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이아드를 떠나 있던 솜노로스는 정확히 어떤 도시를 가야 준의 신전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애초에 한반도까지 관심을 기울인 적도 없었다고 했다. 지하에서만 살았던 8세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자기 세계로 넘어와서도 변함없이 쓸모가 없는 놈이네요.”
“그치만 안나를 치료할 실마리는 주었잖아요.”
“맞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몫을 다했죠. 기특하군요.”
공태성은 인유신의 말 한마디에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하는 현규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왜 뭐 왜.”
“아니……. 어쩌면 이런 천생연분이 있나 싶어서 말이다.”
공태성과 민끝녀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했던 인유신은 괜히 뜨끔했다.
“아무튼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죠. 현재 이아드의 역사나 문명이 어떤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말이나 던전의 환영을 참고해 보자면 적어도 근세까지는 우리 세계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상태창을 서번트 태블릿이라는 영어로 부르는 걸 보면 미국이 여기서도 존나 잘 나가고 있다는 거겠죠.”
“그럼 역시 서울에 신전이 있을까요”
“꼭 서울이 아니더라도 대도시로 발달할 기본 조건은 세계 어디나 비슷비슷하니까요.”
“아하.”
하긴 그랬다. 강을 끼고 있거나, 비옥한 평야거나, 해안가거나. 한반도 지형이야 대충 알고 있으니 찾아보면 될 것이다. 설마 아프가니스탄까지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현규하의 얘기를 듣다 보면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것도 명료하게 정리되어서 신기했다. 자신감에 차 있는 언행 때문일까.
가만히 듣던 공태성이 다소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시선을 돌렸다.
“거기까지 너희가 동행할 필요는 없으니 하산하면 찢어지도록 하지. 이건 내 일이다.”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걸까…….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공태성의 말이 맞긴 하지만……. 인유신은 현규하가 어떤 대답을 할지 염려되어서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현규하의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이 패었다.
“내 스케줄을 왜 네가 이래라저래라 지랄이야. 어차피 루마니아까지 걸어서 가야 하는 거 서울 찍고 가나 그냥 가나 별 차이 없어.”
말이야 험하지만 민안나를 치료할 방법을 같이 찾아 주겠다는 게 아닌가. 역시 현규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인유신은 뿌듯해졌고 공태성은 꽤나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나저나 루마니아까지 걸어서 가는 건 확정인 걸까…….
‘페가수스 말고 기차 같은 건 없을까 있더라도 무슨 돈으로 표를 끊지 알바라도 해야 하나 신분증도 없는데 어쩌지 여기에도 현금 박치기 해 주는 알바가 있을까 국경은 어떻게 넘고’
인유신의 머릿속에 무수한 물음표만이 떠돌아다니고 있을 때 일행은 마침내 오봉산의 산기슭으로 내려왔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걸어서 루마니아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마중을 나온 사람이 있었다.
“게이트 너머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몹시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들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목소리에 인유신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최 팀장님!”
“네가 어떻게……”
인유신만이 아니라 공태성마저 허를 찔린 듯한 신음을 냈다. 헤어스타일이 좀 다르긴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분명히 최진혁이었다. 심지어 늘 캐주얼한 차림이던 사람이 정장까지 입고 있었다. 두루마기가 현대적으로 변형된 듯한 느낌의 정장이었다.
남자는 얼굴을 갸웃했다.
“제 이름이 최진혁은 맞습니다만……. 어떻게 아셨죠”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안 나와서 입술만 뻐끔거리는 인유신의 귓가에 현규하가 속닥거렸다.
“우리 세계에 최진혁이 있던 것처럼 이쪽 세계에도 최진혁이 있을 수도 있죠.”
“어, 어어……. 그, 그러게요.”
최진혁도 뒤늦게 아하, 하며 상황을 깨달은 기색이었다.
“게이트 너머에도 비슷한 세상이 있다더니, 그쪽 세상에 저와 같은 사람이 있었나 보군요. 아무튼 다시 인사드립니다. 헵타곤의 최진혁입니다.”
“하아.”
공태성이 한숨을 흘리며 얼굴을 감쌌다. 무척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인유신도 이해했다. 최진혁과 알게 된 지 몇 달 안 된 자신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교류가 깊었던 공태성은 더하겠지.
“저 자식이 나한테 존댓말을 쓰다니 역겨워서 속이 뒤집힐 거 같군.”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웠나 보다.
유일하게 평정을 잃지 않고 있던 현규하가 태연히 말을 붙였다.
“우리가 여기에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스토얀이 전능한 존재는 아니지만 대충 전지하기는 하니까요. 어떻게, 가시겠습니까”
“강요하는 거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저와 동행하지 않으면 이곳에 무지한 분들이니 앞으로 힘드시겠죠.”
현규하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인유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낮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으음……. 최 팀장님, 아니 저분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저희는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동의한다. 나중에 정말 루마니아까지 걸어서 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보는 최대한 뽑아내야겠지.”
짧은 속닥거림으로 의견 교환이 끝나고, 현규하가 턱짓했다.
“안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