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꺼진 옥탑방 안을 둘러보았다. 정리도 끝났고, 더 챙길 것도 안 보였다. 달가사에서 돌아온 뒤에도 두 사람은 바쁘게 지냈다. 못 가 본 떡볶이 맛집도 탐방하고, 이혜연과 권성길 부부와 밖에서 만나 더블데이트도 했다.
민끝녀와도 식사를 했다. 만날수록 좋은 사람이었다. 현규하에게는 알고 보면 무서운 사람이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래도 강석우가 죽은 후의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이다. 마냥 고마웠다.
다음에는 건강해진 민안나와도 같이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박승기에게는 집을 비우는 동안 가끔 한 번씩 들여다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현규하의 솜 인형들이 보관함에서 그를 배웅했다. ‘그 몬스터는 안 가져갈 거예요’라고 현규하가 묻기도 했으나 집을 지키게 남겨 두었다. 언젠가 현규하와 돌아와서 보관함의 먼지를 닦으며 인형을 꺼낼 수 있기를 바랐다.
마지막으로 방 안을 눈에 담은 인유신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요.”
“조금 늦었어요. 밑에 길드장님 오셨을 거 같은데요”
무슨 의도인 건지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자 현규하도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의 정수리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렇게 인유신은, 현규하와 나란히 옥탑방을 내려왔다.
“유신아, 규하야. 안녕”
“안녕하세요.”
변함없이 무시로 일관하는 현규하와는 달리 인유신은 장범에게 꾸벅 인사했다. 장거리 운전에서는 운전기사에게 잘 보여야 한다.
“얼른 타라.”
조수석의 공태성이 눈짓했다. 뒷좌석에 들어가자 장범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규하가 들고 있는 케이지는 또 뭐야 햄스터인가”
“제가 테이밍한 애요. 나이가 많으니까 남한테 맡길 수가 없어서요.”
6세는 커버를 씌운 케이지에서 세상모르게 잠들었고, 8세가 보살펴 주고 있었다. 아공간은 6세의 사료와 용품들로 꽉꽉 채웠다. 8세는 사람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으면 될 테니, 준비는 만전이다.
장범이 운전하는 차가 출발했다. 인유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신 현규하의 손을 꼭 쥐었다. 그에 답하는 것처럼, 현규하가 그의 손등을 천천히 매만졌다.
고속 도로에 접어들었을 무렵, 장범이 입을 열었다.
“파파, 여기까지 왔는데 슬슬 얘기해 줄 때도 안 됐어 회령에는 왜 가는 거고, 나는 또 왜 거기에서 무한정 대기를 타야 하는 건데”
“안나의 약을 구하러 가는 길이다. 뒤에 앉은 녀석들은 다른 용건이 있지만.”
“아가씨 약! 확실해”
“아마도.”
민끝녀와 친한 현규하도 민안나의 병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장범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마치 제 자식의 병을 낫게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기뻐했다.
“정말 잘됐다. 회령에서 북중국으로 밀입국이라도 하게 북중국에서 구할 수 있는 약이야”
“나만 엮인 일이 아니라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고, 게이트를 인위적으로 열어서 약을 조달해 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뭔 소리야, 그게.”
장범은 입 속으로 불만을 구시렁거렸으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휴게소에 들러서 군것질거리도 먹고, 뻐근한 허리에 현규하의 안마도 받다 보니 어느새 회령이었다.
오봉산 초입까지 왔을 때, 솜노로스가 뽀로롱 나타났다.
“어우 씨, 깜짝이야.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남자인데 아기를 가졌어』
“말이 그렇다고. 아니, 근데 저 물고기 텔레파시도 쓰네”
『왕자님이 무서워서…….』
솜노로스에게 익숙하지 않은 장범은 반사적으로 꺼낸 간디바를 거두었다.
『내가 안내할게!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여전히 열려 있나 봐.』
한낮에 튀어나왔지만 드디어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는 설렘 때문인지 솜노로스는 전혀 졸린 기색이 아니었다. 거대한 꼬리지느러미가 신나게 꾸물거리는 걸 보면서 일행은 산길을 올라갔다.
인유신은 사이코키네시스로 둥둥 떠 있는 케이지 안에서 자고 있을 6세를 응시했다. 저 안에 있으면 등산으로 힘들지도 않고 편하겠지 부럽다…….
“왜 여기까지 와서도 등산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주인님의 사랑옵은 애완쥐의 행복을 위해 힘내십시오.”
“등산은 제가 하는데 규하 씨가 왜요”
“등산을 하게 되면 주인님의 배가 어떻게 될까요”
“복근이 손톱만큼 더……”
“그걸 핥으면 누가 행복해질까요”
“……!”
헥헥거리면서 어기적어기적 기어가던 인유신은 그 말에 기겁했지만, 다행히 앞서가는 공태성과 장범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듣지 못한 기색이었다. 장범은 그렇다 쳐도 공태성은 정장을 입고도 저렇게 산길을 잘 타다니 반칙 아닌가.
“그러니까 파파도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뜻이야”
“재수 없으면 못 돌아올 수도 있고.”
“아, 씨. 그래서 서희 누나를 임시 길드장으로 올린 거였어 나는 또 안식년이라도 갖는 줄 알았잖아. 꼭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해야지!”
“박서희라면 길드 잘 이끌어 나갈 거다.”
“아저씨! 돌아올 생각을 하라니까요!”
공태성의 멱살이라도 잡고 다그칠 기세였던 장범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 난 이제 능력 쓸 때 파파가 없으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 날 조교하기만 해 놓고 버릴 셈이야 나쁜 파파…….”
“네놈의 그 추잡스러운 개소리를 앞으로 듣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매우 개운한 기분이군.”
본의 아니게 대화를 들으며 인유신은 생각했다. 현규하와 장범이 주둥이 배틀을 뜨면 누가 이길까.
‘당연히 규하 씨가 이기지! 규하 씨의 주둥이가 최고야!’
뿌듯한 마음으로 힘차게 발을 내디딘 인유신은 그대로 허리에 힘이 풀렸고, 얼른 부축한 현규하의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하도 옆구리에 끼이다 보니 이젠 업혀 가는 것처럼 안락하다.
“언제가 될지는 확답하지 못한다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약병이나 그 비슷한 게 나올 거다. 받아서 끝녀에게 전해 줘.”
“못 올 수도 있다는 거 부회장님도 알아”
“말 안 했다.”
“그랬구만…….”
그 말을 끝으로 장범도 침묵했고, 일행은 말없이 산길을 올라갔다.
그렇게 험준한 산세를 따라 산봉우리 가까운 곳까지 한참 더 올라가고, 등산로도 아닌 짐승 길로 방향을 틀어서 또 한참을 간 뒤에야 솜노로스가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돌아보았다.
『여기야!』
“흐음. 마나를 계측하는 스킬이 없어서 맞는지 잘 모르겠네.”
『맞다니까! 내가 집에 가는 길에 거짓말을 왜 해.』
현규하의 옆구리에서 인유신도 끙끙거리면서 살펴보았지만 역시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맞는다면 문을 열 준비를 해야 한다. 옆구리에서 꾸물꾸물 내려온 인유신은 현규하에게서 펜던트와 심장을 받았다.
‘……온기까지 느껴지니까 방금 육체에서 꺼낸 심장 같아서 좀 무섭다.’
오싹함을 떨치려 애쓰면서 스토야에게 들은 방법을 복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마법 같았다. 최초의 게이트가 열린 뒤 온갖 능력이 발현되었지만, 마법이라고 할 만한 능력은 보고된 적이 없었다.
〈기회도 한 번뿐인데 제가 이 마법 같은 걸 제대로 쓸 수 있을까요〉
걱정하는 인유신에게 스토야는 몹시도 미안해하는 음성으로 속삭였었다.
『너는 신이 내려 준 이름을 이은 아이인걸.』
자기보다도 한참은 어려 보이는 목소리로부터 아이라는 얘기를 듣는 것도 묘한 기분이었지만. 아무튼 되지 않더라도 해야 했다.
인유신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펜던트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찰랑거리는 스토야의 피로 그녀가 머릿속에 주입해 준 마법진을 바닥에 그리기 시작했다. 마나를 넣은 피가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며 지면을 기어갔다.
실수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한번 그리기 시작하니 술술 잘 그려졌다. 이러한 마법이 손에 익는다는 묘한 느낌까지 들었다.
마침내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전체적으로 일곱 개의 각이 있는 별 모양의 칠망성이었다. 세밀한 묘사가 들어가긴 했지만.
머릿속의 마법진과 꼼꼼히 비교해 보니 틀린 곳도 없었다. 이어 스토야의 심장을 마법진의 중간에 두었다.
“규하 씨. 여기 이쪽의 뿔부터 시작해서 저쪽의 뿔까지, 한붓그리기를 하는 것처럼 규하 씨의 마나를 주입하면 된대요.”
“알겠습니다.”
현규하가 시키는 대로 마나를 운용하니, 마법진이 핏빛으로 빛나며 빛 무리가 소용돌이쳤다. 휘돌아 오르던 빛 무리는 서서히 심장에 스며들었고 새로운 알림창이 떴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스토야의 진(眞) 심장’을 소유합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건 짭이었단 소린가 하나밖에 없는 심장에 짭이고 찐이 어디 있어”
투덜거리면서도 현규하는 이전처럼 심장을 사용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소유한 ‘스토야의 진 심장’을 사용합니다.]
[이아드와의 통로가 연결되었습니다.]
[남은 시간 60분 00초]
시간도 넉넉했다.
“짭이랑은 비교도 안 되네요.”
『내가 닫히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도 전보다 쉬워 보여!』
솜노로스가 연신 꼬리를 들썩들썩했다. 마음 같아서는 제일 먼저 뛰어들고 싶은데 현규하부터 가라고 기다리는 눈치였다.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장범이 혀를 내둘렀다.
“뭔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하긴 한데……. 정육점 조명이 켜진 게이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으란 소리야”
그건 확실히 문제였다. 누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쪽이 알아서 할 문제죠.”
“야, 규하야. 나는 너처럼 얼굴 가죽이 두껍지 않은 섬세한 남자야.”
다행히 문제는 공태성이 미리 준비해 온 아이템 덕분에 해결되었다. 마나의 패턴이 일치되어야 위장이 해제되는 결계로, 현규하도 소유 중인 게이트에 종종 쓰던 아이템이다.
“에휴. 뭐 하러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파파도 유신이도, 규하도 다치지 말고 잘 갔다 와.”
“다녀오겠습니다.”
인유신은 사정을 알고 배웅하는 유일한 사람에게 꾸벅 인사한 뒤 현규하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규하 씨랑 가는데 당연히 괜찮죠!”
짐짓 힘차게 소리 내어 말한 인유신은 눈가를 부드럽게 휘는 현규하에게 미소를 되돌렸다. 현규하도 비로소 표정을 풀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갈까요. 스토얀과 스토야 남매를 인신 공양 하여 지탱한 세계로.”
그리고 나란히 손을 잡은 채, 통로 너머로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