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214)

머리를 식혀야겠다는 현규하의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했지만, 침대에 누워도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귀속 아티팩트를 일부 해방하느라 평소에는 거의 쓰지도 않던 마나를 소모해서 피로한데도 눈이 말똥말똥했다.

현규하는 이쪽 세상에 미련이 없기 때문에 이아드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인유신은 어두컴컴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언제라도 찾아뵐 수 있는 곳에 모셨다. 절친한 친구와 가족처럼 아껴 주는 달가사의 식구가 있다. 부족하게나마 어떻게든 입에 풀칠은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었다.

그리고 현규하를 따라 이아드로 간다면.

언제 어떻게 돌아올 수 있을지 확답하지 못하니 이곳에서 쌓은 모든 것들은 다시 손에 넣지 못하리라 여기는 게 편할 터였다. 인유신은 그렇게 모든 걸 놓았다고 가정해 보았다.

모든 걸 놓고, 현규하 한 사람만을.

인유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울질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가 아닌가.

〈현 헌터는 나에게 세계를 주었어요. 그런 사람이에요. 유신 씨에게도 그렇죠〉

민끝녀의 말처럼, 자신 또한 현규하에게 새로운 세계를 받았다. 현규하가 아니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사람들과 연을 맺고, 경험을 했다. 그 모든 게 강제적인 테이밍에서 비롯된 얄팍한 연이었다는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현규하라는 끈은, 자신을 어디까지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인유신은 그것을 알고 싶었다.

살그머니 침실 밖으로 나가니 거실은 여전히 고요했고, 6세가 쳇바퀴를 돌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케이지 옆에 켜 놓은 작은 무드 등에 의지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찍이 테라스에 어둑한 형체가 보였다. 슬쩍 다가가니 펜스에 기대어 있던 현규하가 부드럽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요”

“규하 씨는요”

“조금 있다가 자려고요.”

밖으로 나오니 소금기를 머금은 바다 내음이 더욱 짙어졌다. 인유신은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푸르렀다.

“®ÀÇ도 달은 하나죠”

“달이 쪼개졌다면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갈 듯하긴 하네요.”

“확인해 보려면 직접 가야겠네요.”

“…….”

의견을 굽히지 않겠다는 걸 다시 듣게 된 현규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유신 씨. 나한테는요, 언어라는 걸 이해하기 전부터 머릿속에서 울리던 말이 있었어요. 지금도 가끔 동요가 심하게 일어나면 들려와요.”

“어떤 말이에요”

“나에게 오라는, 아버지의 목소리입니다.”

이것만큼은 인유신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제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살의의 근원이 친부라는 것을,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양부모를 잃은 그에게 어떤 표정으로 말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자신의 적나라한 민낯을 까발려서 그를 설득할 수 있다면, 현규하는 그렇게 해야 했다. 무엇도 인유신의 안전에 우선되지는 못하므로.

“아버지는 기원전부터 살아온 괴물이에요. 그 나이가 되도록 자식은 나 하나뿐이죠. 세상이 종말에 가까울 때 나를 낳은 이유가 뭐겠어요”

오싹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에 인유신은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현규하는 그의 생각보다 더욱 잔인한 추측을 담담히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일찍이 본인이 겪었던 것처럼, 나를 산 제물로 바치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다시 또 세계를 지탱하기 위한 주춧돌로 삼으려는 거죠. 불로불사인 아버지라도 죽을 때가 되었는지, 아니면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어서 버티기 버겁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규하는 울 것 같은 창백한 표정이 된 인유신의 뺨을 보듬었다. 자조적인 목소리와는 상반되는 온화한 온기가 그를 감쌌다.

“그게 태어나기도 전부터 부여된 내 의무였고, 나는 그 의무를 거부하기 위해 아버지와 담판을 지을 작정입니다. 그 전에 어머니도 찾을 거고요.”

“……아예 안 가면, 어떻게 돼요”

“음, 잘 모르겠지만 두통 때문에 좀 힘들지 않을까요”

거짓말이다.

열쇠를 찾는 과정에 지독한 권태감을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그 권태에 젖어 모든 걸 손에서 놓는다면, 저주처럼 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끝내 자신을 죽이고 말 것이라는. ……그렇게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허리를 굽히고 하얀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동요하고 있던 인유신이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며 그의 재킷을 붙잡았다.

“아버지와 담판을 짓는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을 거예요. ®ÀÇ가 비교적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유신 씨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게다가 유신 씨의 히든 특성 말이에요.”

속에 담은 얘기를 한 오라기씩 천천히 풀어헤치던 현규하가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그는 입 속에서 말을 고르며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결국 입술을 뗐다.

“아버지에게 발각되면 정말 위험해요. 유신 씨의 특성을 알게 되면 아버지는 꽤 높은 확률로 당신을 죽이려고 할 겁니다.”

“제 특성이요”

그 말에 흠칫 놀란 인유신의 어깨를 쓸며 현규하가 다독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게, 음……. 쉽게 말해서 아버지의 현재 모습인 뱀파이어의 대적자예요. 불로불사인 뱀파이어를 사냥하기 위해 신에게 직접 마법을 배운 사람에서 기원한 특성이거든요.”

“뱀파이어는 심장에 말뚝이 박히거나 태양 빛을 쬐면 죽는 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죽는 건 어리거나 피가 옅은 뱀파이어입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거의 진조(眞祖)나 다름없는 존재니까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아마 안 죽을 겁니다.”

“그럼…… 세트라고 했던 규하 씨의 특성도 같은 거예요”

현규하는 표정을 풀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가, 어두컴컴한 곳에서는 인유신에게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고는 이마에 다시 입을 맞췄다.

“우리의 특성을 최초로 가진 사람들의 운명을 신이 거두지 않고 대대로 이어지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세트로 묶이긴 하는데……. 나는 뭐, 그냥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이라서 붙은 거죠. 유신 씨에 비하면 별거 아니에요.”

“…….”

“뱀파이어도 신도 없는 이쪽 세상에서 어떻게 유신 씨가 그 특성을 갖고 태어났는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최초로 특성을 발현한 이들의 운명을 짐짓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며 넘겼다. 다행히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놀란 인유신은 그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다만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결심하여 입을 열었다.

“규하 씨 아버지가 사람들의 상태창을 다 볼 수 있는 거예요”

현규하는 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어둠 속에서 표정을 굳혔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으면 했는데, 역시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거짓말을 할까.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일 터다. 하지만 이것마저 그에게 거짓을 고할 수가 없었다.

“신도 사람의 운명이라든가 능력을 전부 볼 수 없는 것처럼, 아버지도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을 탐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확신할 수는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제 특성을 잘 숨길게요.”

인유신은 가만히 손을 올려 현규하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둠에 잠겨 있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손끝에 와닿았다.

“규하 씨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그런데도 같이 가고 싶어 하는 건 순전히 제 이기심이겠죠. 정말 죄송해요…….”

현규하가 한숨처럼 낮게 침음하며 인유신의 손을 겹쳐 쥐었다. 붙잡힌 손바닥에 닿는 입술의 자취가 화인처럼 뜨겁게 번져 왔다. 그 열기 속에 느껴지는 두려움과 떨림에, 인유신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을 이 남자가 자신의 앞에서는 터무니없을 만큼 약해진다. 그의 약점이라는 게 결코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유신은 절실히 알고 있다.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그의 짐이 되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곳에 나 홀로 남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 감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지독한 이기심이다.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이기심.

그리고 현규하라는 사람의 손이, 자신을 붙잡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이기심. 죽음의 순간에 가치를 매기던 자신이,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되는 것을 품을 수 있길 바라는 이기심.

현규하의 진심에서 서서히 비롯된 이 변화가 반드시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의 그 무엇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의미를 부여하는 그를 보노라면, 자신도 더 이상 정체하지 말고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만이 세상에 어떤 자취도 남기지 못할 만큼 평범하고 별것도 아닌 자신을 진심의 한가운데에 품은 그에게 미약한 보답이 될 테니까.

“그래도 제가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끝내 그가 안 된다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을 테지만, 현규하는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입술을 가늘게 움직였다. 입술이 달싹거리자, 그의 입과 뺨을 감싼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그게, 유신 씨의 진심인가요”

옅은 호흡에 섞여 피부를 간질이는 낮은 속삭임이 간곡하여 인유신은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방금까지 손으로 감싸고 있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약간 갈라지고, 거칠거칠한 감촉이 느껴졌다.

현규하는 순간 호흡하는 것마저 잊은 듯했다. 호응조차 하지 못하고 굳어 있던 그는 발을 높이 드는 게 조금 힘들어진 인유신의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거칠게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겹친 살덩이가 입술을 더욱 크게 벌리며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스치는 모든 곳이 델 것처럼 홧홧하게 뜨거웠다. 입천장을 짓누르듯 긁고, 난폭할 정도로 문지르는 살덩이는 인유신의 숨결을 조급하게 훔쳤다. 마치 그것에 매달리는 것처럼.

달아오른 숨이 타액에 질척하게 섞여 호흡이 버거웠다. 그렇지만 인유신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밀어 내는 대신 더욱 힘주어 붙잡았다. 가쁘게 허덕이는 숨구멍으로 익숙한 체향이 훅 밀려들어 왔다.

목뒤를 감싼 커다란 손이 어깨까지 감아 누르며 얽어맸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감싸인 압박감이 오히려 기껍다. 저릿한 감각이 그에게 억눌린 피부만이 아니라 전신을 관통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목구멍 안까지 점령할 것처럼 깊이 밀려들어 온 혀가 적나라한 물소리를 남기며 아쉽게 떨어졌다.

“후아…….”

그제야 인유신은 막혔던 숨을 헐떡이며 몰아쉬었다. 다시 한번 겹치는 듯했던 입술은 쓴웃음을 매달더니 깊이 겹쳐 오는 대신 새가 쪼는 것처럼 가벼운 키스를 떨어트렸다.

인유신은 발갛게 부은 입술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서 힘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여름밤의 선선한 바닷바람이 달아오른 피부를 조금 식히고 난 뒤에야, 부풀어 오른 열기로 아랫배까지 뻐근하다는 걸 깨달았다.

뺨이 다시 화끈 달아올랐다. 그의 허벅지에 꽉 밀착되어 있었으니 현규하도 분명히 눈치를 챘을 것이다. 슬쩍 허리를 뒤로 빼자 현규하가 작은 웃음을 물며 그의 귓불을 잘근 깨물었다.

“안 달려 있다면서요.”

“어, 그, 8, 8세가 주머니에 들어가서…….”

“팔놈보다 묵직하던데.”

“6세도 같이…….”

“왼쪽 허벅지에 비비적거린 게 아니라서 내가 참았습니다.”

그의 왼쪽 허벅지에 뭐가 수납되어 있는지 떠올린 인유신의 얼굴은 빨개졌다가 하얘지기를 반복했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현규하가 인유신의 허리를 붙잡고서 가뿐히 들어 올려 펜스에 앉혔다. 처음으로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는데, 어두운 밤이라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렇게 인유신을 올려다보는 채로, 현규하가 낮게 속삭였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 않기로.”

“거기에 가면 규하 씨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싸돌아다니지 말라고 밀실에 가둬도 탈출 시도 안 하고 얌전히 있을게요.”

“딱 내 사이즈에 맞는 케이지를 하나 만들어서 주인님이 날 달랑달랑 들고 다닌다면 그나마 안심할 텐데 말입니다.”

“…….”

그 반대여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쨌든 인유신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호응했다.

밑에서 속눈썹을 깜빡거리면서 올려다보는 현규하의 시선이 뭔가를 요구하는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말랑말랑한 입술에 숨결이 섞였다. 정답이었나 보다.

거칠었던 키스로 인해 아까보다는 매끄러워진 그의 입술 사이로 살짝 혀를 밀어 넣으며 인유신은 몰래 다짐했다.

‘다음에는 환할 때 규하 씨보다 높은 곳에 앉혀 달라고 해야지.’

마치 그에 답하는 것처럼, 현규하가 혀를 감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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