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214)
  • 15.

    창세신 둠네제울과 악신 네쿠라툴은 최초의 인간 커프크니를 함께 만들었다.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였다. 커프크니는 탐욕스럽고 잔인했다.

    다음으로 둠네제울은 거인 우리아쉬와 난쟁이 피티치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신성한 숨결을 불어 넣어 만든 것이 현재의 인류였다.

    그들은 한데 어우러져 지냈으나 언젠가부터 우리아쉬는 커프크니 이상으로 난폭해졌다. 이에 물든 인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둠네제울은 포악해진 우리아쉬를 대홍수로 심판하고, 순수한 피티치를 땅 밑의 세상으로 보내어 평화롭게 살도록 했다.

    땅 위에는 이제 ‘인간’만이 남았다. 우리아쉬에게 물든 자는 대홍수 때 함께 재정을 당하고 의로운 이만이 남은 인간들.

    네쿠라툴은 생각했다. 나도 새로운 인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흙으로 아무리 인간의 형체를 빚어도 네쿠라툴은 둠네제울처럼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을 수 없었다. 이에 네쿠라툴은 ‘생명의 숨결’을 둠네제울이 빚은 인간으로부터 갈취하기로 했다.

    인간을 흡혈하고 인간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뱀파이어의 탄생이었다.

    ‘생명’이 없는 뱀파이어는 늙지도 죽지도 않으나, 흡혈 외의 방법으로는 동족을 늘릴 수 없다. 뱀파이어 간에는 성관계를 가져도 아이가 잉태되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친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인간이 필요했다.

    네쿠라툴이 최초로 빚은 뱀파이어, 진조도 인간 여성으로부터 아이를 얻었다.

    그들이 진실로 사랑에 빠졌는지, 진조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랑에 빠진 척 현혹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 그들 사이에서 나온 아들에게는 제 아버지를 악신이 빚었으며 그가 창세신의 것을 탐하는 뱀파이어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청년은 뱀파이어의 사회에도, 인간의 사회에도 속할 수 없었다. 뱀파이어는 반쪽짜리 잡종을 조롱했으며, 인간은 삿된 피를 타고난 악마의 자식을 혐오했다. 청년에게는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 어머니. 내 어머니.

    그를 낳으며 건강을 크게 해친 어머니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청년뿐이었다. 어머니가 필요로 하는 한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청년은 맹세했다. 오직 그 사랑만이 청년을 지탱했다.

    그리고 청년은 보았다. 죽은 어머니의 시체에서 게걸스럽게 심장을 뜯어먹고 피를 흡혈하는 검은 짐승을. 그 짐승은 그의 아버지였다.

    〈안 죽고 살아 있었던가〉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진조는 첫인사를 건넸고, 청년은 울부짖으며 그를 공격했다. 사지가 찢기는 고통이었다. 그 대가로 청년은 고작해야 진조의 팔 한쪽에 상처를 냈을 뿐이었다.

    〈이딴 게 내 자식이라니.〉

    차가운 조소 아래에서 청년의 심장은 서서히 멎어 갔다. 그렇게 절망 속에서, 죽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너진 청년의 심장이 다시 뛰게 되었을 때, 그의 앞에는 하얗게 빛나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세상은 뱀파이어로 인해 무너졌다. 가족을 잃었고, 마을이 몰살당했다.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고, 막냇동생을 구하기 위해 누나와 형이 죽었다. 모두가 죽었다. 소년만이 시체 더미에서 살아남았다.

    무너지는 세상에서 소년은 절박하게 외쳤다.

    〈저에게 그들을 사냥할 힘을 내려 주세요.〉

    스스로 제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제단에 바친 소년의 애원에 여름의 태양과 불의 신이 호응했다. 어린 소년의 운명을 긍휼히 여긴 신은 친히 자신의 힘을 마법이라는 형태로 전수했으며, 자신의 이름까지 직접 내렸다.

    이제 소년은 검은 짐승을 사냥하는 하얀 짐승이었다. 본래의 이름까지 지워진 소년은 오직 뱀파이어를 사냥하기 위한 도구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저는 사냥꾼이에요.〉

    〈나도 사냥꾼이 되겠다.〉

    소년과 청년은 그렇게 만났다.

    〈당신의 운명을 나에게 묶었어요. 내가 죽지 않는 한 당신도 죽지 않을 거예요.〉

    긴 시간, 아주 긴 시간이었다.

    그들의 여정을 나열하는 건 불필요한 과정일 뿐이다. 그들이 어떠한 고통을 딛고 섰는지, 어떠한 괴로움을 버텨 내고 있는지, 서로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으므로. 청년과 소년은 세상의 유일한 짝이었다.

    여정의 끝에 청년과 소년은 진조에 다다랐다. 하여 소년은 해묵은 복수를 이루었으며 청년은 살부(殺父)의 업을 짊어지게 되었다.

    〈당신도 이제 자유로워지겠네요.〉

    진조의 손에 심장이 꿰뚫린 소년의 유언이었다. 바스러지는 아버지의 시체를 뒤로하고 소년의 시체를 안은 채, 청년은 생각했다. 사냥꾼이 아니게 된 나에게, 홀로 남은 나에게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이 아이가 없는 자유를 원하지 않습니다.〉

    소년의 시체를 안고 일곱의 낮과 일곱의 밤을 보낸 청년은 그 말을 신에게 고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둠네제울은 그들의 운명을 거두어 주었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의 짝인 청년과 소년의 운명과 이름을 대대로 이으며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이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청년은 뱀파이어의 아들을 뜻하는 담피르. 여름의 태양과 불의 신의 이름을 부여받은 소년은 크르스니크라 불렸다.

    긴 이야기가 끝나자, 네쿠라툴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서, 죽은 왕이여. 다 아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토얀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겁니까】

    〈스토얀을 뱀파이어로 재탄생하게 한 건 둠제네울이시지만, 그 뱀파이어를 최초로 빚은 사람은 네쿠라툴이시니까요.〉

    【하여 나에게 무얼 요구하려는 것이지요】

    어린 소녀는 창세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악신의 위압적인 존재감에도 작은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스토얀의 아들이 태어났어요. 담피르겠지요. 그러니 여름의 태양과 불의 신 크르스니크께서 떠나신 후 태어나지 않게 된 ‘인간 크르스니크’를 그 아이의 세계에 새롭게 태어나게 해 주세요.〉

    깊은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도, 소녀는 흔들리지 않는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의 운명은 서로에게 이어지겠지요. 최초의 담피르와 크르스니크가 그러했듯이.〉

    예전에 들었던 현규하의 얘기로는 평행 세계로 이동해도 위치가 바뀌지는 않는다고 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아드의 오봉산으로 나왔어야 했지만, 인유신의 눈에 보이는 건 숲이 우거진 산과 그 너머의 창공이 아니라, 조도가 낮은 빛살과 모래색의 하늘이었다. 아니, 하늘이라기보다는…….

    “꼭 땅 밑으로 들어온 거 같네요.”

    현규하의 말에 왠지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옆에 바짝 붙었다. 습기까지 짙은 게 정말 지하 같았다.

    공태성이 천천히 검을 꺼냈다. 예전에 쓰던 일본도는 어디로 갔는지 다른 무기였다.

    “고래도 없어졌다만.”

    “그놈은 본체가 따로 있으니까 바로 신계로 넘어갔겠지.”

    현규하에게 바짝 붙은 채 6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현재 상태  안락. 수면.]

    세계를 넘어가든 말든 잘 자고 있었다. 다행이다.

    “8세야. 너도 괜찮지”

    “쀼우.”

    8세가 열어 달라는 듯이 케이지를 탁탁 두드린다. 커버를 조금 벗기고 케이지를 열자 인유신의 손바닥 안으로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며 코끝을 쫑긋거리는 게 몹시도 익숙한 기색이었다.

    “너도 지하에서 살았다고 했지 혹시 네가 살던 곳이야”

    8세가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현규하의 뒤로 숨어서 얼굴만 빼꼼 내민 인유신은 보았다. 무릎까지 간신히 올까 말까 한 작은 인간들을.

    우르르 몰려온 그들이 뭐라고 떠들었으나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연신 웃는 낯은 마치 그들을 반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공태성은 검을 거두었으며 현규하는 완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턱을 문질렀다.

    “루마니아어네요. 대충 만나서 반갑다는 말들을 하고 있는데요”

    “규하 씨는 루마니아어도 할 줄 알아요”

    “독학했습니다. 세르비아어도요.”

    “우와아.”

    인유신이 감탄하자 그는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천재 애완쥐라고 칭찬 안 해 줘요”

    “규하 씨는 우주 제일 어학 천재예요!”

    “얼굴도 천재입니다.”

    “당연하죠!”

    “주인님을 향한 사랑도 천재죠.”

    “하아.”

    뒤에서 들리는 공태성의 한숨 소리는 못 들은 척했다.

    “너희는 제발 나잇값 좀 해 주면 안 되겠나 초등학생들이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 나이가 되도록 전처한테 처맞을 짓을 하는 것보다는 나은 거 같은데.”

    “…….”

    얘기를 하다 보니 긴장감도 풀렸다. 설마 지상으로 올라가서도 말이 안 통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나 하고 있는데 문득 난쟁이들이 몰려온 방향이 어수선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웬 소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10살 남짓한 소녀를 목격한 인유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 배합이 현규하와 똑같았다.

    “Драго ми је да смо се упознали! Моје име је…….”

    뇌로 직접 언어를 전하던 때와는 다른 상황이었다. 흥분한 음색으로 재잘거리던 소녀는 인유신이 알아듣는 눈치가 아니자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팔을 뻗어 인유신과 현규하, 그리고 공태성의 손까지 양손으로 차례대로 붙잡았다.

    인유신이 반사적으로 움찔하자 현규하가 낮게 말했다.

    “언어를 습득하게 해 주려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공태성, 너도 정신 방벽 풀어.”

    그 말대로 그녀에게 붙잡힌 손으로 따스한 기운이 스며드는가 싶더니, 머릿속에 하나의 개념이 습득되었다. 소녀가 활짝 웃으며 반복하여 말했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그녀의 말이 전부 이해되었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스토야라고 해. 너희는 규하와 유신과……. 어, 누구세요”

    인유신을 처음 보면서도 정확히 짚어 냈던 스토야는 공태성을 보고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그 모습이 왠지 현규하와 닮아 보였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투 플러스 원으로 딸려 온 불필요한 덤입니다.”

    “아하, 그렇구나!”

    그 말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다니 역시 현규하의 고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를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가워.”

    “그, 스토야 님”

    “스토야라고 불러.”

    “여기는 땅속인가요”

    지하는 스토야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땅 밑의 세상이라는 건 곧 죽은 자들의 세상을 뜻하기도 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시간이 별로 없거든. 우선 이거부터 먹어 줄래”

    스토야가 내민 건 석류 열매였다.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먹는 음식……. 이건 좀 위험하지 않나. 힐끗 돌아보니 현규하도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말을 빙빙 돌리거나 하는 일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거 먹으면 명계에 붙잡혀서 지상으로 못 돌아가는 거 아니에요”

    스토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이 석류는 정말 명계에서 자라는 열매가 아니라 내가 ‘섭리’를 속이기 위해 허위로 만든 가짜야. 5분이면 먹어서 생긴 효과도 끝나.”

    “섭리가 뭔데요”

    “너희 세계에도 있지 않아 이렇게, 허공에 글자로 나타나는 거.”

    시스템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먹을지 말지 쉬이 결정하지 못하는 인유신을 보며 현규하는 가만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스토야에 대해 평면적인 사실 외에는 아는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다. 하지만 스토얀의 눈을 속이기 위해 꽤 예전부터 무언가를 계획한 눈치였다. 그렇다면 어울려 주지 못할 것도 없다.

    “내가 먼저 먹어 볼게요.”

    현규하는 망설임 없이 석류 열매 몇 개를 따서 먹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명계의 석류’를 섭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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