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0/214)

“음, 딱히 명계에 붙잡힌 유령이 되었다는 느낌은 없는데요”

“그럼 저도…….”

인유신도 열매를 조금 뜯어서 먹었다. 만약 스토야에게 속은 거라면 그냥 현규하와 같이 땅 밑에서 살면 되겠지.

석류를 먹으라는 강요도 못 하고 조마조마하게 보던 스토야가 눈을 반짝 빛냈다.

“믿어 줘서 고마워! 그다음으로는 서번트 태블릿을 띄워 줄래”

“그건 또 뭐예요”

“으, 거기서는 또 인간들이 부르는 말이 달라”

“상태창이다.”

팔짱까지 끼고 잠자코 지켜보던 공태성이 설명했다.

“고래가 자기 세계에서는 인간들이 상태창을 서번트 태블릿이라 한다더군.”

“아하.”

상태창을 띄우는 거야 어려운 것 없으니 불러냈던 인유신은 조금 놀랐다. 깨져 있던 글자가 말끔하게 보이고 있었다. 새롭게 추가된 특성과 함께.

[히든 특성]

- 크르스니크

- ■■■■■ ■■■ ■■■■■■■ 태생

현규하의 상태창도 슬쩍 보니 마찬가지였다.

[히든 특성]

- 뱀파이어 특질

- ■■■■■ ■■■ ■■■■■■■와 이아드의 혼성

- 담피르

- 왕의 사생아

‘철의 시대는 더 길어졌네. 글자가 깨지면서 어원인 그리스어로 표기되고 있는 건가 봐.’

인유신은 이아드로 오기 전에 현규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름을 대대로 승계하며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사냥꾼이라고 했던가. 정말 제 상태창에 드러나 있는 걸 보니 왠지 신기했다.

한편 스토야는 두 사람이 상태창을 띄우자마자 팔을 죽 뻗었다. 마치 타인의 상태창이 보이는 것처럼 팔을 내민 그녀의 손이 허공에 뜬 글자의 나열에 닿았다.

스토야는 그대로 손을 문질렀다. 지우개로 지워 내는 것처럼.

히든 특성에서 크르스니크가 사라졌다.

[히든 특성]

- ■■■■■ ■■■ ■■■■■■■ 태생

현규하의 상태창도 마찬가지였다.

[히든 특성]

- 뱀파이어 특질

- ■■■■■ ■■■ ■■■■■■■와 이아드의 혼성

- 왕의 사생아

현규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쪽은 특성까지 없앨 수 있는 존재였어요”

“에이, 그게 가능하면 내가 신이지, 겨우 왕이겠어 섭리를 속여서 임시로 명계의 주민으로 만든 뒤에 특성을 보지 못하도록 감춘 것뿐이야. 인간의 서번트 태블릿은 내가 손대지 못하지만 명계의 주민에게는 가능하거든. 스토얀이 지상에서 온갖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나도 지하에서는 어지간한 건 다 할 수 있어.”

“꿍!”

어느 틈에 저쪽에서 난쟁이, 피티치들과 수다를 떨던 8세도 그 말이 맞는다는 듯이 호응했다.

“칼리칸트자로스구나 낯선 곳에서 정말 고생이 많았어. 이 아이들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네 덕분이야. 참 장해.”

“피요삐요!”

현규하가 허리를 굽히며 인유신의 귀에 속닥거렸다.

“유신 씨 히든 특성도 감추어졌어요”

“네. 안 보이는 게 나은 거죠”

“그렇죠. 특성을 아버지 눈에서 감추려고 팔놈이 수작을 부리게 했나 보네요.”

예상외의 성과였다. 적어도 그가 크르스니크라는 걸 알아챈 스토얀이 인유신을 죽이려 하는 일은 미리 방지한 셈이다.

그리고 스토야가 꽤 많은 공을 들여서 이런 일까지 하고 있다는 건, 분명히…….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거나 대립하는 거겠지.’

어느 쪽이든 좋았다. 그녀가 자신을 이용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라 하여도 목표가 일치하는 한 기꺼이 이용당해 줄 수 있었다.

그 전에 한 가지 알아야 할 문제가 있었다.

“내 어머니는 여기로 왔어요”

시종 활기차던 스토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미안해. 지상에서 벌어진 일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소라가 이아드에 도착한 뒤 죽었다면 내가 알 수 있는데, 지금까지 감지한 적은 없어.”

“뭐, 그렇다면 오지도 못했거나 살아 있거나, 둘 중 하나겠네요.”

“규하.”

스토야가 그녀에게는 낯선 발음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현규하를 올려다보았다.

“소라를 원망하니”

“모르겠어요.”

“네가 소라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라는 아마도…….”

뭔가 말을 할 낌새이던 스토야는 결국 입을 우물거리며 말을 삼켰다.

“너에게 할 말이 참 많은데 시간이 없네. 지하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면 스토얀이 의심할 거야. 5분이 지났으니까 얼른 올라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연락할게.”

피티치들 사이에 있던 8세가 후다닥 돌아왔다. 인유신은 어깨에 올라온 8세의 작은 몸을 쓰다듬었다.

“네 고향이고, 친구들도 많지 남고 싶으면 여기에 있어도 돼.”

“찌우우!”

8세는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고 펄쩍 뛸 듯 놀라며 인유신이 입은 티셔츠의 목깃을 붙잡았다. 놓고 가더라도 달라붙겠다는 결연한 의지에 인유신은 그냥 실없이 웃었다.

일행을 지상으로 보내기 전, 스토야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습득된 언어는 듣고 말하는 대화에만 통용되는 것이기에, 인유신과 공태성은 그녀의 입술이 전하려는 말을 읽을 수 없었다.

스토얀을 믿지 마.

현규하는 피식 실소하며 어깨만 으쓱했다. 자식을 산 제물로 바치려 하는 아버지를 신뢰할 만큼 호구 새끼는 아니었다.

  

올라온 지상은 불과 몇 분 전까지 보았던 오봉산과 비슷했다. 다만 한여름인데도 태양의 열기가 한결 덜했으며, 빽빽하던 수림은 나무들이 듬성듬성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인유신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래까지 퍼석퍼석한 거 같았다.

공태성이 낮게 중얼거렸다.

“생기가 쇠잔하여 서서히 종말에 가까워져 가는 세상이라는 건가”

“아직은 살 만한 거 같은데.”

현규하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새 떼가 낮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우선 솜노로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남은 시간  00분 00초]

그렇게 1시간이 지났는데도 통로는 닫히지 않고 있었다. 솜노로스가 나타난 건 그로부터도 몇 분이 더 지났을 때였다.

고래한테 이런 묘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벌겋게 충혈된 눈알이 퉁퉁 부어 있었다.

『왕자님. 데려다줘서 정말 고마워요. 대홍수에 떠밀려 간 것도 모자라 세계의 틈으로 빠져 버린 이런 똥멍청이를 다들 걱정하면서 기다리고 있었…….』

현규하는 이번에도 심드렁하게 솜노로스의 감격을 잘라 냈다.

“그래서, 안나 약은”

솜노로스가 텔레파시를 전하기 전에 인유신이 넌지시 지적했다.

“여기에서는 사투리를 안 써도 말이 통하는 거 아니에요”

“아, 맞다!”

화들짝 놀라면서 음성을 발화한 솜노로스가 지느러미를 파다닥 흔들며 인유신의 주변을 돌았다.

“역시 애인님은 엄청 똑똑해!”

이아드로 돌아와서도 생존 본능을 발휘하여 인유신부터 추켜세운 솜노로스가 초조한 표정의 공태성에게 말했다.

“야릴로(초목과 봄의 신) 님이 알려 주셨는데 안나의 피에 준 님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해.”

“준”

인유신만이 아니라 현규하도 처음 듣는 생경한 신이었다. 딸의 신성력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종교며 신을 조사했던 공태성만이 침음하며 이마를 감쌌다.

“……8세기 무렵이었던가. 아프가니스탄 남쪽에 있던 준빌 왕조에서 섬기던 태양신이다. 그렇게 마이너한 신이었으니 아무리 찾아도 실마리가 안 잡혔던 거군.”

“준 님의 신앙이 번창한 세계가 있었는데 인간들이 너무 타락해서 심판을 내리셨던 적이 있대. 침식 게이트가 거기였나 봐.”

“해약은 제조할 수 있는 건가”

“준 님은 오래전에 이아드를 떠나셨지만 사제들에게 힘을 나누어 주고 가셨대. 대도시에 가면 아직 준 님을 섬기는 신전이 있다니까 거길 찾아가면 될 거야.”

수년간 필사적으로 찾고 찾던 치료법이 이제야 보였다. 공태성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했고 옆에 있던 인유신은 반사적으로 그를 부축……하려다가, 현규하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현규하가 팔을 붙잡아 주자 공태성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무슨 짓이지”

현규하의 인상도 만만치 않게 썩어 있었다.

“유신 씨의 손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내 손을 더럽히는 게 낫잖아.”

“놔.”

바로 손을 뗀 현규하는 불쾌한 낯빛으로 손을 탁탁 털었고, 공태성도 그가 붙잡았던 팔을 탁탁 털었다. 나잇값을 못 하는 건 현규하보다 9살이나 더 많은 공태성이 아닐까, 하고 인유신은 생각했다. 현규하는 어쨌든 20대니까!

“나는 여기서 문을 계속 잡으면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얼른 약 구해 와.”

솜노로스의 배웅을 받으며 세 사람은 산길을 내려갔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가는 게 훨씬 더 위험하다. 덕분에 현규하의 옆구리에 끼인 하산길은 안락했다.

“규하 씨 아버지는 루마니아에 있는 거죠”

“거기 아니면 세르비아에 있지 않을까요 이쪽 세계도 세르비아와 루마니아가 통합되었는지 모르겠지만요.”

“저희 루마니아까지는 어떻게 가요”

“걸어서……”

인유신은 아연히 현규하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조금 계면쩍은 기색으로 뒷덜미를 문질렀다.

“여기에서는 기름을 못 구할지도 모르니까 바이크는 안 가져왔어요. 아니면 뭐……. 지나가는 야생마라도 조련해서 이아드는 신비가 존재하는 세계니까 페가수스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

“극한의 서바이벌이군.”

오지 여행은 박승기에게 핑계로 댄 말이었는데, 어쩌면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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