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기의 해변은 대부분이 비슷한 기억일 것이다. 빼곡한 파라솔과 바다를 보러 갔는지 사람을 보러 갔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의 인파. 보육원에서 바닷가에 놀러 갔던 적이 있는 인유신의 감상도 비슷했지만 이번에는 바꿔야 할 듯했다.
“여름 바닷가가 이렇게 조용할 수도 있었네요.”
“별로예요”
“완전 좋아요.”
파도치는 소리만 들리는 한적한 사유지는 최고였다. 다음에 공태성을 보게 되면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피요오…….”
8세도 바다가 마냥 신기한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는 지하에서만 지내면서 밤에만 땅으로 올라온다고 했었던가. 그렇다면 이만큼 넓고 푸르른 수평선을 보는 건 8세도 처음일 터였다.
“바닷물 되게 짜. 마시면 목이 더 마르니까 먹으면 안 돼. 알았지”
“찍!”
8세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서 얕게 고인 바닷물을 핥았다가 퉤 뱉었다. 생마늘도 잘 먹는 녀석이 바닷물은 못 먹겠나 보다.
그렇게 8세와 놀고 있는 동안 별장에 짐을 푼 현규하가 옷 가방을 들고 나왔다.
“유신 씨, 물에 들어가기 전에 수영복으로 갈아입어요.”
가볍게 내민 수영복을 받아 든 인유신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이거 뭔데요”
“수영복이요.”
“이게요”
“주인님의 합법적인 노출을 위해서지요.”
인유신은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삼각 수영복을 기함해서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수영복이 아니라 티 팬티 같았다. 이딴 걸 입느니 그냥 반바지를 입고 들어갈 것이다.
“나랑 커플 룩인데 입기 싫어요”
시무룩한 목소리에 고개를 올린 인유신은 그가 쥐고 있는 또 다른 삼각 수영복을 보고야 말았다. 저절로 미간에 골이 파였다. 현규하가 저걸 입으면…….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못 입을 거 같은데.
그 표정을 읽었는지 현규하가 수줍은 듯 뺨을 붉혔다.
“미리 입어 보지는 않았는데 다 못 넣을 거 같긴 해요. 사실은 국내에서 파는 드로어즈도 사이즈가 안 맞아서 해외 직구로 사고 있거든요.”
“그럼 왜 굳이 삼각형으로 입으려는 건데요!”
“커플 룩.”
“다른 건 없어요”
“없는데.”
뺀질뺀질한 얼굴을 보니 다른 수영복이 더 있는 게 확실했다.
“8세야! 붙잡아!”
“삥!”
8세가 용맹하게 현규하의 손목에 꼬리를 길게 뻗어 휘감은 사이에 인유신은 얼른 옷 가방을 뒤져서 래시 가드를 찾아냈다. 다행히 레깅스 위에 반바지를 입을 수 있는 스타일이었다.
수작업한 햄스터 자수 패치가 붙어 있는 래시 가드를 들고 인유신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역시 커플룩으로 래시 가드를 입은 현규하를 보니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규하 씨. 저번에 연구원에서 물에 젖었을 때요, 팬티를 제가 사 왔잖아요. 그때 제대로 못 입었던 거예요”
“당연히 사이즈는 안 맞았죠. 어디가 어떻게 안 맞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아뇨! 알 거 같아요!”
“그래도 그 속옷은 잘 갖고 있어요. 유신 씨가 준 선물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인유신은 멈칫했다. 지금까지 현규하에게 준 선물이라고 할 만한 게 편의점에서 산 팬티 쪼가리뿐이었다.
뒤늦은 깨달음에 당황한 인유신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씩 웃은 현규하가 그의 정수리에 입술을 살짝 눌렀다.
“누구도 줄 수 없는 걸 주었잖아요.”
“그래도요…….”
“열쇠를 찾으러 던전을 뒤지지 않는 나날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건 유신 씨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겁니다. 당신은 정말, 나에게 봄 같은 사람이에요.”
그러면서 현규하는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꿉꿉한 내 얘기는 그만하고, 즐겁게 스트레칭부터 합시다.”
준비 운동을 끝내자 현규하는 인유신을 높이 들어 바다로 풍덩 빠트렸다. 즐거운 비명이 흩어졌다.
해가 질 때까지 실컷 놀다가 바비큐도 구워 먹었다. 같이 씻으려는 현규하를 힘들게 욕실에서 밀어 낸 인유신은 여전히 자신을 감도는 물놀이의 여운을 느꼈다.
‘바닷속 구경을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몰랐어.’
몸을 역장으로 둥글게 감싸고 잠수하니 물안경도 산소통도 필요 없이 가뿐하게 수면 아래를 구경할 수 있었다. 공기가 제한적이니 몇 분 안에 올라와야 하는 단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현규하의 말마따나 즐거운 하루였다. 그와 보내는 하루하루가 늘 그러했던 것처럼.
인유신은 욕실 거울로 제 얼굴을 비춰 보면서 오른쪽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전공자에게 문의한 결과, 문양의 쐐기 문자는 수메르어로 명계를 뜻하는 ‘쿠르’였다.
이 아티팩트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했는데 끝내 사용처를 찾지 못했다.
“8세야. 이거 왜 획득하라고 한 거야”
“뀽”
세면대 안에서 비누 거품을 잔뜩 내고 있던 8세가 얼굴만 갸웃했다. 인유신은 그냥 픽 웃고 말았다. 현규하가 무사히 모든 열쇠를 다 찾았으니 그걸로 된 거겠지.
그 사실을 떠올리자 복부 깊은 곳으로부터 쓴맛이 올라오는 것 같았기에 인유신은 서둘러 몸을 씻었다.
밖에서는 현규하가 잠자리 준비를 다 끝내 놓고 있었다. 침대에 옆으로 누워서 보란 듯이 손으로 탁탁 두드리는 빈자리에 잠자코 눕자, 그는 오히려 놀라워했다.
“뭐라고 안 해요 쫓겨날 마음의 준비까지 다 하고 왔는데”
인유신은 어떻게 말문을 떼야 할지 고민했다. 씻으면서 생각은 마쳤는데도 머릿속에서 통 이어지지 않는다. 마른침만 하릴없이 꼴깍 넘어갔다.
결국 인유신은 옆으로 누운 현규하의 어깨에 이마만 콩 박았다.
“무슨 일 있어요”
장난기를 거둔 현규하가 그의 목 밑으로 팔을 넣어 가까이 당겨 안았다. 느린 숨결이 인유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흐트러트리는 감촉도, 다독거리는 것처럼 천천히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인유신은 제 마음을 천천히 돌이켜 보았다.
현규하의 마음이 진심이냐, 물으면 이제는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뇌리를 내리치는 극적인 순간만이 깨달음은 아니다.
〈내 진심도 바로 그래요. 유신 씨가 보던 평소의 나였어요.〉
일찍이 그가 말했던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이, 자신과 나누는 일상의 모든 조각들이 진심이었다. 어떻게 그것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나, 지금은 정말 당신을 붙잡고 싶어. 근데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모르겠어.〉
적반하장으로 굴었던 자신에게 노여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절박하게 붙잡으려던 사람을.
〈돌아올 방법을 반드시 찾아볼게요.〉
자신의 곁으로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사람을.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떻지
인유신은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용렬하고 이기적인 자신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안온함을 놓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가 지닌 삶의 무게에 비하면 제 존재가 터무니없이 하찮아, 그를 붙잡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유신은 이렇게 멍청한 말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심스러움에 울적한 기분으로 입술을 잘게 움직였다.
“규하 씨는, 저랑 자고 싶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