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씨. 고백하자면요,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동거하게 되어서 정말 곤란하거든요. 나는 지붕에서 만족하던 수줍음 많고 소박한 애완쥐여서요.”
그사이에 잠든 인유신은 그의 투정 아닌 투정에도 아랑곳없이 쌕쌕 고른 숨소리만 낼 따름이었다.
미묘한 미소가 현규하의 입가에서 흘렀다.
같이 한 침대에 자려고 누웠을 때는 긴장해서 꼬물꼬물하다가도, 막상 잠이 들면 인유신은 지금처럼 아주 편안하게 기댔다. 심지어 공태성의 별장 것보다도 좁은 침대다.
현규하는 정말로, 무척이나 곤란했다.
“신뢰받는다는 게 기쁘긴 한데요…….”
당장 인유신과 어떻게 할 작정이 없는 마음과는 별개로, 바로 옆에서 안심하고 곤히 잠든 그를 보다 보면 번뇌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여러모로 복잡미묘한 심리였다.
그리고 이런 생각 자체가 무척이나 배부른 고민처럼 느껴져서 현규하는 엷게 웃으며 인유신을 더 끌어안았다. 죽을까 말까, 소극적인 자살에 대한 욕구가 공허하고 스산하게 휘돌던 때에 비하면 얼마나 즐거운 고민인가.
- 아빠앙♡ 아들램 왔쩌요오옹♡♡
현규하가 온 것을 감지하고 환영 마법을 거두려던 스토얀은 몹시 당황했다.
‘아빠앙 아빠 어제까지는 아버지라고 하더니 갑자기 왜 거기다가 아들램이라니 무슨 의미이지 아들과 비슷한 단어인가 저 혀 짧은 코맹맹이 소리는 또 뭐고’
혼란에 빠진 그가 정신 공격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즈음, 현규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근처를 탐색하는 모양이었지만 이제 와서 마법을 거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혼란스러움이 남아 있기도 했고.
‘이게 세대 차이라는 건가’
이 나이가 되어서야 낳게 된 아들과의 세대 차이로 고민하던 스토얀의 상념은 자연히 그의 곁에 있던 청년을 떠올리는 데까지 넘어갔다.
그 청년이 현규하의 짝인 크르스니크가 아닌 이상 주인이든 노예든 상관없었다. 현규하가 담피르가 아니며 그의 짝이 존재할 리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더더욱 무관계한 사람이 될 터였고.
그랬어야 했는데.
‘파계 스킬이라.’
스토얀은 잠자코 이마를 짚으며 청년의 손가락에 있던, 진흙을 뭉친 것 같은 괴이쩍은 형상의 반지에 깃든 힘을 떠올렸다. ‘섭리’가 현소라에게 부여한 바로 그 스킬이다. 현소라의 고유 능력. 파계.
‘파계가 어쩌다가 그 청년에게 넘어가게 된 거지 주인이라더니 스킬까지 바친 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파계가 청년……. 스토얀은 조금 더 고민한 뒤에야 그의 이름이 인유신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의 시간을 육신에서 흘려보내다 보면,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대개 인식도 되지 않고 흩어지기 마련이다.
인유신의 이름도 그가 파계를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절대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파계를 넘겨준 것에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건지……. 아무튼 그 아이가 파계를 계속 갖고 있었어야 했는데, 귀찮게 되었어. 흐음, 어떻게 할까.’
일단 인유신이라는 청년부터 알아봐야 하려나.
최진혁이 스토얀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이었다. 전임자가 임무 도중 순직하면서 스토얀과의 연락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한양 지부에서도 스토얀에 대한 걸 아는 사람은 지부장인 허정현, 연락 담당관인 최진혁을 비롯한 극소수의 몇몇뿐이었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스토얀의 말씨는 부드러웠으며 행동은 배려 있고 상냥했다. 기원전부터 살아온 괴물이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잘못된 생각이라는 건 곧 알게 되었다.
스토얀이 눈앞의 이들을 보는 시선은, 그와 동등한 ‘인간’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하찮은 도구로 여기거나 멸시하는 감정이 비쳤다면 차라리 인간적이라고 느꼈으리라. 그저 그에게는 타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따름이었다. 지나가는 개미를 보고 일일이 의미를 가지는 사람이 있던가.
스토얀에게 ‘인간’이란 겨우 그 정도의 가치였다.
지나치게 오래 살면 스토얀처럼 감정이 마멸되어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일까. 저승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스토얀의 쌍둥이 누이도 사람을 보는 시선이 비슷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인간에게 의미 부여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생명이 태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건 희한하군.’
조금 더 오래 살게 해 주고, 조금 더 많이 태어나게 해 준다는 것은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특히 중요한 가치다. 그 때문에 왕실을 비롯한 정부도 스토얀을 붙잡아 두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최진혁은 동의하지 않았다.
‘멸망이 예정되어 있는 세상에서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는 것도 고통이지. 운석 충돌로 단번에 죽는 것도 아니고.’
그럴 바에는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상념을 스토얀을 만나고 올 때마다 간혹 곱씹곤 했다.
결과적으로 최진혁은 스토얀에게 썩 호의적인 감정이 없다. 그 때문에 그의 자식을 데리러 갈 때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스토얀을 신처럼 경배하는 이들이라면 감격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진혁에게는 국가적인 귀빈의 자식이라는 느낌뿐이었다.
현규하를 만난 뒤에도 그 감상은 변하지 않았다. 씨도둑은 못 한다더니, 스토얀의 복제품 수준이었다. 외모가 아니라 눈앞의 사람을 보는 그 시선이.
현규하 또한 그랬다. 이 남자는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든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을 사람이다. 스토얀처럼.
……그렇게 여겼던 그 시선은.
〈유신 씨.〉
옆에 있는 청년을 향할 때면 환한 생기가 감돌았다. 무채색의 식은 감정만이 깃들어 있던 눈동자가 인유신을 담을 때면 그 눈 색과 같은 보석처럼 빛난다.
현규하는 스토얀과 다른 ‘인간’이다. 최진혁은 이를 확실히 인식했다. 조금 더 겪고 난 뒤에는 성격상의 문제까지 알게 되긴 했지만.
최진혁을 가장 복잡미묘하고, 싱숭생숭하고, 아리송한 얼굴로 보는 사람은 공태성이었다. 귀속 아티팩트를 구해 줄 정도라면 원래 세계에서 각별한 사이였겠거니, 싶었다.
인유신은 꽤 흥미로웠다. 나이가 어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소한 일에도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렇게 솔직한 얼굴로 감탄하면서 즉각적인 반응까지 바로바로 돌아온다.
이것저것 캐묻는데도 귀찮기는커녕 반짝거리는 순한 눈동자를 충족시켜 주고 싶어졌다.
‘동생이 생각나서 그런가.’
일찍 죽은 동생이 살아 있다면 그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으리라.
만약 동생이나 가족들이 생존해 있었다면 최진혁은 다른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는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 될 테니.
그러나 현재의 최진혁은 거리낄 게 없는 홀몸이었다. 스토얀의 거처에서 나온 그는 5분쯤 고민한 뒤 그냥 사택으로 직행해서 일러바쳤다.
“스토얀이 너를 조사하라고 하더군.”
인유신은 눈썹만 세차게 깜빡거렸으며 현규하는 뚜벅뚜벅 걸어가 창문을 열고 창틀에 한쪽 발을 올렸다.
“규하 씨! 뭐 하는 거예요 거긴 창문인데요!”
“노망난 노인네 찢으러 가는데요.”
저 자식이 멀쩡한 문을 놔두고 왜 저러나, 싶었던 최진혁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인유신이 다급히 달려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는 현규하의 허리를 뒤에서 붙잡았다.
“잠깐만요! 바로 가서 다그치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떻게 해요! 거기다가 최 팀장님의 입장도 안 좋아지실 거 같고요.”
최진혁의 입장을 고려한 게 아니라, 인유신이 말렸기 때문에 현규하는 다시 얌전히 돌아와 앉았다.
“그 노인네가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요”
“노인이라기엔 너보다도 어려 보이는 얼굴이다만”
“기원전부터 살았으면 노인네 맞죠.”
친아버지를 향한 가차 없는 패드립에 최진혁은 내심 동의했다. 노망이 들어서 사람을 보는 눈이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바였다.
“상세한 얘기는 안 했다. 원래 그런 걸 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가능한 한 인유신의 모든 걸 알아봐 주렴.’이라고 했을 뿐이야.”
“말투 되게 재수 없네요.”
“나”
“그 인간요. 모든 사람을 다 자기 아래로 보고 있는 거 아니에요”
“노망이 들 나이면 그럴 만도 하지.”
실없는 소리로 스토얀을 잠깐 씹은 현규하는 인유신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조사하라는 얘기를 듣고 놀란 얼굴이긴 했지만 겁을 먹은 기색은 아니었다.
인유신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으니 냉정을 회복한 현규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스토얀이 인유신을 조사하려는 이유라면…….
‘역시 그건가’
악신 네쿠라툴이 빚은 최초의 뱀파이어, 진조를 살해한 담피르와 크르스니크. 둠네제울이 그들을 가엽게 여겨 운명을 거둔 이래 담피르와 크르스니크는 뱀파이어의 영원한 대적자이자 천적이었다.
이는 신의 손을 떠난 세상의 법칙이 되었으므로, 신으로부터 세계의 왕이 될 것을 지음 받은 스토얀이라 하여도 예외는 아니다.
크르스니크로 확실히 각성하지 못했다 해도, 인유신의 존재는 확실히 스토얀에게 위협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야도 굳이 복잡한 수단을 써서 스토얀의 눈을 피해 크르스니크라는 특성을 감췄을 터였다.
현규하는 제 상태창을 띄워 보았다.
[히든 특성]
- 뱀파이어 특질
- ■■■■■ ■■■ ■■■■■■■와 이아드의 혼성
- 왕의 사생아
스토야가 손을 댄 후와 변함이 없었다. 인유신의 상태창도 동일할 것이다.
‘그렇다면 확신한 건 아닐 테고, 눈치를 챈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더 꼬여만 가는 느낌이었다. 스토얀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당연했다.
“발상을 바꿔 보자면 역정보를 흘리는 방법을 쓸 수도 있겠네요.”
“어떤 정보를”
“그게 문제예요. 목적이 뭔지를 알아야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텐데…….”
인유신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요, 당분간은 있는 그대로 제 모습을 정보라고 전달해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제 프로필이야 특이한 것도 없고.”
“유신 씨 말이 맞습니다. 밑밥을 잘 깔아 놔야 나중에 역정보를 흘리더라도 스토얀이 최진혁의 말을 믿겠죠.”
말을 이으며 현규하는 인유신의 어깨를 바짝 안더니 뺨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니까 그쪽은 나와 주인님이 얼마나 눈꼴시고 환상적이며 환장스러운 커플인지 늘그막에 홀아비 신세나 다름없는 쓸쓸한 노인네에게 세세히 보고하여 마음껏 염장이나 질러요.”
“……아, 진짜 짜증 난다.”
최진혁이 현규하를 보는 시선이 최진혁1의 시선과 완전히 똑같아졌으므로 인유신은 몹시 민망해졌다.
반면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현규하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명언을 떠올리며 정보부터 얻으려 입술을 뗐을 때였다.
“스토얀은 어떤 사람이에요”
“……!”
[현재 상태 애정. 살의. 감동.]
갑자기 흥분한 현규하의 현재 상태에 인유신이 의아해하는 사이 최진혁이 고심하다가 대답했다.
“아이러니함이라고 해야 하나……. 세계가 멸망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 같은 사람이 오히려 세계가 멸망하지 않도록 힘을 쓰고 있다는 게 희한하더군.”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대답이었다.
현규하가 회령에서 만났을 때부터 신경 쓰였던 최진혁의 말을 질문하려던 때였다.
“전능하지는 않지만 전지하다고 했었잖아요. 그건 무슨 뜻이었어요”
“……!”
[현재 상태 애정. 살의. 감동. 일심동체. 이심전심. 염화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