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유신은 진땀을 흘렸다. ‘빠아악!’ 하고 울리는 소리로 보아서 육체 강화 스킬이 없었다면 분명히 팔이 부러졌을 것이다.
뒤에서 인유신을 바짝 당겨 안은 현규하가 이를 드러냈다.
“주인님에게 수작 걸지 말고 꺼져.”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 꼬맹이에게……. 하아, 됐다.”
공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길을 걸어갔다. 등 뒤의 현규하가 인유신의 정수리에 뺨을 부비적거렸다.
“유신 씨가 연상 취향이라고 계속 오해하고 있었다면 공태성의 손목을 아작 냈을 거예요.”
“유신이라고 했지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고생이 참 많군.”
최진혁이 툭 던진 한마디에 인유신은 어설픈 웃음으로 대답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갈수록 최진혁1의 반응과 비슷해진다고 느끼는 건 분명히 착각일 거다.
“헵타곤 한양 지부의 사택에 거처를 마련해 두었는데, 세 명이나 올 줄은 몰랐다.”
“유신 씨는 나랑 같이 살면 돼요.”
“그럼 잘됐고.”
차도 별로 막히지 않는 도로를 달려서 사택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 혹시 한옥이 아닐까 인유신은 두근두근 기대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파트였다.
복도식 아파트인데도 불구하고 복도가 절묘하게 꺾여 가구별로 나뉜 것과 다름없는 아파트의 5층으로 최진혁은 그들을 안내했다.
“마도공학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집과 가구의 사용법은 따로 정리해서 프린트해 두었다. 그리고 이건 현규하의 휴대폰. 신분증 역할도 겸하고 있으니까 잊어버리면 바로 말해. 유신이 너와 공태성의 휴대폰은 곧 준비해 주마.”
종이 뭉치와 휴대폰을 받은 현규하는 제일 중요한 문제를 요구했다.
“돈부터 줘요.”
마치 돈을 맡겨 놓은 사람 같은 태도에 최진혁의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휴대폰을 지갑처럼 쓸 수 있어.”
“오.”
“너희에게 입금되는 돈은 전부 세금이니까 낭비는 하지 마라.”
“숨 쉴 때마다 세금 내던 가련한 신세에서 남의 세금을 꽁으로 타 먹는 팔자가 되다니 개꿀이네요. 유신 씨, 우리 여기에서 평생 살까요 집세도 공짜 같은데.”
“…….”
현규하를 한 번 노려본 최진혁은 푹 쉬라는 인사를 인유신에게만 건넨 뒤에 집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인유신은 얼른 6세의 케이지를 거실의 콘솔 위에 올려 두었다. 살살 커버를 벗기니 아직도 코를 골면서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대신 8세가 손바닥으로 톡 뛰어들었다. 인유신은 손안에서 꼼지락거리는 8세를 조몰락거리며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하지 못했던 얘기를 꺼냈다.
“규하 씨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요.”
“그냥 이름이나 불러요. 우리 사이에 무슨 그 인간까지 예의를 챙겨 줘요.”
“그쵸.”
인유신도 딱히 스토얀을 대우하고 싶지는 않아서 바로 호칭을 낮췄다.
“스토얀이 규하 씨의 어머니에 대해 나중에 얘기를 하자고 했었잖아요. 어머니의 행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그런 말을 했던 게 아닐까요 어머니가 오시지 않았다면 굳이 이야기를 미룰 필요도 없을 거 같아서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현규하가 엷은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와 꼭 재회할 수 있길 바라며 인유신은 물었다.
“어머니를 뵙게 되면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요”
“으음, 옛날이라면 왜 날 버리고 갔냐고 물었을 거 같은데…….”
대답을 하기에 앞서 현규하는 인유신을 내려다보았다. 현소라는 스토얀을 위해 그를 낳았으면서도 정작 그를 버리고 홀로 떠나가 버렸다.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냐 물으면, 그의 안에 여전히 혼자 웅크리고 있는 어린 소년이 그렇다는 대답을 하겠지만. 그 두려움의 대상은 이제 어머니가 아니다.
현규하는 자신을 따라 이곳까지 서슴없이 동행한, 제 영혼의 주인을 눈에 담았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때로부터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있었겠지.
“먼저 유신 씨 소개부터 해야죠.”
포개진 입술이 서로의 숨결을 느릿하게 훑으며 작은 웃음이 되었다. 맞닿은 입술만이 아니라 심장까지 온통 녹아 버릴 듯한 달콤함에 취하여 현규하는 속삭였다.
“주인님 입술은 여기에서도 맛있네요.”
목덜미까지 빨개지게 하는 짓궂은 소리였으나 인유신은 그를 위해 변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조금 대담해지기로 했다.
“규, 규, 규하 씨 입술도요…….”
현규하가 묵직이 신음하며 얼굴을 감쌌다. 거친 호흡으로 어깨와 가슴까지 들썩거렸다.
“주인님 박력 개미쳤다, 진짜……. 왜 이렇게 멋있어……. 이렇게 된 거 나 벽쿵 한 번 해 줄래요”
“…….”
인유신은 입술만 뻐끔거렸다. 아니, 진짜 별말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입술 맛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창피해졌다. 그는 제 손바닥에 안긴 탓에 앞에서 숙인 현규하의 흉근에 눌리고 있던 8세를 보며 슬그머니 딴청을 피웠다.
“8세야.”
“삐야앙.”
그러고는 짐짓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집 구경하자!”
“꾸잇!”
“규하 씨도 빨리요!”
벽쿵을 해 달라는 걸 얼버무리고 후다닥 뛰어가는 인유신의 뒤를 따르며 현규하는 미소를 지었다. 마도공학이 발달한 세계든 신성력이 충만한 세계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었지만 예상대로 인유신이 받아들이는 세계는 자신과 달랐다.
똑같은 것을 보는데도 자신과 다른 풍경을 인식하는 그는 역시, 신비로운 사람이다. 새로운 문물을 신기해하는 그를 보노라면 이런 귀찮은 것들이 가득한 공간도 아주 괜찮았다.
인유신이 있는 풍경은 지루하지 않은 삶이었으며, 항상 새로운 세계였다.
집 구경을 하는 사이에 6세도 잠에서 깼다. 인간보다 후각이 훨씬 민감한 햄스터는 공기의 변화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주인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기에 케이지 밖의 변화는 신경 쓰지 않고 나태하게 늘어졌다. 자는 사이에 평행 세계도 하나 넘고, 게이트도 하나 넘어왔지만 아무래도 좋을 일들이었다.
한편 현규하는 가구들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인유신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즐거웠다. 신혼집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니 더 즐거워졌다.
“자세한 내용은 까먹었는데 문명도 수렴 진화(계통적으로 다른 종이 환경에 적응하며 비슷하게 진화한 것)의 특성이 나타난다고 하잖아요. 마도공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생각보다 큰 차이는 없는 거 같아요.”
“확실히 그렇네요. 휴대폰만 해도 세모나 네모가 아닌 직사각형이 한 손으로 잡기 편한 형태니까 이 방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몇 세기 전까지는 비슷한 문명 수준이었으니 말도 안 될 정도로 큰 격차는 없을 거 같고요.”
“SF 영화를 보면 막 워치에서 홀로그램이 나와서 서로 통화도 하고 그러던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도 없다는 거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 그리고 걱정을 담아 현규하의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길드장님은 아직도 연락이 없으시죠 안나의 약은 무사히 받으셨을까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으니까 내일까지는 기다려 보죠. 어쩌면 약을 받자마자 장범에게 전해 주기 위해 회령으로 출발했을지도 모르고요.”
저녁 식사는 최진혁이 배달해 준 한식이었다. 회령에서 휑한 논밭을 목격했던 인유신은 식량 생산이 거의 안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예상외로 식단은 부족하지 않았다.
“역시 밥상에 쌀밥과 김치가 빠지지 않네요.”
“혈관에 김칫국물이 흐르는 유전자잖아요.”
낯선 반찬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한국인 입맛이었으므로 인유신은 거부감 없이 맛있게 잘 먹었다. 8세도 입과 털에 김칫국을 묻혀 가며 접시를 찹찹 핥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소파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조선이 유지되고 있는지 꽤 궁금했다.
다행히 한글이 통용되고 있었다. 세종대왕님 만세.
요즘 국뽕이 자주 차는 인유신은 슬쩍 현규하를 곁눈질했다. 현규하는 여기에 태어났어도 지금처럼 국위 선양으로 국뽕을 채워 주는 헌터가 되었겠지 뿌듯함을 느끼면서 화면을 톡톡 터치했다.
옆에 앉아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은 현규하가 시선을 지그시 아래로 내렸다.
“못 보던 글자가 있는데요.”
“중세 국어로부터 언어가 변하는 게 좀 달랐나 봐요.”
시대가 흐르면서 사라진 한글 자모의 변화가 인유신이 알던 한글과 달랐다. 스토야가 언어를 습득하게 해 준 탓에 듣고 말하는 건 평소 쓰던 말과 같았지만, 아마 실제로는 표준어와 사투리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한글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으므로 어떻게든 눈치로 때려 맞히면서 검색해 봤다.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낯선 인터넷을 이리저리 찾아보던 인유신이 놀라움을 담아 입을 벌렸다.
“명나라가 없는데요”
원나라가 멸망한 뒤의 혼란기가 빠르게 평정된 건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이라는 걸물이 존재했던 탓이 컸다. 한데 그 주원장이 역사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통째로 사라졌고, 따라서 명나라도 없었다.
“젊었을 때 거지였으니까 그때 재수가 없어서 죽었던 거 아닐까요”
“어, 그러게요.”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었으니까 굶어 죽었을 수도 있고요.”
현규하의 추측을 듣다 보니 그럴듯했다. 오히려 인유신의 세계에서 무사히 잘 살아남아 명나라까지 건국했다는 게 기적처럼 보였다.
주원장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중국 대륙의 혼란기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여러 인물이 나라를 세우고 칭제했으나 누구도 중국 대륙을 통일하지 못했다.
그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오이라트족(몽골계 부족. 명나라를 침략하여 황제까지 포로로 잡았던 적이 있다.)까지 남하했다. 거기에 세력을 키운 여진족 또한 이 세계에서도 쌓은 산해관(만리장성의 관문. 유목민족의 침략을 막는 최고 요충지.)을 넘어 혼란에 합세했다.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그런 도중에 게이트가 열리고, 전 지구적인 혼란기에 접어든 탓에 그 개판이 수백 년 동안 수습되지 못한 모양이다.
“예쁘게 쪼개졌네요.”
분할된 현재의 중국 지도를 보며 현규하는 중얼거렸고, 인유신도 얼떨결에 호응했다. 예쁘다는 말을 할 때 현규하의 시선이 힐끗 자신의 입술을 향했다는 것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한편 원나라는 멸망하기 전 한반도에 선물을 하나 주고 갔다. 태풍이 불지 않는 적절한 시기에 일본 원정을 떠난 여원연합군은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겪지 않았다. 대신 여원연합군의 말발굽 아래에 규슈가 초토화되었다.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가마쿠라 막부의 권위는 추락하고 내전이 발발했다.
그렇게 양쪽이 개판이 났으니 고려는 상대적으로 덜 막장처럼 여겨졌다. 또한 ‘우리는 저렇게 되지 말자.’라는 반면교사의 교훈도 얻었다. 이성계는 비교적 온건하게 왕씨로부터 선위를 받았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이유도 딱히 없었다.
인유신은 괜히 개성부심을 느꼈다. 경주 같은 천년의 고도 개성. 멋지다……!
뿌듯한 마음 속에 검색한 글들을 읽어 내렸다.
“오, 최초로 게이트가 열린 게 17세기래요.”
“여기는 엄청 일찍 열렸군요.”
“60년 전에 카타스트로피를 맞은 우리도 그렇게 고생했는데 17세기부터 게이트나 마수가 나왔다면 장난 아니었을 거 같아요.”
나라 간의 교류까지 단절되는 길고도 극심한 혼란이 전 세계를 덮쳤다. 던전 브레이크가 몇 개만 터져도 약소한 나라는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을 터였다. 하지만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나라 간의 교류가 끊어진다는 건, 식민지와 본국의 연결 고리도 끊어진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게이트가 열리는 만큼 자원을 획득할 수 있으며 각성자는 인구에 비례한다. 기존의 빈국이라 하여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자도생하면서 어떻게든 잘 살아갔다는데요”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국가 간의 교류나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으나, 대규모 해외 원정이나 전 세계적인 전쟁이 발발하는 일은 없었다. 그만큼 큰 전쟁을 벌이려면 더 많은 각성자들을 군대로 차출해야 할 테고, 그 말은 곧 자국의 게이트에 대처하지 못한다는 의미였으니.
광활한 영토와 자원을 가진 미국은 이아드에서도 우리가 제일 잘났다는 진리를 각성해서 강대국이 된 모양이지만.
“그 덕분에 제국주의가 확장되지 않은 건 부럽네요. 앗, 정약용도 각성자였대요.”
신나게 재잘거리는 인유신의 발긋한 입술만 계속 보고 있던 현규하는 타이밍 늦게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휴대폰 화면에는 정약용의 연구와 발명이 현재의 마도공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이에 비견되는 당대의 천재로 거론되는 사람이 왕족 이산이었다.
“이산이면 정조 아니에요 정조가 왜 왕이 안 된 거지…….”
현규하의 시선이 자꾸만 어디로 쏠리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인유신은 열심히 화면만 터치했다. 내란으로 인해 일본의 역사가 바뀌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지 않은 탓에 런조, 아니 선조도 명군으로 남았고 그 이후 즉위한 광해군의 실정도 조선이 버틸 만한 체급이 되었던 듯했다.
“아하, 그래서 광해군이 폐위되지 않고 후손이 계속 왕으로…….”
현규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인유신의 입술을 덮치고 말았다. 미처 입술 밖으로 흐르지 못한 음성이 현규하의 혓바닥에 감겨 목 안으로 삼켜졌다.
즐겁게 재잘대던 입술은 박력이 넘치는 그의 모습처럼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