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 않은 용건을 다하고, 공태성의 아파트에서 나와 돌아오는 길이었다. 주차한 바이크에 타기 전에 인유신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규하 씨.”
“응”
“저랑 떨어지면 규하 씨가 그게, 그렇잖아요. ®ÀÇ로 완전히 넘어가도 괜찮은 거예요”
인유신이 동요하지 않도록 평소와 같은 태도를 유지하던 현규하의 평정심이 흔들렸다. 그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인유신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밀착했다.
달라붙을 것처럼 피부가 닿고, 잔잔한 숨결이 피부를 쓸었다. 어쩐지 손끝이 저릿한 기분이라 인유신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괜찮다고 하고 싶지만 그건 너무 뻔한 거짓말이고…….”
“…….”
“어떻게든 참아 봐야죠. 그래도 내가 분리 불안을 느낀다면 유신 씨와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그건 나쁘지 않네요.”
그는 짐짓 너털웃음을 지으며 인유신의 굳은 입매를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돌아올 방법을 찾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불안해서 마음이 쪼이는 느낌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나를 채찍질할 테니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올지도 모르죠.”
“……저도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거기 가면 유신 씨가 좋아하는 닭 가슴살도 한우도 마음껏 못 먹을걸요”
“규하 씨랑 있으면 안 먹어도 돼요.”
“주인님을 잡아먹고 싶어지는 말을 하는 게 요 입인가요”
현규하가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새가 쪼는 듯한 키스를 입술에 쪽쪽 떨어트렸다.
“인공적인 단백질 보충제 같은 건 많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 그건 좀.”
“주인님을 벌크업하게 할 기회인데 아쉽군요. 대신 당신이 좋아하는 몰랑몰랑한 뱃살을 내가 만들어서 올 테니까 기대해도 좋습니다.”
뱃살이 붙든, 허리 살이 붙든, 건드리면 데굴데굴 구를 것처럼 온몸에 오동통한 살이 찌든, 뭐가 되든 괜찮으니까 돌아오기만 하면 좋겠다.
“그런 것보다 우리 여름휴가나 고민해 봐요. 어디 가고 싶어요”
“규하 씨랑 같이 지낼 수 있는 조용한 곳이면 좋을 거 같아요.”
“음, 해변가의 별장이 생각나지만 내가 부동산에 별 관심이 없어서 갖고 있는 게 없네요.”
현규하는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한마디만 했다.
“프라이빗 비치 붙은 별장 내놔.”
통화는 길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현규하는 상큼하게 웃었다.
“별장 획득했습니다. 강화도에 있다네요.”
“누구예요”
“공태성이요.”
어쩐지 삥을 뜯는 것 같아서 미안했지만, 그가 현규하를 죽이려 했던 걸 떠올리니 미안함은 햇살에 녹는 눈처럼 사르르 사라졌다.
인유신은 조금 뻔뻔해지기로 했다. 현규하와 같이 보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남한테 폐가 되든 말든 그와 찰싹 붙어 있을 거다.
이윽고 시동을 걸고 출발한 바이크의 뒷자리에서 인유신은 현규하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현재 상태 애정. 살의. 망설임.]
평생 동안 찾던 목표를 이루었음에도 그의 감정을 지배하는 건 희열이 아니었다. 그의 망설임에 불온한 기쁨을 느끼는 자신이 참 나쁜 놈 같았다. 인유신은 다만,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하루하루가 빠르게 흘러갔다.
내외하는 듯했던 헌터업무담당과의 명물은 다시 붙어 다니면서 염장질을 하게 되었고, 최진혁은 오히려 그게 낫다면서 피식 웃었다. 인유신은 현규하의 트레이닝을 받으며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심지어 등산도 같이 했다. 도중에 뻗어 버리는 바람에 현규하에게 들려 가긴 했지만.
영화관 데이트도 드디어 했다. 허벅지 안쪽으로 슬금슬금 기어 들어오려는 현규하의 손을 경계하는데 바빠서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현규하가 인유신의 손목을 덥석 잡아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을 때는 영화관에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날 밤늦게까지 인유신은 사라지지 않는 손바닥의 감촉 때문에 끙끙거려야 했다. ……사람이 그렇게 양심 없는 사이즈여도 되는 건가
‘주인님 내조’라는 휴직 사유를 본 김 과장이 반려하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휴직도 무사히 처리되었다.
그리고 여름휴가 첫날이 되었다.
남의 별장을 강탈하다시피 빌리긴 했지만 현규하와 가는 첫 여행이다. 인유신은 ‘첫 여행’이라는 사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따위는 하지 않으려 애썼다. 전날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한 것도 분명히 설렘 때문일 것이다.
짐은 다 쌌다고 생각했는데도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은 어쩐지 어수선하게 바빴다. 인유신은 마지막으로 소분해서 담은 햄스터 사료와 간식을 꼼꼼히 챙겼다. 택배가 도착한 건 그 무렵이었다.
“규하 씨, 택배 좀 받아 주실 수 있어요”
“뜯어서 분리수거도 해 놓을까요”
“그렇게 해 주시면 고맙죠.”
여전히 그에게 경계심을 풀지 않는 6세의 케이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현규하가 택배를 받았다. 송장을 뜯고 상자를 정리하는 소리가 부스럭거리면서 들렸다.
‘오늘 택배 오기로 한 게 뭐였더라 아! 그거!’
공구를 신청한 지 꽤 시간이 지나서 깜빡하고 있었다. 뵤규하, 그러니까 햄스터 현규하 인형이 배송되는 날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현규하는 뵤규하만이 아니라 뀨뀨까지 들고 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히 입고 있었을 인형의 옷까지 다 벗기고.
“뵤규하 인형도 진짜 귀엽게 잘 만들었죠 아, 당연히 규하 씨가 더 귀엽지만요!”
급히 덧붙인 마지막 말에 현규하가 귀를 쫑긋하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예전부터 인형 놈 볼 때마다 느낀 건데, 중요한 게 없네요.”
“뭐가요”
“여기요.”
인형을 들어 올린 현규하는 홀딱 벗고 알몸이 된 인형의 가랑이 사이로 중지를 밀어 넣어 까닥거렸다.
“우회적인 표현으로는 그곳. 정확한 표현으로는 ㅈ…….”
“잠깐만요.”
“관절도 없고 비정상적인 길이인 짧은 다리의 비율을 고려하자면 아마 여기까지는…….”
“뀨뀨는 그런 흉측한 거 안 달려 있어요!”
인유신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인형을 빼앗았다.
“네에 유신 씨 가랑이에도 달려 있는 건데요”
“안 달려 있는데요! 없는데요!”
“그럼 나한테 달려 있는 거 보여 줄까요 주인님에게만 고백하는 현규하의 탑 시크릿. 머리칼이랑 똑같은 색깔이…….”
“그딴 건 고백 안 들어도 알아요!”
아침부터 진을 뺀 인유신은 허우적거리면서 옥탑방을 나왔다. 한 손에는 6세의 케이지를 든 현규하와 함께.
뒤늦게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저희 강화도까지 어떻게 가요”
“그야 나로서는 주인님이 나한테 앙앙 울면서 매달리는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만.”
“…….”
“노인 공경 차원에서 운전기사를 고용했습니다.”
“노인요”
“정정한 노익장이긴 해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의 춘추가 2살이 넘었잖아요.”
인유신은 암막 커버를 씌운 케이지 안에서 자고 있을 6세를 떠올렸다. 8세도 6세를 돌보기 위해 같은 케이지 안에 있었다. 이번 여행이 6세도 즐거웠으면 좋겠다.
유춘 시리즈 중의 하나를 타고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을 나가니 검은색의 기다란 리무진이 주차되어 있었다.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제복까지 갖춰 입고 인사하는 기사에게 덩달아 고개를 숙인 인유신은 희한하다는 시선을 현규하에게 돌렸다. 어떻게 리무진에 운전기사까지 고용한 거지
영화에서나 봤던 리무진 안에 어색하게 들어갔는데 내부는 상상 이상으로 쾌적하고 넓었다. 목이 마르지도 않는데 괜히 신기해서 미니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어 마셨다.
옆에 앉은 현규하는 케이지가 주행 중에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사이코키네시스로 단단히 받쳐 들었다. 차창으로 스미는 햇살을 받은 머리칼이 거의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을, 인유신은 언제까지고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