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214)
  • 담벼락을 지나자 색색의 향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게 만개한 꽃들이었다.

    길거리의 가로수들이 전부 인조목이라는 얘기를 최진혁에게 들었기에 순간 조화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짙게 풍기는 생생한 향기는 절대 가짜로 꾸며 내지 못할 터였다.

    그리고, 화단 앞에 서 있는 청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허리에 닿을 듯 긴 아마빛의 머리칼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초목이 움트기 어려운 세상에서 꽃들을 만개하게 한 청년이 서서히 등을 돌렸다.

    최진혁의 반응이나 스토야의 외모로 미루어 보아 현규하와 굉장히 닮았으리란 건 짐작했었다. 그래서 현규하의 미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외모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앞마당까지 마중을 나온 청년을 본 순간, 그건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안녕, 아들.”

    나긋한 음성이 언뜻 상냥하게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인유신은 제자리에 우뚝 멈추고 말았다.

    동공이 확장된다. 숨이 거칠게 차오른다.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었으며 동시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기도 했다. 인유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눈앞의 저 청년에게 격렬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크르스니크…….’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크르스니크라는 이름을 이으며 태어났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이 정체성이 그를 규정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뱀파이어를 앞에 두니 알겠다. 영혼이 쥐어짜이는 듯한 극렬한 거부감으로 호흡까지 괴로웠다.

    사람에게 뚜렷한 적의를 품은 적이 없던 인유신이다. 영혼과 본능의 괴리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피가 맺히리만큼 짓깨물던 그의 입술을 보듬는 손끝이 있었다.

    “유신 씨.”

    현규하가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어깨와 등허리를 쓸었다.

    그의 상태가 급변한 이유가 뭔지 깨달은 건 현규하도 마찬가지였다. 현규하도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던 터라 당혹했으나 동요를 침착하게 숨기며 인유신을 토닥거렸다.

    “내가 있잖아요, 괜찮아요.”

    “……네.”

    입술을 매만지는 현규하의 손가락에 맺힌 숨을 뱉으며 인유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네.”

    제 곁에 있는 그의 존재감을 느끼자 훨씬 상태가 괜찮아졌다.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고 어느 정도 평정을 유지할 정도는 되었다.

    “흐음”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청년이 눈가를 접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묘한 눈빛으로 보는 그에게 들으라는 듯이 현규하가 장황하게 말했다.

    “나랑 거푸집에서 찍어 낸 것처럼 똑 닮은 주제에 유신 씨만큼이나 어려 보이는 얼굴이니까 징그러워서 충격을 받았다는 건 이해해요. 솔직히 나도 좀 놀랐거든요. 그치만 봐요.”

    그러면서 현규하는 앞에서 본인이 듣든 말든 요모조모 품평을 늘어놓았다.

    “뒤로 묶은 머리카락이 엄청 길다는 차이점도 있지만, 몸매도 얼굴도 내가 훨씬 더 잘생겼잖아요, 안 그래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체적으로 넓은 어깨에 허리도 잘록하게 다듬어진 몸매지만, 둔하지 않고 날렵하다는 느낌이 드는 현규하와 달랐다. 마른 체형의 그는 얼굴선도 얄팍하여 훨씬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눈높이도 현규하에 비해 약간 낮았고.

    현규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완전히 평정심을 되찾았으나 동시에 상황을 깨달으면서 조금 불안해졌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면 어쩌지……’

    대놓고 얼굴을 품평했으니 언짢기도 할 것이다.

    걱정스레 슬쩍 올린 시선이 물끄러미 응시하는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주 익숙한 색이지만, 동시에 아주 낯설다.

    오싹하리만큼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눈빛이 인유신을 꿰뚫었다.

    아까와는 의미가 다른 긴장감이 차올라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첫 대면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어서 제대로 보는 게 늦었지만, 청년의 복장은 한복이었다. 그것도 최진혁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현대적으로 변한 두루마기가 아니라 사극에서나 봤던 도포.

    ‘대체 왜 입기도 까다로운 옷을 평상복으로……’

    고택이란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한옥에서 한복을 입은 외국인이 나왔다는 의외로움은 그가 입은 도포에 오히려 묻혔다.

    인유신을 유심히 바라보던 시선은 곧 거두어져 현규하에게로 움직였다. 자식을 산 제물로 바치려 한다는 게 거짓인 것처럼, 스토얀은 온화한 웃음으로 아들을 맞았다.

    “아들을 낳으면 소라가 이름을 규하라고 짓기로 했거든. 네 이름이 규하 맞니”

    “맞는데요.”

    현규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인유신을 오싹하게 하는 투명한 시선이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현규하를 훑었다. 어느 쪽이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면하는 부자 관계라고 여길 만한 언행은 아니었다.

    “재미있는 모습을 보이던데,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니 네 짝인 크르스니크야”

    “뭔 쌉소리예요. 내 주인님인데.”

    초면의 사람에게도 태연하게 내뱉는 ‘주인님’을 듣고 인유신이 민망해서 얼굴을 붉히지 않은 건 최초였다. 긴장감과 오싹함이 창피함을 이긴 인유신은 책잡히지 않게끔 예의 있게 인사를 했다.

    “인유신이라고 합니다.”

    “호오.”

    스토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다시금 관찰했다. 마치 영혼의 표면을 한 꺼풀 벗겨 내는 듯한 감각에 인유신은 직감했다. 이 사람, 역시 상태창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상태창에 나란히 있었던 히든 특성, 뱀파이어의 천적이라는 담피르와 크르스니크는 스토야가 보이지 않게끔 감추어 두었다. 스토얀도 감추어진 특성까지 읽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상태창에서 시선을 뗀 스토얀의 눈빛이 한결 예리해졌다.

    “네 주인님이라서 같이 온 건 그렇다 쳐도, 이상하네. 너는 왜 담피르가 아니지 소라가 내 자식을 낳았다면 분명히 담피르가 태어나야 하는데 내 아들 맞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아버지 정자가 썩었나 보죠.”

    심드렁한 그 대답은 잔뜩 긴장하고 있던 인유신만이 아니라 옆에서 대기 중이던 최진혁까지 식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현규하의 입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해합니다. 정자는 나이가 들수록 썩는데 아버지는 나이도 까먹을 정도로 살았을 테니 썩어 문드러질 만하죠. 나같이 잘난 아들을 낳은 건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네요.”

    “…….”

    “내 정자는 매우 건강하고 활기차니까 유신 씨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어, 네, 네…….”

    달리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인유신은 멍하게 대답했고, 최진혁의 시선은 최진혁1이 현규하를 보는 것과 비슷한 눈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뚫어지게 아들을 보던 스토얀은 이내 명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렇기도 하겠네. 요즘 애들 농담은 따라가기가 어려워.”

    “농담 아닌데요.”

    “알겠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먼 길 오느라 피곤하지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쉬렴.”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는데요.”

    “응”

    “어머니는 여기에 왔어요”

    스토얀은 흔들림 없는 미소를 지었다. 허를 찔렸다거나, 놀라움을 숨기는 반응 같은 건 전혀 아니었다.

    “그 얘기도 다음에 하자꾸나.”

    마당을 나가는 세 사람의 등을 보며 스토얀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라. 우리 아들은 너도 나도 하나도 안 닮았는걸 대체 저 말본새는 누구를 닮은 걸까. 적어도 나는 부모님이 우리 남매를 팔아 치우려 했을 때도 저랬던 적이 없거든 설마 내 아들이 아닌가”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의 혼혈이 담피르가 아닐 리가 없다. 그렇지만 자신을 쏙 빼닮은 외모에 뱀파이어 특질까지 더해졌으니 그의 아들이라는 것도 확실했다.

    스토얀은 아까 읽었던 아들의 서번트 태블릿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육체와 능력은 흡족할 만큼 훌륭하다. 자신의 영역 안에 있었기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 전부 읽어 낼 수 있었던 나머지 세 사람만이 아니라 그가 알던 모든 각성자와 비교해도 월등할 만큼.

    한데도 담피르라는 특성만이 발현되지 않았다는 것은…….

    “나를 뱀파이어로 만든 신이 네쿠라툴이 아니라 둠네제울인 탓일까.”

    뱀파이어는 네쿠라툴에 의해서 비롯되는 종족이다. 한데 둠네제울이 손을 댔으니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문제가 되었음 직한 이유는 몇 가지 더 있었다.

    현소라가 임신한 채로 파계 스킬을 써서 세계를 넘나들었던 것. 임신했을 때 온갖 신의 축복을 받은 것. 신성력이 자연스러운 세계에서 하루아침에 신이 없는 세계로 가게 된 것.

    배 속의 태아에게 영향을 끼쳐 뭔가가 변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네쿠라툴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확실할 테지만.

    ‘네쿠라툴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언제부터인지 네쿠라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이아드에서 떠나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멸망하는 세계를 슬퍼하며 얽매인 신들이 이상한 것이지.

    아아.

    스토얀은 소리 내어 웃었다.

    종말로 추락하는 세계란 것은, 참으로 가엽구나.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태성이 휴대폰과 유사한 단말기로부터 시선을 올렸다. 원래 무슨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행에게는 휴대폰이라고 번역되어 들리는 기기였다.

    “아버지에게 인사는 잘하고 왔냐고 물을 타이밍인데, 얼굴이 영 아니군.”

    “그냥…… 규하 씨가 규하 씨다운 말을 했을 뿐이에요.”

    “어쩐지 최진혁의 표정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더라니.”

    공태성은 빠르게 납득하고는 최진혁에게 받았던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스마트폰과 비슷한 기능을 지닌 단말기는 네트워크 통신망의 검색도 물론 가능했다.

    “부회장님은 찾으셨어요”

    “민 회장은 여기에서도 사업가로 생존해 있던데 자식은 하나도 없더군.”

    그 말을 하는 공태성의 표정은 미묘했다. 민끝녀가 이아드에 없어서 다행이라 여기는 듯하기도 하고, 아쉬워하는 듯하기도 한 느낌이었다.

    “그 노인네, 뒈지지도 않고 더럽게 명……. 영감님이 꽤 장수하시는데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나이가 아흔은 넘지 않나”

    무심코 툭 내뱉던 현규하는 인유신이 옆에 있다는 걸 자각하고는 얼른 단어를 순화했다.

    “민 회장의 조카는”

    “안 태어났는지 일찍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없다.”

    “조카가 없으면 인공 수정으로 아들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팔자에 아들이 없나 보군.”

    “뭐, 배아를 딸로 조작하게 한 게 전부 회장 자리 노리던 조카 짓이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대화를 통해 인유신이 재벌가의 비밀을 알고 놀라는 사이에, 최진혁도 운전석에 타며 관심을 드러냈다.

    “사업하는 민 회장이라면 민노식”

    “아는 사람인가”

    “업무가 업무다 보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지. 평가는 별로 안 좋아.”

    바로 차를 출발하는 최진혁에게 인유신이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의 말에 다시 생각이 났다.

    “헵타곤 소속이라고 하셨죠 뭐 하시는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솔직히 이름이 펜타곤 짝퉁처럼 들렸다.

    “펜타곤 짭이다.”

    “앗.”

    “국방부로서의 역할도 하고, 나라 안보도 지키고, 치안 유지도 하고, 각성한 헌터들 관리도 하고, 마수나 게이트도 정리하고……. 국가에서 무력이 필요한 거라면 거의 다 다룬다고 보면 돼.”

    인유신은 혀를 내둘렀다. 국가 기관 하나에 이렇게 몰빵을 해도 되는 걸까 공태성도 비슷한 의문을 가진 모양이었다.

    “일개 기관의 힘이 너무 비대하지 않나”

    “그래 봤자 암중으로 최고 권력자는 스토얀이니까.”

    스토얀이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건 아니지만, 국왕과 총리를 비롯한 사회 정상의 권력자들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최진혁은 설명했다. 최진혁은 헵타곤 한양 지부에서 그와 소통하는 담당자로서 알고 있는 거였고.

    시가지로 접어든 최진혁은 먼저 공태성부터 준의 신전 근처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인도에 선 그에게 휴대폰에 지도까지 띄워서 위치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공태성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는 상냥함에서 인유신은 아까와는 다른 오싹함을 느꼈다. 최진혁1이 이 얘기를 들었다가는 치욕스러운 기억을 지우겠다며 당장 공태성을 죽이러 갈 거 같았다.

    “안나의 병을 치료할 약을 꼭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고맙다.”

    걱정스럽게 말하는 인유신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무심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한 공태성의 손을 현규하가 매섭게 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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