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요”
현규하는 백과사전을 읊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달가사. 1392년에 완공. 연일 정씨의 후원 속에 창건한 절로 선죽교 사건 이후 두 달도 안 되어서 정몽주의 자로 절 이름을 지은 초대 주지승의 개미친 깡다구가 유명.”
10년 넘게 살았던 인유신도 종종 까먹는 절의 유래였다.
“근데 그게 왜 아쉬운 건데요”
“만약에 종교의 영향력이 엄청 큰 세계였다면 고려 말기의 막장에 불교계도 탑승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조선에서는 그 반대로 불교를 억압해서 절들을 산속으로 쫓아냈을 수도 있는 거고.”
“어, 그렇게 됐으면 제가 산속에서 자랐을지도 모른다는 거네요 산에서 학교까지 왔다 갔다 하느라 엄청 힘들었겠는데…….”
“산길 걷는 게 운동도 되고 얼마나 좋아요. 그렇게 날다람쥐처럼 산속을 뛰어다니다 보면 유신 씨에게도 자연스럽게 근육이 붙었을지도 모르죠. 몰랑몰랑한 지금도 좋지만 가끔은 유신 씨의 복근을 핥…….”
인유신은 다급히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눌러서 한낮의 대중교통 안에서 부적절한 발언이 튀어 나가는 걸 막아 냈다.
“규하 씨 때문에 맨날 헬스장에 붙잡혀서 이제 그 정도로 몰랑몰랑하지는 않은데요……!”
“그럼 핥게 해 줄 거예요”
“어째서 얘기가 그쪽으로 돌아가요!”
절에 가면서 하는 얘기라기에는 무척 불경한 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예성강이 보이는 경치 좋은 입지에 자리한 달가사 앞에서 젊은 사미승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아!”
“우주 형!”
인유신처럼 어렸을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라다가 출가한 성우주가 반갑게 동생을 맞았다. 법명을 받았지만 속명이 아직 더 익숙했다.
인사를 나눈 그는 현규하에게도 합장했다.
“현 헌터님이시죠 유신이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내 욕을 했어도 유신 씨 말이라면 다 맞아요.”
“욕 같은 건 안 했어요!”
화들짝하는 인유신의 반응에 성우주가 웃음을 지으면서 절로 안내했다. 사찰 특유의 백단향이 절 곳곳에 심은 초목의 내음과 어우러졌다. 인유신의 어린 시절이 깃든 향을 현규하는 감미롭게 느꼈다.
안에서는 주지승과 보육원을 주로 보살피던 승려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면접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현규하와 나란히 앉은 인유신은 오랜만의 꽃차를 호로록 마셨다. 뒷마당에서 가꾸는 진달래로 예전에 그도 괜히 꽃잎을 덖겠다고 나섰다가 장렬히 실패한 적이 있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깃든 추억을 인유신은 찬찬히 가슴에 새겼다.
승려들은 기꺼이 현규하를 맞았다. 현규하도 과거에 인유신이 자살 기도를 했다고 오해한 인전과 통화했을 때처럼 정중했다.
푸근푸근한 이야기를 나눈 끝에 주지승이 넌지시 운을 뗐다.
“유신아, 현 헌터님이 네가 우리 절에 오기 전의 이야기도 알고 있으시니”
“네, 전부요.”
“그랬구먼.”
그는 안심한 기색으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리 유신이가 어린 나이부터 상처가 참 많았습니다. 현 헌터님처럼 듬직한 분과 귀한 인연을 맺게 되어 참말로 다행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그 반대인데.”
현규하가 눈을 내리뜨며 엷게 미소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부모님이 없어요. 그 일로 사춘기도 호되게 겪었고요. 사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긴 한데……. 그럴 때마다 유신 씨가 나를 사람으로 살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유신 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여기 이 자리엔 헌터 현규하가 아니라 미치광이 살인귀 하나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승려들은 살벌한 농담으로 여기는 기색이었지만, 인유신은 14년 전의 그를 떠올리며 숨을 조금 삼켰다.
웃음을 거둔 현규하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유신 씨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밖으로 나오자 그새 이야기를 듣고 온 보육원 아이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인유신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현규하는 낯설어하던 아이들은 가지고 온 장난감과 간식을 꺼내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 몸이 허공에 뜨자 신나서 자지러졌다.
어린애들과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을 거 같은 사람인데 지금도 그렇고, 민안나도 그렇고 은근히 잘 놀아 주는 모습을 보니 기뻤다.
신나게 날뛴 아이들이 진이 빠진 틈을 타서 보육원을 둘러보았다. 이아드로 가기 전에 자라 온 풍경을 눈에 한 번 더 담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현규하에게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 주고 싶었다.
승려들이 주기적으로 인화하여 따로 보관 중인 앨범을 가져온 인유신은 조금 민망해했다. 숨겨 두었던 치부를 낱낱이 까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보고 이상한 얼굴이라고 웃으면 안 돼요.”
“사랑스러운 얼굴이라고 앨범 훔치지 못하게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진짜 이상한데…….”
머리가 굵어진 뒤에는 자신도 보기 힘들었던 옛 앨범을 손가락으로 슬그머니 밀었다. 오래된 앨범을 펼친 현규하는 바로 인유신을 찾아냈다. 부모가 죽고, 할머니의 오열 속에 다시 버려진 슬픔이 박제된 한 어린아이를.
침묵 속에 현규하는 찬찬히 앨범을 넘겼다. 사진 한 장을 찍는 것도 내켜 하지 않던 그늘지고 상처받은 아이의 얼굴엔 긴 시간을 거쳐 아주 느리게, 말간 웃음이 피어올라 현재의 그가 아는 인유신이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을 마지막으로 앨범을 덮은 그는 얼굴을 감싸며 아주 오래 품었던 것을 토하듯이 긴 숨을 몰아쉬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14년 전에, 불길이 심하게 일렁거리지 않고 내 눈앞이 흐려지지 않아서 어렸던 유신 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면……. 예전의 그 아이가 혼자가 되었다는 걸 알고 내가 데려올 수 있었다면, 하고요.”
“…….”
“하지만 유신 씨의 옛 사진들을 보니까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의 나는 어렸고,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니었으니 우리가 같이 지내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달가사에서 유신 씨가 자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의 말을 듣고 인유신도 상상해 보았다. 의지했던 이들을 잃은 14살의 현규하와 8살의 자신이 재회하게 된 순간을.
현규하의 말처럼 상처를 보듬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대신 더 많은 시간을 그와 부대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삶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규하가 싱긋 웃으며 흐트러진 인유신의 앞 머리칼을 손끝으로 살살 빗어 넘겼다.
“현재의 나는 14년 전과는 달리 그럭저럭 좋은 축에 속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현규하가 좋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킬 인간이 한둘이 아니지만, 인유신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에게 현규하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니까.
“어린 유신 씨가 형아라고 부를 기회를 놓친 건 좀 아쉽지만.”
그 말을 들으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만약 제가 규하 씨랑 옛날부터 같이 자랐으면요, 부회장님과도 친해져서 누나라고 불렀을까요”
“그랬겠죠. 끝녀 누나라면 분명히 유신 씨까지 팍팍 밀어줬을걸요.”
“그럼 부회장님이랑 오래 사귀고 결혼한 길드장님과도 친해져서 형 동생처럼 지냈을지도 모르겠네요”
“…….”
현규하의 표정이 우뚝 굳었다. 그는 무겁게 침음하며 미간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잠깐, 잠깐만요……. 아니, 어떻게 이런 선택지가…….”
무척이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를 보면서 인유신은 역시 어렸을 때부터 그와 같이 자랐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곱씹었다.
형아 소리 듣지 않기 VS 형아라고 부르는 어린 유신이. 단, 공태성도 형아라고 부르게 됨.
이 경우에 당신의 선택은
현규하가 세계 최고 난제의 해답을 얻은 건 저녁까지 같이 어울려서 먹고 가로등의 빛 아래에서 절 주변을 산책할 때였다.
“……역시 안 되겠어요.”
“뭐가요”
“공태성의 눈알에 ‘형아’ 하는 귀여운 유신 씨를 박아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나만 봐야 해.”
“…….”
그걸 아직까지 고민하고 있었단 말인가. 인유신이 몰래 진땀을 흘리는 사이에도 현규하는 기나긴 숙고의 결론을 늘어놓았다.
“무엇보다 공태성은 나보다도 나이가 훨씬 더 많잖아요. 그 인간은 몇 년만 지나면 앞자리가 4로 바뀐단 말입니다. 유신 씨는 나이 많은 남자가 취향인데 가까이에 두면 절대 안 되죠.”
“저는 나이 많은 남자를 딱히 좋아한 적이 없는데요.”
“네 저번에 나이 많은 남자가 좋다면서요!”
“제가 언제요”
“분명히 그랬어요!”
현규하의 다급한 설명을 들은 인유신은 겨우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최진혁과 송찬영을 처음 소개받았던 날이었다.
〈그래도 호감이 가는 남자는 있을 거 아니에요.〉
〈성길 형님처럼 나이 많은 남자분이요.〉
……듣고 보니 그런 대화를 했던 거 같기도 하고.
“나이 많은 어른들이 좋은 건 맞는데…… 그건 그냥 인간적으로 좋다는 뜻인데요”
“……나이 많은 남자 안 좋아해요”
“저는 남자도 안 좋아하는데요.”
현규하의 얼굴에 우중충한 그늘이 생겼다.
“……내가 여자가 되면 좋아해 줄 거예요”
“뭐, 뭐가 된다고요”
“남자 안 좋아한다면서요……. 주인님에게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게 서글프지만 주인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면 그깟 살덩어리…….”
그의 입에서 금단의 단어가 나오기 전에 인유신은 급히 외쳤다.
“규하 씨는 예외죠!”
울적하게 숙였던 현규하의 얼굴이 슬며시 올라왔다.
“잘 못 들었는데 한 번만 더…….”
“그러니까, 규하 씨는 예외라서.”
“…….”
“규하 씨는 규하 씨니까, 규하 씨뿐이니까, 그게, 그…….”
입술을 움직이다 보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뭔지 깨닫게 된 인유신은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그렇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규하 씨니까, 제가…… 좋아하는 거고…….”
“…….”
이쯤에서 뭔가 헛소리나 섹드립을 뱉었어야 할 현규하가 잠잠했다. 너무 작게 말해서 못 들은 걸까 슬쩍 시선을 올려 곁눈질한 인유신은 흠칫했다.
가로등의 흐린 불빛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현규하의 얼굴이 아주 시뻘건 색으로 익어 있었다. 인유신이 빨개진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규하 씨”
“…….”
“규하 씨.”
“……네, 넷!”
라이딩 재킷의 소매를 살짝 당기면서 불렀을 뿐인데, 현규하는 발등이 찍히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 뛰며 놀랐다. 허공에서 허둥지둥 우왕좌왕 흔들리는 손을 보며 인유신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가 무척 당황하니 오히려 고백을 한 당사자가 침착해졌다.
‘여기에는 발을 헛디뎌서 굴러갈 곳이 없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팔뚝을 잡으니 현규하가 신음하며 풀썩 무너졌다. 바닥에 엎드리듯 주저앉은 그의 앞에 인유신도 쪼그리고 앉았다.
“괜찮으세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웅얼거리는 그를 보자니 괜히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것과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의 무게는 분명히 다를 터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비틀지 않고,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그가 고맙고, 미안했다.
인유신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규하 형.”
“…….”
그날 인유신은, 사람은 너무 좋은 일이 생겨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급박한 시간이 지난 후.
“주인님, 우리 약속 하나만 하죠…….”
“어떤 거요”
“형 소리는 되도록 하지 말도록 해요……. 주인님과 못 해 본 게 산더미인데 벌써 죽을 수는 없습니다.”
“……넵.”
현규하의 아련한 목소리에 인유신도 동의했다. ‘형’이라는 한마디에 그만한 파괴력이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