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214)
  • 일단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잠에서 깨어나고 슬슬 활동 시간이 된 6세가 사료를 먹는 가운데, 거실에서 다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삐에엣!”

    『®ÀÇ와 한 번은 연결되어야 그 힘을 이용해서 잠깐이나마 애인님에게 말을 걸 수 있었던 건가 봐. 8세는 처음부터 그걸 위해 이쪽 세계로 건너온 거라고 하는데 자기도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죽은 왕의 계획이었대.』

    “진짜요 8세를 선물로 받았을 때 자칫하면 죽일 뻔했는데…….”

    “미웅.”

    『그렇게 되어도 계획대로 하라고 강요하지는 못할 노릇이니 어쩔 수 없었을 거래. 그리고 죽은 왕이 자기 말고도 손이 닿는 데까지 이번 일을 위한 여러 안배를 해 두었다고 해.』

    8세의 말을 통역해 준 솜노로스가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렸다.

    『®ÀÇ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두 왕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어』

    “뮤우웅.”

    『그것도 몰라 너는 아는 게 뭐야』

    “삐우!”

    『나보다는 더 잘 아는 건 당연하잖아! 나는 그동안 고향의 소식을 듣지도 못했다구!』

    왠지 입씨름을 하기 시작한 둘을 남겨 두고 현규하는 인유신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고모가 ®ÀÇ로 갈 확실한 방법을 알려 줬단 건 맞죠”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인유신을 보며 현규하가 낮은 한숨을 뱉었다.

    “유신 씨를 이용했다니 정말 짜증이 납니다만…….”

    “혹시 제 히든 특성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요”

    “……젠장.”

    이유는 모르겠지만 히든 특성 이야기를 꺼내니 현규하는 더 언짢아하는 낯이 되었다. 기분 풀라는 뜻을 담아서 손등을 살살 문지르니 현규하가 표정을 풀며 손가락으로 깍지를 꼈다.

    손을 감싸는 체온을 느끼면서 인유신은 스토야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강요하는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녀는 인유신이 이아드로 동행하길 은연중에 바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인유신의 바람과도 같다.

    “그, 세계의 틈이라는 거 말이에요.”

    제 동공보다도 작은 햄스터와 아웅다웅하고 있던 솜노로스가 눈동자를 돌렸다.

    “세계의 틈을 통하면 여럿이 지나갈 수 있는 거예요”

    『응. 마수들도 가끔 헤매다가 튀어나오는걸. 내가 철의 시대로 올 때도 그 틈으로 건너왔는데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

    현규하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에도 틈으로 나온 마수를 봤으니 어지간하면 남아 있겠지.”

    “규하 씨, 저…….”

    “안 됩니다.”

    뭐라고 용건을 꺼내기도 전에 현규하가 인유신의 말을 칼같이 잘랐다. 평소 인유신을 대할 때의 물렁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함이었다.

    “저도 규하 씨랑 갈래요.”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그곳은 멸망하는 세계입니다. 한우도 치킨도 못 먹는다니까요.”

    “단백질 보충제만 삼시세끼 먹어도 상관없어요.”

    “저번에는 단백질 보충제 먹기 싫다고 도망갔었잖아요.”

    “그때 더 큰 문제는 헬스였는데요!”

    “아무튼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 태도였다. 설득할 방법을 찾기 위해 인유신이 이맛살까지 찌푸리면서 고민하는데 공태성이 슬쩍 끼어들었다.

    “여럿이 동행해도 된다면 내가 가서 직접 안나의 해약을 찾고 싶다만.”

    “마음대로 해.”

    현규하는 인유신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공태성에게 선선히 승낙의 말을 건네며 혈액 샘플까지 돌려주었다. 인유신은 어이가 없었다.

    “길드장님은 되는데 저는 왜 안 돼요”

    “주인님이랑 공태성이 같아요”

    “뭐가 다른데요”

    “공태성은 죽든 말든 아무 상관 없지만 유신 씨는 그게 아니잖아요.”

    “사랑싸움은 나 빼놓고 하지”

    빙빙 돌아오긴 했지만 어쨌든 원래 계획대로 이아드로 갈 수 있게 된 공태성은 소파에 편안히 기대었다. 인유신은 약이 더 올랐다.

    “어차피 틈의 위치는 고래도 알고 있잖아요. 규하 씨가 싫다고 해도 고래랑 갈 거예요.”

    『맞아! 애인님이 어린애도 아니고 자기가 결정해서 간다는데 왕자님이 왜 반대해 왕자님은 소중한 사람의 의견도 존중하지 않는 나쁜 사람이야!』

    “봐요. 고래가 보기에도 이상하다잖아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소중한 사람이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을 거다, 라고 했던 솜노로스는 급격히 태세를 전환해서 인유신에게 붙었다. 재빠른 생존 본능이었다.

    “유신 씨를 재우고 몰래 갈 방법 따위야 많습니다.”

    “절 안 데려가면 고모님께 들은 방법 얘기 안 해 줄 건데요.”

    “찍! 찌이익!”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적이고도 유치한 말다툼은 시끄러워서 짜증이 난 6세의 신경질적인 울음소리에 중단되었다. 인유신은 굽신굽신 사과하며 간식을 꺼내서 바쳤다.

    현규하가 곤란해하는 기색으로 이마를 쓸었다.

    “유신 씨,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도 있잖아요. 연세도 많은 노년의 누나를 혼자 두려고요 그렇다고 해서 누나까지 데리고 갈 수도 없잖아요.”

    “그건…….”

    말문이 턱 막혔다. 안 그래도 나이가 많은 데,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는 6세를 혼자 남기고 다른 사람에게 의탁한다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다쳐도 숨기려고 하는 햄스터이니 더욱.

    “게다가 세계가 멸망하는 도중이라는 건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막말로 아포칼립스나 험악한 디스토피아 세계일 가능성도 있어요. 그런 곳에 유신 씨를 데려가라고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안 가겠습니다.”

    “…….”

    어떡하지. 평생의 염원이나 다름없던 길을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얘기까지 하는 걸 보니 어떤 설득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를 혼자 보내는 것도, 그가 자신 때문에 원하는 일을 포기하게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인유신이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햄스터 케이지 위에 걸터앉아서 공태성의 호주머니에서 훔친 사탕을 핥아 먹고 있던 8세가 외쳤다.

    “피욧! 삐우우!”

    솜노로스가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현재 ®ÀÇ가 여기만큼 풍요롭지는 않아서 좀 팍팍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이라는데 특히 이 나라가 있는 반도는 상황이 훨씬 낫대.』

    말다툼에 신경을 끄고 휴대폰으로 민안나의 영상을 보고 있던 공태성도 한마디 얹었다.

    “일리가 있군. 생기가 고갈된다는 건 적어도 하루아침에 재난이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뜻 아닌가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적응할 수단을 찾았겠지.”

    “뿌웃.”

    『자기처럼 작은 동물들도 있대. 햄스터가 어떤 동물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애인님을 만나기 전에 변하고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해.』

    인유신은 빤히 현규하를 응시했고, 그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과 함께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동행 문제를 제외한 다른 얘기는 마무리되자 공태성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당장 의견을 좁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그 문제는 천천히 대화로 풀어 봐라. 그보다 현규하, 묻고 싶은 게 있다만.”

    “뭐.”

    “왜 햄스터를……. 아니다. 됐다.”

    어째서 햄스터를 꼬박꼬박 누나라고 부르냐는 의문을 가졌던 그는 ‘현규하니까.’라는 대답을 알아서 도출하고 납득했다.

    솜노로스의 계약을 다시 받은 공태성이 떠나자, 별장 안에는 갑작스러운 정적이 내려왔다. 햄스터 두 마리의 생활 소음만이 들리는 기묘한 정적 속에 현규하는 인유신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유신 씨나 나나 머리를 조금 식혀야 할 거 같아요. 오늘 피곤했을 텐데 일단 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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