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알차게 잘 보내고 서울로 돌아온 인유신은 우선 휴직계부터 냈다. 현규하가 낸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내도 괜찮을지 조마조마했지만 김 과장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현 팀장이 휴직하는데 유신 씨 혼자 출근할 리가 없잖아요.”
찔끔했다. 그래도 주변에서 일심동체로 염장 지르고 다니는 커퀴로 인식하는 덕에 굳이 핑계를 대지 않아도 알아서 다들 납득하는 건 조금 편했다.
“규하가 직장 하나에 오래 붙어 있는 게 이상하긴 했지. 같이 충전 잘하고 와.”
“복직하기 전까지 금치산자를 자립할 수 있는 인간으로 교육해 주면 좋겠군.”
“현 헌터님과 잘 쉬다가 오세요!”
대충 응원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휴직하기 전까지 회사에서 업무 정리도 하고, 주변 정리도 하느라 인유신은 모처럼 바쁘게 보냈다. 현규하는 잠시 곁을 비웠다. 그의 행적은 뉴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텐진에 위치했던 북중국 최대의 범죄 길드 충지타우의 본거지가 하루아침에 궤멸된 의문의……. 충지타우가 소지하고 있던 전략 물자들이 소실되어 북중국 정부는…….”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던 인유신의 머릿속에 퍼뜩 얼마 전 현규하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무기 좀 채우러 갔다 올게요. 먼저 가까운 북중국부터 가 보려고요.〉
〈북중국 어디요〉
〈텐진이요.〉
〈아하. 근데 준비 다 끝낸 거 아니었어요〉
〈나 혼자 갈 때랑은 다르잖아요.〉
마치 옆 동네 시장으로 무기를 사러 가는 것 같은 가벼운 걸음이었는데……. 설마 범죄 길드를 턴 걸까.
인유신은 식은땀을 흘리며 현규하의 상태를 살폈다.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
[현재 상태 애정. 살의. 분리 불안. 개운. 부족.]
오랜만에 힘 좀 써서 개운한 거고, 무기가 아직 부족하다는 뜻인 건 아니겠지…….
조마조마한 마음과는 달리 러시아와 일본, 미국, 멕시코까지 최대·최악의 범죄 길드가 궤멸되었다는 뉴스는 그 뒤에도 계속 이어졌고, 인유신은 관심을 끄기로 했다. 시차에 맞춰서 꼬박꼬박 전화하고 문자하는 현규하와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언제 돌아올지 알 수도 없고,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여정이다. 주변을 정리하면서 박승기와도 연락해서 만났다.
“형님이랑 여행 간다고”
“엉. 좀 멀리 가게 돼서 그동안은 연락도 안 될 거 같아. 다육이 좀 부탁할게.”
“나도 키우니까 네 다육이까지 맡는 건 상관없는데 어딜 가길래 그러냐 요즘 세상에 폰 안 터지는 곳도 있어”
“오지 여행이거든.”
곧 휴대폰도 해지할 예정이라, 연락이 닿지 않는 곳에 간다는 핑계를 대기 위해 고민한 게 오지 여행이었다. 박승기도 의심하지 않고 호응했다.
“하긴. 형님이랑 가는데 오지도 5성 호텔처럼 안락하지 않겠냐.”
의심하지 않는 친구를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게 미안했다. 하지만 세세한 사정을 밝히는 것도 지난한 과정인데, 자신을 염려한 박승기가 만류할 것도 고민이다.
무사히 잘 다녀와서 꼭 그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마침 배경도 SNS에서 핫 플레이스로 유명한 멋진 카페였다. 인유신은 휴대폰을 꺼냈다.
“야. 우리 오랜만에 사진이나 같이 찍을래”
“이 새끼가 징그럽게 왜 이래. 오랜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 둘이 같이 사진 찍은 적도 없거든”
“오지 갔다가 네 얼굴 까먹을 수도 있잖아.”
“10년 넘게 질리도록 본 얼굴을 왜 까먹냐.”
“인적도 드문 오지에서 잘생긴 규하 씨 얼굴만 보다 보면 다른 사람은 좀 까먹을 거 같아서 그래.”
‘그럼 내가 오징어냐.’라는 의미를 담아 째려보는 박승기의 옆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앉아 찰칵 사진을 찍었다.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얼굴이긴 했지만 인유신은 만족스러웠다. 박승기와는 이런 것도 좋다.
며칠 뒤, 현규하도 귀국했다.
“진짜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마중을 나간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찰싹 달라붙어서 비비적거리며 충전하는 그의 등을 인유신도 꼭 끌어안았다. 단단하게 옥죄는 넓은 가슴도, 변함없이 좋은 그의 체취도, 너무 반가웠다.
범죄 길드 외에 다른 곳도 더 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규하는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유신 씨. 해외여행 하면서 새 침낭도 샀고, 주인님 줄 선물도 샀는데 오늘은 같이 자면 안 돼요”
“돼요.”
“며칠이나 떨어져 있었더니 주인님의 기운이 부족해서…… 응”
“된다니까요.”
당연히 처음에는 거절할 거라고 짐작하고 밀어붙일 궤변을 준비해 왔던 현규하는 입을 가늘게 벌렸다. 그리고 이마를 감싸며 심각한 표정으로 인유신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뭐지 내 주인님 맞는데……. 확인차 질문 하나만 할게요. 내 사이즈 얼마인지 알죠 스리 사이즈 말고 다른 거요.”
“자꾸 그러면 쫓아낼 건데요.”
“알았어요, 알았어.”
현규하는 방긋 웃으며 얼른 인유신의 어깨를 감쌌다. 새삼스러운 감상이지만, 참 예쁜 웃음이다.
[현재 상태 애정. 살의. 행복.]
사소한 일상에서 같은 행복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 무척이나 좋은 감각이었다.
길거리에서 받아 온 전단지를 반으로 잘라서 한쪽 면에는 ○, 다른 한쪽에는 ×를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에 6세가 좋아하는 말린 브로콜리를 각각 올려놓았다. 때마침 6세의 볼주머니도 더 들어갈 곳 없이 빵빵하다. 좋았어.
인유신은 케이지에서 모처럼 늦게까지 안 자고 있는 6세를 살그머니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눈을 맞췄다. 반질반질한 까만색 눈이 그를 바라보며 반짝거렸다.
“6세야, 내가 한동안 좀 멀리 떠나게 됐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너랑은 영영 못 보게 될 수도 있는 먼 길이야.”
“찍!”
“나이가 많은 데다 내 보살핌까지 필요한 널 두고는 도저히 갈 수가 없지만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험한 길이거든. 네가 다치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돼.”
“찌이.”
“만약 널 두고 가게 되면 내가 자란 절의 스님들께 부탁할 생각이야. 좋은 분들이시니까 너도 잘 보살펴 주실 거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이쪽에 있는 걸 먹으면 나랑 같이 가겠다는 거로, 저쪽에 있는 걸 먹으면 여기 남겠다는 거로 이해할게.”
인유신은 전단지에 그린 ○와 ×를 각각 가리켜 보였다. ○가 같이 간다는 의미다.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자 6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러더니 거침없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를 그린 전단지 쪽이었다.
“6세야……!”
인유신은 망설임 없이 브로콜리를 옴뇸뇸 볼주머니에 밀어 넣는 6세를 보며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아무리 위험한 길이더라도 주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6세의 소중한 마음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너만은 꼭 지킬게!
그리고 순식간에 브로콜리를 쑤셔 넣은 6세는 곧 반대쪽 전단지로 기어가서 나머지 브로콜리도 오물거렸다.
“…….”
그냥 잘 먹는 돼지 햄스터였다.
인유신은 흡족해하는 6세를 보며 한숨을 폭 쉬었다. 아무리 어느 정도 말이 통한다고는 해도 이렇게 복잡하고도 긴 내용을 이해시키는 건 무리였나. 건강하니까 됐다.
케이지로 옮겨 주고 뒤뚱거리며 그루밍하는 6세의 영상을 찍고 있을 때였다. 현규하가 밖에서 벨을 눌렀다.
얼른 가서 문을 열자 꽃향기가 먼저 짙게 풍겨 왔다. 제 상체만큼이나 커다란 꽃다발을 안은 인유신의 얼굴에도 웃음이 활짝 피었다. 옛날에는 먹지도 못하는 꽃다발을 어디다 쓰나, 싶기도 했었는데 그에게 받을 때마다 가슴이 들뜨고 기쁘다. 꽃다발은 역시 유래 깊고 좋은 선물이었다.
“오늘은 흰색 꽃들이네요.”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랑 깔 맞춤이요. 마침 누나에게 줄 선물이 도착하기도 해서.”
현규하가 아공간에서 꺼낸 건 햄스터용의 5층짜리 미로 룸으로, 내부에는 자잘한 스티로폼들이 깔려 있었다. 인유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예전에 유튜브에서 봤지만 국내에서 파는 곳도 없고, 무엇보다 비싸서 엄두를 못 냈던 장난감이었다.
최상층에 올려놓자 6세는 낯설어하며 기웃거리다가 이내 호기심을 드러냈다. 스티로폼을 헤치고 미로를 통과하며 한 층, 한 층 아래로 내려가는 6세를 현규하가 촬영하는 가운데, 인유신과 8세는 열심히 응원했다.
“저쪽이야, 저쪽! 잘할 수 있어!”
“삐웃! 삑!”
“파이팅.”
주인과 동생들의 응원 속에 6세는 무사히 1층 미로까지 통과해서 밖으로 나온다는 훌륭한 과업을 달성했다. 그러고는 으스대는 기세도 없이 태연하게 케이지로 돌아가 잠이 들었다.
인유신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우리 6세 진짜 천재 맞죠”
“역시 맏누나다운 늠름함이네요. 집이 좁으니까 장난감은 일단 내 아공간에 넣어 둘게요. 다음에는 다른 방법으로 조립해 봐요.”
아침 겸 점심을 같이 먹은 두 사람은 8세의 배웅을 받으며 옥탑방을 나왔다. 오늘은 달가사를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전날 미리 마트에서 쇼핑도 해서 장난감과 간식도 잔뜩 사 두었다.
개성으로 가는 버스는 늘 타던 거라 익숙한데, 옆에 현규하가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이 가득한 공간으로 그를 안내한다는 거에, 무척 쑥스러우면서도 들뜬다.
가만히 올려다보자 현규하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 그에게 향하는 다정하고, 깊은 시선이 부드럽게 휘었다.
“어젯밤에 들떠서 한숨도 못 잤어요. 유신 씨와 같이 달가사로 갈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보육원에 같이 가서 인사를 드리자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던 인유신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현규하가 속삭였다.
“장인어른을 알현하는 사위의 쫄리는 심정에 빙의해서 조사를 좀 해 봤는데 아쉬운 게 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