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214)
  • 14.

    ‘실수’로 던전을 클리어해 버렸다는 당당한 해명에 김 과장은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래도 엎질러진 물이기도 하고, 촬영 영상을 보니 국영으로 사용하는 게 어려운 던전이기도 했으므로 예상 낙찰가를 현규하가 지불하는 것으로 좋게 마무리되었다.

    이어 두 사람은 공태성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마지막 열쇠까지 얻었다는 말에 솜노로스는 대경실색했다.

    『던전이 열렸다고 알려 주는 나의 믿음직한 모습을 애인님한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저는 왜요”

    『애인님한테 잘 보여야 하니까!』

    “……”

    솜노로스는 지느러미까지 파르르 떨며 우왕좌왕하다가 정신 사나워진 현규하가 노려보자 슬그머니 공태성의 뒤에 숨었다.

    공태성이 슬쩍 헛기침을 했다.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려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린 소녀가 쪼르르 뛰어들었다. 베이비시터처럼 보이는 사람도 공태성에게 꾸벅 인사했다.

    초면인 꼬마였지만 인유신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공태성의 딸인 민안나였다.

    “아빠, 다녀왔습니다! 어 귤 삼촌이다!”

    민안나는 황소처럼 힘차게 현규하에게 돌진했다. 물론 현규하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슥 피했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달려들어서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귤 삼촌! 나, 나! 그거 해 줘! 그거! 하늘! 붕붕! 빨리, 빨리!”

    “귀찮아.”

    “해 줄 때까지 안 놓을 거야!”

    현규하는 아예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으나 5살짜리의 고집을 이길 수는 없었다. 사이코키네시스를 써서 하늘에 띄운 채 빙글빙글 돌리고 뒤집자 숨넘어갈 것 같은 웃음을 까르륵 터트리며 난리가 났다.

    ‘되게 어지러울 거 같은데 괜찮은가 봐. 5살의 체력은 역시 굉장하네.’

    감탄하는 한편으로는 무척 안쓰러웠다. 저렇게 활기차고 밝은 아이가 몇 년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라니.

    “안나랑 같이 사시는 거예요”

    “애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발코니로 나가자고 슬쩍 눈짓했다. 현규하가 애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솜노로스에게 물을 게 있었다.

    눈치 빠르게 알아들은 공태성은 잠자코 발코니로 나왔고 솜노로스도 자연히 뒤를 따랐다.

    “열쇠를 다 모으면 ®ÀÇ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 문, 두 명은 못 가는 거예요”

    『못 가.』

    혹시나 했던 기대가 무색해질 정도로 솜노로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세계의 틈이나 파계 스킬이 아니라 억지로 비집고 여는 거잖아. 그래서 한 명만 겨우 지나갈 수 있어. 내 본체는 신계에 있으니까 왕자님과 동행할 수 있지만 애인님은 못 가.』

    “……그렇군요.”

    솜노로스는 풀이 죽은 인유신을 위로하듯이 주변을 느리게 돌았다.

    『®ÀÇ가 멸망하는 중이라니까 왕자님도 애인님을 데려가고 싶지 않을 거야. 소중한 사람을 멸망하는 세계에 누가 데려가고 싶어 하겠어』

    “…….”

    인유신은 대꾸 없이 발끝으로 발코니의 바닥만 톡톡 찼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여기로 돌아올 방법은 확실히 찾을 수 있을까요”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벌써 낙담하지는 마. 솔직히 나는 잠만 자느라 세계의 법칙을 잘 모르거든. 왕자님도 ®ÀÇ로 돌아가면 신들과도 소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분들이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현규하가 이아드에서 돌아올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한 게 그 뜻이었을까. 그런 거라면 좋겠다.

    하늘에서 신나게 빙글빙글 돈 민안나는 결국 멀미 때문에 흐느적흐느적 엎어졌고, 시터에게 안겨서 방으로 돌아갔다.

    “귤 삼촌……. 안나 보러 또 와야 돼…….”

    현규하 → 규하 → 규 → 귤인가 보다. 규가 왜 귤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쓱한 얼굴로 민안나가 사라진 뒤에도 공태성은 아까 중단했던 말을 쉽게 다시 뱉지 못했다.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그에게 현규하가 턱짓했다.

    “바로 갈 거 아니니까 준비나 해 놔.”

    “뭘.”

    “안나의 혈액 샘플 같은 거. 어느 신의 신성력에 중독되었는지 알아야 해약을 가져오든 뭘 할 거 아니야.”

    “…….”

    한 손으로 하관을 가린 채 공태성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의 입에서 ‘고맙다.’라는 느릿한 말이 나오기 직전, 솜노로스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처음부터 왕자님한테 부탁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그 얘기는 지금 하고 싶지 않다만.”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가 괜히 현규하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공태성은 말을 삼갔지만, 오히려 현규하가 실소했다.

    “안나가 끝녀 누나의 딸이니까 부탁받으면 들어주긴 했겠지만, 나한테 그게 우선순위는 아니거든.”

    민안나를 치료할 약을 가지고 오겠다는 장담은 하지 못하겠다는 뜻에 공태성의 안색은 조금 창백해졌다. 하지만 묵직하게 수긍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지.”

    “길드장님은 어떻게 약을 찾을 생각이셨는데요”

    『내가 문을 다시 열지는 못해도 열린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게 어느 정도 잡아 두는 건 할 수 있어. 신계에서 직접 신께 조언을 얻고 약을 구한 뒤 약병만 이쪽 세계로 보낼 계획이었지. 그러니까…….』

    솜노로스는 현규하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왕자님도 잠깐만 시간을 할애해 주면 될 텐데.』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지. 다시 얘기하는데, 안나의 약을 구하도록 노력은 해 보겠지만 내 일에 방해되면 거기서 끝이야.”

    “그래도 부탁하마.”

    탄식처럼 읊조린 공태성은 나직이 덧붙였다.

    “……고맙다.”

    현규하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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