가야죠.”

현규하의 말을 들은 게 아니라, 인유신을 도와주기 위해 최진혁은 인상을 쓰며 도로 앉았다.

“서번트 태블릿과 같은 화면을 다루어 세상의 어디든 부감하니 전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

“관음증 변태란 말이잖아요.”

“뭐, 소리까지는 못 듣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나도 여기를 찾아와서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거고.”

“그 외의 능력은요”

“으음. 그걸 능력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최진혁은 턱을 문지르며 머릿속을 가다듬었다.

“20년 전쯤 게이트가 열려서 백두산이 폭발할 뻔한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지하 깊은 곳의 공동에 열린 게이트여서 헌터들도 손을 못 대는 사이에 던전 브레이크까지 발발했다. 그로 인한 마나의 돌풍에 마그마가 자극을 받아 화산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갔다.

현규하가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심각한 얘기가 나온 틈에 인유신은 현규하의 허벅지에서 슬쩍 내려오는 거에 성공했다.

“화산 폭발을 스토얀이 막았다는 거예요”

“막은 정도가 아니었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의 국왕과 총리가 스토얀을 방문했다.

〈대재해를 방비하는 건 원래 나의 역할이란다.〉

스토얀은 선선히 응하여 백두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역사상 최대의 화산 폭발인 탐보라 화산 이후 최악의 재해가 되었을 백두산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이트가 열린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부터 지상까지의 생명이 소실되었다고 하더군.”

“무슨 의미예요”

“말 그대로의 뜻이다. 그나마 있던 초목은 전부 말라비틀어지고, 산짐승을 비롯한 생물들은 사체가 되었으며, 마그마는 멈추었지.”

최진혁이 쓴웃음을 베어 물었다.

“한순간에 생기를 전부 소진하여 죽음의 공간이 된 그곳이 마치 우리 세계 같지 않나”

마지막으로 최진혁은 “평상시에도 세상의 모든 사람을 관조하는 건 아니야. 몰래 일을 저지를 작정이라면 스토얀이 관심을 갖지 않을 만한 사람을 포섭하는 걸 추천하마.”라는 충고를 남기고 떠나갔다.

단둘이 남고 난 뒤에야 진짜 얘기가 나왔다.

“스토얀과 담판을 짓겠다고 한 건 어떤 의미였어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냥 임기응변으로 잘해 보려고 했죠. 나는 임기응변에 강하잖아요.”

임기응변에 강한 게 아니라 뭔 일이 생겨도 압도적인 실력으로 다 때려 부순다는 말이 정확한 설명이겠지만, 아무튼 인유신도 동의는 했다. 문제는 이번 경우엔 현규하의 임기응변이 통하지 않을 듯싶다는 거였다.

아무리 현규하라도 폭발 직전의 화산을 멈추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제가 귀속 아티팩트를 일부 해방하면 다시 스토야와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녀라면 조언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현규하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우리를 훔쳐볼 가능성이 큰 관음증 변태가 있는데 섣불리 사용하는 건 곤란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그렇네요…….”

한숨을 쉰 인유신이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그가 고민하는 것들 가운데 자신의 히든 특성 크르스니크로 뭔가를 해 보겠다는 내용은 없었기에 현규하는 안도했다.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은 탓에 인유신은 그 특성이 그저 뱀파이어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고만 알고 있다.

인유신을 크르스니크로서 스토얀의 앞에 내세워 위험에 처하게 하느니, 차라리 제 머리를 스스로 박살 내어 죽을 것이다.

“그보다 진짜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요.”

낮게 깔리는 진지한 음성에 인유신은 다시금 바짝 긴장했다. 소파에 앉은 인유신의 다리 밑에 주저앉은 현규하가 그의 무릎에 얼굴을 올렸다.

“관음증 환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아니까 진도를 못 빼겠네요. 이 위치가 딱 좋…….”

얼굴에 열이 확 오른 인유신은 허둥지둥 그의 입을 꽉 막았다. 그래도 솔직한 심정으로는, 보는 눈이 있어서 본격적인 뭔가를 시도도 못 해 보게 되었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걱정 있어요”

골머리를 앓으며 구석에 앉아 있기만 하자니, 어린 피티치 아이 하나가 다가와 염려하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스토야는 굳은 표정을 풀며 아이를 안아 무릎에 앉혔다.

“별거 아니야. 얼마 전에 스토얀의 아들을 만났잖아. 걔 생각을 했어.”

“나도 왕자님 보고 싶었는데.”

“다음에 내려오면 꼭 소개해 줄게.”

“네!”

반갑게 외친 아이는 스토야의 무릎에서 조잘거렸다. 땅 밑의 세상, 명계의 주민들은 모두 그녀의 아이들이다. 스토야는 아이의 수다를 즐겁게 들어 주었고 신나게 재잘거린 아이가 지쳐 잠든 뒤에야 다시 근심에 젖었다.

‘규하에게 연락할 수단을 넘겨줘야 하는데.’

스토얀은 분명히 현규하와 그 일행의 서번트 태블릿을 샅샅이 훑어볼 것이다. 그녀가 건네주는 명계의 아이템을 소지했다가는 당연히 발각될 터였다.

지금껏 떠올린 생각 중 그나마 의심을 사지 않을 방안이라고는 칼리칸트자로스들이 땅 위로 올라갈 때 몰래 전달하게 하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스토얀이라면 칼리칸트자로스가 규하에게 접근한 것만으로도 의심할지도 몰라.’

스토얀은 누구도 믿지 않는다. 함께 인신 공양의 제물이 된 그녀만을 그나마 불신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섣부른 접근은 위험했다.

그다음으로 떠올린 방안은 아예 판을 크게 키우는 것이었다. 세상 곳곳으로 명계의 기운이 흘러들어 가면 스토얀도 현규하 하나만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터였다. 문제는, 그만한 일을 벌이면 인명이 많이 상하게 된다는 거였다.

‘단점이 하나같이 치명적이니…… 응 규하가 왔던 문이 완전히 닫힌 게 아니었던가’

스토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명계와 지상을 잇는 문이 다시 열렸다.

‘백두산을 또 오게 되는군.’

이동 게이트, 이아드에서는 정형 게이트라 불리는 게이트를 통해도 백두산으로 직행할 수는 없었다. 공태성은 혜산까지 게이트로 이동한 뒤 승용차를 몰았다.

이 차 또한 최진혁에게서 받은 것이다. 원래는 현규하와 인유신에게도 차를 주려 했으나 새파랗게 질린 인유신이 필사적으로 사양했다. 차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나 사고로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보기에는 지금까지 차를 얻어 탈 때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최진혁이라…….’

공태성은 쓴웃음을 흘렸다. 20년 넘게 티격태격했던 녀석이 생경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건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자신이 알던 최진혁과 별개의 사람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 간혹 치밀어 오르는 씁쓸함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2년 전, 계란재의 게이트를 닫으러 왔을 때 장범이 여기까지 왔으니 제대로 구경하라면서 엉겨 붙었다. 한준수까지 혹해서 채근하니 아주 귀찮았다.

〈너희끼리 실컷 구경해라.〉

〈나중에 부회장님이랑 아가씨랑 백두산 여행할 때를 대비한 사전 답사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 말에 바로 넘어가서 예정에도 없던 백두산 등반을 다시 정식 코스로 했다. 결국 민끝녀와는 백두산 여행을 하기도 전에 이혼하게 되었지만.

‘…….’

남겨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꽉 메는 기분이다. 하지만 민안나의 병을 고칠 수 있게 된 대가로는 아주 가볍다.

이곳 이아드에 민끝녀와 민안나는 없다. 그리고 공태성은 그와 가까웠던 이들이 더 이상 없길 바랐다. 민끝녀만이 아니라 장범, 한준수, 박서희……. 그 모든 이들이.

복잡한 상념을 떨쳐 내며 매표소가 있던 장소까지 온 공태성의 눈에 경악이 차올랐다. 백두산이 폐쇄되었으니 그가 왔던 세상과는 달리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 시설이 없으리란 건 예상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여기가 정말, 백두산이라고’

공태성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현규하는 한 손으로 지면의 마수를 향해 소총을 쏘면서 다른 손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니, 확인하려고 했다.

“길드장님이 벌써 백두산에 도착하셨어요”

등 뒤에 업히듯이 어깨를 붙잡고 살짝 떠 있던 인유신이 옆으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두 사람의 볼이 살짝 스치고 은은한 향이 부드럽게 코끝을 감돌았다. 그를 취하게 하는 인유신의 향이다.

현규하의 심장 박동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

[현재 상태  애정. 살의. 흥분.]

“가, 갑자기 왜요…….”

“주인님한테 버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확 오네요…….”

“저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주인님의 존재 자체가 과한 고자극이라…….”

인유신은 울상을 지었다.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힐이나 버프 받을 때의 그, 느낌이 오면 앞으로는 같이 다녀서도 안 된다는 건가.

“후우, 내가 사춘기 때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요…….”

“차, 참아 봐요.”

“어떻게요……”

“잘…….”

잘해 보라는 것 외에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달려드는 마수들에게 총을 갈기면서 현규하는 어떻게든 참아 냈고, 인유신은 최대한 그에게서 거리를 둔 채 같이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그리고 화면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사춘기 때보다 증상이 심각한 현규하의 상태에 대한 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가 백두산이라고요”

“공태성이 구라를 친 게 아니라면요.”

등산을 싫어하는 인유신은 당연히 백두산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기껏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이상했다.

인유신은 미심쩍은 얼굴로 화면을 응시했다.

“길드장님이 일부러 흑백 화면으로 영상 찍은 건 아니시겠죠”

“쓸데없는 짓을 할 인간은 아니니까요.”

화면에 비친 백두산에는 색채가 존재하지 않았다. 흑과 백의 풍경만이 고요히 사방을 지배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치 침식 게이트처럼.

진짜 침식 게이트와는 달리 하늘에 태양이라는 광원이 있었으나, 그로 인한 이질감이 더욱 기괴하다. 인유신은 갑자기 오싹해져서 팔뚝을 문질렀다.

공태성은 짧은 영상과 사진들을 이어 보냈다. 그 속에서 백두산은 초입만이 아니라 천지까지 온통 흑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흑백의 화면에 너무 놀란 나머지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이 있는 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게 늦었다.

[백두산은 20년 전의 사건 이후 출입이 완전히 통제되었다고 한다. 기밀에 부쳐진 정보라서 최진혁이 아니었으면 나도 오지 못했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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