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와 흡사한 화면에서 나오는 연예인은 그들의 세계와 동일인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다. 전통문화가 보존된 의복이나 소품 같은 세세한 차이들만 아니었다면 원래 세상의 TV를 보는 것만 같았다.
종말이 예고된 세계였기에 8세의 확답을 듣고도 걱정이 많았는데 이만한 인프라가 유지되고 있다니 인유신은 놀라웠다.
반면 현규하의 시선은 보다 냉정했다.
‘방송 인프라나 문화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가 무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면 정서적인 안정 또한 유지할 수 있다. 종말로 치닫고 있는 세계라 하여도 그 원리는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기실 그런 문제야 어떻게 되어도 좋은 것이고, 현규하의 관심은 옆에 앉은 인유신에게만 쏠려 있었다. 내용을 잘 모르는 드라마나 예능도 흥미롭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만 봐도 지루함을 느낄 틈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던 터라 피로감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눈꺼풀에 수마가 묵직하게 내려오고,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기도 하면서 TV를 보던 인유신의 얼굴이 결국 꺾였다.
현규하는 얼굴이 앞으로 푹 꺾인 게 아니라 제 어깨로 안착했다는 게 몹시 만족스러웠다. 반대편 손으로 인유신의 뺨을 살살 문질렀다.
“유신 씨, 계속 잘 거예요”
“으응…….”
“지금 안 깨면 물고 빨고 핥아도 된다고 허락한 걸로 알겠습니다.”
대답은 인유신이 아니라 그의 무릎에 있던 8세에게서 들려왔다.
“끼우…….”
연신 눈치를 보면서도 자는 사이에 그러지 말라는 듯이 소심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8세의 머리를 검지로 톡 건드렸다.
“스토커 아니니까 그런 짓 안 해.”
“찍.”
8세와 얘기가 통했다면 ‘밤마다 지붕 위에 살림을 차려 놓은 주제에 스토커가 아니라니’라는 요지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외쳐 봤자 현규하에게는 들리지 않으니 애꿎은 햄스터만 갑갑할 따름이다.
기막혀하는 8세를 붙잡아서 소파에 대충 내려놓은 현규하는 인유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침대는 두 명이 눕기에는 조금 좁고, 한 명이 눕기에는 넉넉한 사이즈였다. 그러니까 끌어안고 누우면 딱 맞는 사이즈다.
목 밑으로 팔베개하며 인유신을 살짝 당겼다. 잠결에 따뜻한 곳을 찾는지 인유신이 품 안으로 스르르 굴러왔다.
깊이 잠든 그의 고른 숨소리 사이로 아득하게 추락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현규하는 속삭였다. 듣지 못할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말.
“사실 지난번에 유신 씨에게 거짓말을 했던 적이 있어요. 최악의 상황이어도 몇십 년은 버틸 거라고 했던 건 확신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었거든요. 아버지와 고모 덕분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세계니까 최후의 보루인 아버지가 사라진다면 급속도로 추락할지도 몰라요.”
그러한 의심도 하고 있고, 그 전에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는 바람도 있다. 한데도 막상 눈앞에 스토얀이 있으면 살의를 주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고 현규하는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판단했다.
인유신이 없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거란 얘기다.
현규하는 이제 무엇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지 분별할 수 있다. 인유신의 안전한 귀환이다. 그것을 위해 스토얀을 마주하고도 목을 날려 버리지 않고 대화만 무난히 나누었다. 심지어 어그로도 끌지 않은 얌전한 대화였다.
아마 결과적으로도 좋은 해결책이 될 터이다. 스토얀도 대뜸 제 목을 날리려 하는 자식보다는 차분히 대화부터 나눈 자식에게 응해 줄 가능성이 클 테니까.
인유신은 그를 어제보다 나은 인간으로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끔 해 준다. 인유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스토얀을 죽이는 것이 바로 이 도시를, 세계를 무너트리는 결과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쯤 그 방법을 찾는 일에만 매몰되어 있었을 터이다. 현규하는 인유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면 멸망해도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을 테니.
그로 인한 종국에 달하는 것은 결국 공멸과 죽음.
그 영원한 죽음으로 기꺼이 곤두박질치던 나날도 있었다. 홀로 죽는 것만이 자신의 운명이라 여기던 나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현규하는 인유신의 옆에 누워 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인유신의 존재감에만 깊이 취한 채로.
죽음으로 치닫는 목표 지점으로 내달리지 않고, 무위하게 흘리는 나날이 이토록 충만하다.
식자재가 주방에 준비되어 있어서 늦은 아침은 간단히 토스트를 해 먹었다. 정확히는 현규하가 만들었고, 인유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도 않고 식탁에 엎드려서 요리하는 현규하를 구경했지만.
일하는 남자는 매력적이라던데, 그는 일만이 아니라 요리를 해도 멋지다.
“식사하고 아버지를 만나러 좀 갔다 올게요. 어머니도 찾을 수 있으면 찾아보고요.”
“저도 같…… 아니, 저는 어떻게 할까요”
반사적으로 동행하겠다는 말을 꺼내려다가 바꿨다. 이아드로 오기 전에 했던, 현규하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다짐이 떠오른 탓이다. 인유신의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현규하가 검지로 털어 내며 싱긋 웃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아버지 눈에 유신 씨는 되도록 안 보이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히든 특성을 보이지 않게 조치했다지만 만에 하나라는 경우도 있고, 아버지가 당신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찝찝하네요.”
인유신도 동감이었다. 아들이 애인도 아니고 주인님을 데려왔다는데 관심을 안 갖는 부모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무닌의 눈’은 제대로 위치가 뜨는 거 맞죠”
그 말에 현규하가 한 번 더 ‘무닌의 눈’을 띄워 확인해 보았다.
“문제없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세계를 건너게 될 때 연결이 끊겼을 텐데, 유신 씨랑 같이 와서 그런지 작동 잘되네요.”
“인왕산까지는 어떻게 가려고요 거리가 좀 있던데.”
“찾아보니까 바이크와 비슷한 이륜자동차가 있더군요. 최진혁한테 한 대 강탈해서 유신 씨가 자고 있을 때 몰아 봤는데 운전하는 방법은 비슷했어요.”
여전히 당당하게 삥 뜯는 거 하나는 일품이었다. 인유신은 설사 루마니아까지 걸어가게 되었어도 현규하라면 도중에 대륙 횡단 열차같은 걸 갈취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식사를 끝낸 현규하는 곧 준비를 마쳤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현관에 서서 인사하는 그를 보자니 어쩐지 가슴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떠오른 단어 하나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데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현규하도 바로 현관을 나가지 않고 얼마간 서 있다가 허리를 굽히며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맞춤을 했다.
“신혼부부 같네요.”
같은 생각을 해 버렸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게 현규하의 대단함일까. 인유신은 빨개진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배웅했다.
어제 조는 바람에 못 본 TV도 보고 방도 더 둘러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재미가 없어졌다. 현규하가 없는 집 안을 괜히 정처 없이 왔다 갔다 하던 인유신은 그냥 산책이나 하기로 했다.
“8세야. 밖에 같이 나갈래 산책도 하고 주변 지리도 익힐 겸.”
“삐우.”
물론 8세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8세가 뛰어든 파우치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왔다. 최진혁이 찾아올지도 모르니 문 앞에 둘 다 외출했다는 쪽지를 붙이고 있을 때였다.
“인유신”
“어, 길드장님.”
마침 공태성도 옆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최진혁이 마련해 준 집인가 보다.
“안나 약은요 어떻게 됐어요”
“약이 아니라 성수라고 하더군. 어제 회령에서 세계의 틈을 통해 보내 주고 온 참이다.”
딸의 병이 완치될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일까. 공태성의 표정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한결 밝았다.
얘기를 듣자 하니 성수는 준의 신상에서 눈을 장식하는 루비를 융해하여 최고 사제가 축성한 액체였다. 최고 사제는 어린아이가 신성력에 중독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선뜻 성수를 내주었다고 했다.
“성수를 마시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더군.”
루비를 녹인 성수는 대체 무슨 맛일까. 상상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가격의 맛일 테지만, 그 활기차던 꼬맹이가 낫게 되었다니 정말 잘됐다.
공태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낮게 물었다.
“현규하는”
“규하 씨는 밖에 따로 일이 있어서요.”
현규하가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한 뒤에야 공태성은 인유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네 덕분이다. 고마워.”
한 것도 없는데 감사를 받으니 괜히 민망해졌다.
“길드장님이 다 알아서 하신 건데요, 뭐.”
“네가 아니었으면 여기에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현규하도.”
그는 어딘지 홀가분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난 말이다. 민 회장이나 끝녀의 집이 어떤지 알고 있으면서도 끝녀를 내가 빼내야겠다는 결심만 했을 뿐이었어. 아예 부수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현규하는, 그걸 했고.”
옅은 한숨이 공태성의 입술 사이에서 흘렀다.
“결과적으로 옳았던 건 현규하였지. 그 빌어먹을 집안에서 빼내기만 했다면 지금의 끝녀는 아마 없었을 거야.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해냈으니 9살이나 어린 놈에게 질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민끝녀가 처한 상황을 알고 현규하가 그랬던 건 아니었다, 라는 말을 하려다가 인유신은 되삼켰다. 공태성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감정이 주체되지 않았겠지.
“양사가를 부순 것도, 안나의 약을 구한 것도 현규하 덕분이었으니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진 셈이야. 내 조력이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해 다오.”
“그치만 규하 씨는 별로 신경 안 쓸 거 같아요.”
지은 죄가 있는 공태성이 아무 말도 못 할 때야 가차 없이 벗겨 먹는 현규하지만, 정작 마음의 빚을 졌다는 얘기는 시큰둥하게 넘길 거 같았다. 공태성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현규하가 부재중일 때 네 경호원 역할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경호원이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그럼 길드장님도 같이 산책하실래요”
둘러보면서 정보를 얻는 건 하나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다. 인유신의 제안을 공태성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도공학이 보편화되어 있으니 엘리베이터 또한 마법으로 작동했다.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에서 올라오기를 기다리는데, 마침 딱 멈췄다. 안에는 붉은색 머리칼의 백인 여성이 3, 4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분들이네 아, 외부 협력자분들이 당분간 사택에서 머물게 되었다는 얘기를 최 팀장에게 들었는데 그분들이구나.”
“……올리비아 맥도웰”
“저 알고 있으신가 보다. 제 이름은 이제 윤 올리비아지만요. 타실 거예요”
올리비아를 보고 흠칫 놀랐던 공태성은 고개를 저었다.
“내려갈 겁니다.”
“참, 이거 올라가는 거였지. 사택에 계시면 종종 마주치겠네요. 다음에 또 봬요.”
“바이바이!”
엄마의 손을 잡은 아이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어쩐지 인유신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어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공태성이 믿기 힘들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맥도웰이 왜 한국에 있지 사택이면 저 여자도 헵타곤 소속이라는 건가 말이 안 되는데”
“아는 분이세요”
“미국의 S급 헌터인 올리비아 맥도웰이다.”
설명을 들으니 인유신도 생각이 났다. 마침 얼마 전에 현규하에게 들었던 얘기도 있었다. 범죄 길드를 털, 아니 무기 조달을 하러 갔다 온 뒤의 얘기였다.
〈미국에 올리비아 맥도웰이라고 정말 귀찮은 인간이 있거든요. 나만 보면 한국에 두기에는 재능이 아까우니까 미국에 귀화할 생각이 없냐고 끈질기게 들러붙어요. 하필이면 이번에 또 마주쳤지 뭡니까.〉
들러붙는다는 여자가 있다는 말에 인유신은 긴장했지만,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현규하는 가볍게 웃었다.
〈스카우트하려고 눈이 뒤집혀 있을 뿐입니다. 뭣보다 유부녀고.〉
속마음을 들킨 인유신은 겸연쩍어져서 슬쩍 말문을 돌렸다.
〈제가 헌터들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올리비아 맥도웰은 규하 씨처럼 정부 소속 헌터 아니었어요 그럼 길드로 스카우트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미국은 공무 헌터가 열정적으로 스카우트 활동도 하나요〉
〈미국이나 한국이나 공무 헌터 연봉 적은 건 똑같은데 돈도 안 주는 일을 알아서 하는 사람은 없죠. 다만 맥도웰은 뭐랄까……. 국뽕이 좀 과다합니다. 지하실에 가둬 놓고 갈망, 부식, 열일곱 어쩌고 하면서 세뇌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니까요.〉
〈아하…….〉
들어 보니 애국심이 투철한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현규하의 재능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거였다. 그의 재능을 발휘할 곳은 한국이 아니라 세계 1위 초강대국인 미국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올리비아 맥도웰은 국뽕, 아니 애국심이 엄청 강한 분 맞죠”
“맞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맥도웰이 어쩌다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지 통 영문을 모르겠군.”
“여기에서는 세뇌가 안 된 거 아닐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규하 씨가 맥도웰은 지하실에서 국뽕 주입을 당한 거 같대요.”
의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해소할 수 있었다.
막 주차장에서 올라오다가 그들과 마주친 최진혁이 잘됐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뒤적거렸다.
“연락도 안 했는데 타이밍이 맞았군.”
새 휴대폰을 받은 인유신이 만지작거리면서 구경하는 사이에 공태성이 물었다.
“올리비아 맥도웰이 한국, 아니 조선으로 귀화한 건가”
“마주쳤나 보지 4년 전 임신한 걸 계기로 귀화한 헌터야.”
“음”
아이를 가진 게 귀화와 무슨 상관인 거지 공태성만이 아니라 인유신까지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자 최진혁이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조선 땅에 있어야 아이를 무사히 낳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지니까.”
그러더니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조소했다.
“현재 세계 인구가 5억은 되려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