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214)

“네니요.”

“……”

이상한 대답에 슬그머니 고개를 드니 현규하가 나직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난스러웠던 대답과는 상반되는 가라앉은 눈초리였다.

“당연히 자고 싶긴 하죠. 유신 씨의 피부를 핥으면 얼마나 달콤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하얀 피부에 내 흔적을 잔뜩 새기고 싶기도 하고, 달아오른 유신 씨가 어떤 얼굴로 날 바라볼지 무척 보고 싶기도 하고.”

구체적인 상상까지는 하지 못했던 인유신은 얼굴만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현규하는 새빨갛게 붉어진 그의 귓불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그것만으로도 어깨를 흠칫하며 눈을 꼭 감는다. 내리뜬 속눈썹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파르르 떨리는 얇은 눈꺼풀의 온기가 그의 심장을 홧홧하게 달구었다.

이대로 키스하며 깊은 곳까지 손을 움직이면, 인유신은 순순히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르겠지. 그다음은 아마 무척 손쉬운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규하는 얕은 입맞춤으로 가슴 안에서 들끓는 욕망을 눌렀다. 아랫입술을 조심스럽게 핥으며 입 안을 톡톡 건드리던 혀를 거두자 인유신이 호흡을 잘게 할딱거렸다. 그의 모든 숨결을 낱낱이 훔쳐 제 것으로 하고 싶다는 갈망이 당장에라도 격렬하게 튀어 오를 것만 같다.

현규하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인유신의 어깨에 이마를 문대었다. 자신은 아직 그를 붙잡지 못한다.

그의 마음과 제 마음은 그 크기도, 색도, 욕망도, 다르다. 제 안에서 들끓는 욕구를 거침없이 풀어헤친다면, 그는 속절없이 그에 휩쓸려 익사하고 말 것이다.

적어도 그를 온전히 붙잡아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언젠가 위태로울 때 어깨 정도는 기대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당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로 인해 알게 된 사랑을, 다시 당신에게 온전히 알려 줄 수 있게 되었을 때.

하여 현규하는 이 욕망을 온건하게 감싸기 위해 노력하며, 속삭였다.

“솔직히 내가 한동안 멀리 떠나 있을 예정이니까 괜히 쫓기는 것 같은 마음도 없잖아 있죠 그래서 아까 같은 말을 한 거죠”

“……하지만 규하 씨가 떠나면 언제 보게 될지 모르잖아요.”

“돌아올게요.”

“제가 할아버지가 되면 어떻게 해요.”

“할아버지가 되어도 관계는 가질 수 있습니다.”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인유신이 속상한 눈으로 바라보자, 현규하는 눈가를 가늘게 휘며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은 준비해야 할 용품들도 안 갖고 왔고요.”

“아…….”

“무엇보다 공태성 별장이잖아요. 여기서 하기에는 좀, 그렇죠”

그건 확실히 그랬다. 현규하가 멀리 떠난다는 조급한 마음에 여기가 숙박지도 아니고 며칠 빌린 별장이라는 걸 망각했던 인유신은 조금 낙담했다. 현규하가 만지작거리던 인유신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으며 그를 더욱 당겨 안았다.

“우리,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휴가 동안 즐겁게 지낼 고민만 해요.”

일정한 속도로 두근두근 맥동하는 현규하의 심장 소리가 맞닿은 피부로 부드럽게 번졌다. 인유신은 그 다정함에 감싸인 채 현규하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이 따스함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남은 휴가 동안, 현규하의 말처럼 오직 즐겁게 보내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낯선 환경이었지만 주인과 함께하자 6세도 스트레스 없이 적응했다. 한번은 케이지에서 탈출하여 창밖 구경을 하기도 했다.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빠르게 내달려 간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타오르는 듯한 진홍색으로 물들인 노을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별장에서 보내기로 한 마지막 날이었다.

인유신은 차에서 내리는 공태성을 보지 않으려 괜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하면 이 시간이 무한히 연장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공태성은 별장의 뒤뜰에 있는 그들에게 뚜벅뚜벅 걸어왔고, 어느새 나타난 솜노로스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왕자님! 애인님! 안녕!』

발끝으로 흙바닥만 톡톡 차고 있던 인유신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공태성이 손바닥만 한 사각형의 케이스를 현규하에게 건넸다.

“안나의 혈액 샘플이다. 부탁하마.”

“장담은 못 해.”

케이스를 갈무리한 현규하는 아까부터 말이 없는 인유신의 정수리를 매만졌다.

“그런 표정으로 나 배웅할 거예요”

인유신은 대꾸 없이 얼굴만 내저었다.

아공간에서 공태성과 수백언에게 받은 히든 보스의 결정석을 꺼낸 현규하가 그곳에 인유신의 손을 잡아 얹었다. 인유신은 체온 같은 온기가 느껴지는 결정석의 표면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열쇠를 완성하면 현규하도 떠난다.

“내키지 않으면 나 혼자 할머니 만나고 올까요”

“……아니요.”

반사적으로 결정석을 조금 힘주어 잡았다. 결정석에 마나를 주입하면 현실과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광경을 보게 된다. 현규하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내고 싶었다.

인유신의 손등에 제 손을 겹친 현규하가 마나를 주입했다. 삽시간에 사위가 어둑하게 변하고, 일곱 개의 별빛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보았던 광경이다.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데, 실상은 겨우 몇 달 전에 불과한 과거.

- 도와줘.

그때와 똑같은 소녀의 음성에 이어, 서쪽과 남쪽에서 빛나는 별 아래에 선 두 노인이 아득한 시간 너머에서 현규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를 흘리는 사람들과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림자에 비쳤다. 변함없는 멸망의 징조다. 종말로 치닫는 세계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성인.

수요일의 성인, 스픈타 미에르쿠리.

일요일의 성인, 스픈타 두미나커.

현규하는 별다른 말 없이 노인들을 응시하기만 했고, 그들은 몹시도 힘겹고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가 가게 될 이아드에서도, 이토록 고된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런 상념들이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하면 더없이 울적해진다.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 세상은 다시 노을이 뉘엿뉘엿 저무는 뒤뜰로 돌아와 있었다.

현규하가 살덩이나 진배없이 변한 열쇠들을 한곳에 모았다. 크고 작은 살덩이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스토야의 심장’을 획득했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현규하의 손바닥에 놓인 주먹만 한 크기의 선홍색 살덩이는 정말 심장처럼 보였다. 마치 당장에라도 두근거리며 맥동할 듯이 생생한 핏기가 도는 심장.

공태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열쇠란 게 심장이었나”

그 말을 물론 현규하는 무시했지만, “땅속에 묻혔다는 그분의 심장이에요”라는 인유신의 질문에는 상냥하게 설명했다.

“맞습니다. 우리 주인님은 얼마나 재기가 넘치는지.”

“그냥 메시지만 읽은 건데…….”

“백날 메시지 떠 봤자 지식으로 활용 못 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예를 들어 공태성.”

“하아.”

지은 죄가 있는 공태성은 다혈질답지 않게 한숨만 쉬었다.

“고모도 엄연히 아버지처럼 ®ÀÇ를 지탱하는 왕이니까, 나중에 내가 ®ÀÇ로 가는 열쇠를 찾을 수 있도록 고모가 심장을 조각내서 뿌린 거라고 해요. 심장을 통째로 뿌리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고요.”

『왕자님 아버지랑 구분하기 위해 보통 죽은 왕이라고 불러!』

“저번에 봤던 그 펜던트에 담긴 건 고모의 피였고요.”

“심장이 없는데 살아 있으세요”

“지하에 묻히면서 명계의 주민이 되었다더군요. 육체는 불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죠.”

질문하면서 미적미적 시간을 끌었지만 더는 뭘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솜노로스가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허공에서 둥글게 헤엄쳤다.

『왕자님! 빨리 나랑 계약해서 데려가 줘!』

“여기에서도 도움이 안 됐는데 거기 가 봤자 쓸모가 있나”

“여기에서 잠만 자는 것보다는 낫겠지.”

『둘 다 너무해!』

솜노로스의 커다란 눈이 울먹울먹했다.

“고래인 척해 봤자 본체는 물고기인데 무슨 어류가 눈물을 흘리지”

쌀쌀맞은 말과는 달리 현규하는 솜노로스와 계약을 맺었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신어(神魚) 솜노로스’와 계약했습니다.]

……이제 정말 준비가 다 끝났다.

머뭇머뭇하는 인유신의 손을 잡은 현규하가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그의 앞에서는 늘 부드러운 입매가 온화한 호선을 그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외출하는 것처럼. 곧 다시 볼 수 있을 것처럼.

현규하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일부러 가벼운 언행을 취하는 걸 알고 있는 인유신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천천히 와도 되니까요, 규하 씨가 하고 싶은 거 다 끝내고 오셔야 해요.”

“시간이 흐르는 게 다르다면 5분 만에 돌아올지도 몰라요. 그때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 있더라도 버리지 마세요.”

인유신은 말없이 현규하의 손만 꼭 쥐었다. 그리고 그는 ‘스토야의 심장’에 마지막으로 마나를 주입했다. 선홍색 심장에서 피가 번지는 것 같은 선혈의 빛 무리가 휘황하게 밝혀졌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소유한 ‘스토야의 심장’을 사용합니다.]

[이아드와의 통로가 연결되었습니다.]

[남은 시간  05분 00초]

이아드로 통하는 문은 불길하리만큼 선명한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인유신은 제 감상을 얼른 지웠다. 불길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와의 이별 때문에 울적해진 탓이다.

인유신은 그의 기억에 웃는 얼굴로 남기 위해 힘들게 표정을 다듬었다. 현규하의 입가에도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올라왔다.

“유신 씨, 나중에 내 변호사를 찾…….”

그때였다.

“삐잉!”

어느 틈엔지 인유신의 정수리로 기어 올라와 있던 8세가 사지를 쫙 펼치며 뛰어내렸다. 다리 사이에서 익막을 펼친 8세는 허공을 활공했고, 끝을 날카롭게 가다듬은 꼬리를 낙하하는 속도까지 실어 길게 뻗었다.

푹! 꼬리가 심장을 관통하는 파육음이 한 차례 울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발생한 일이었다. 두 명의 S급 헌터들마저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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