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214)
  • 현규하의 휴대폰에 위험한 내용이 적히는 걸 봐 버린 인유신은 얼른 화면을 손으로 덮어 버렸다. 그 손을 붙잡으며 현규하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키스해도 돼요”

    나직이 묻는 목소리가 정말 가느다란 떨림을 품고 있었다.

    “여기 카페인데…….”

    “구석인 데다가 아무도 안 보잖아요. 응”

    힐끔 둘러보니 구석 자리의 그들을 주목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존재감을 지우는 스크롤은 여전히 효과를 발휘 중이었다.

    “그래도 볼지 모르니까 혀는 요만큼만요.”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될 만큼 엄지와 검지 사이를 벌리며 허락하자마자 입술이 겹쳐졌다. 잇새를 가르며 들어오는 듯했던 혀는 금방 빠져나갔다. 거의 닿자마자 끝낸 입맞춤이 의아해서 바라보니, 현규하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테이블에 엎어졌다.

    “우리 진도 천천히 나가요……. 심장이 멎을 거 같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품은 채, 인유신은 그냥 웃고 말았다.

      

    이곳이 회사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찰싹 붙어서 온 사방에 연애한다는 걸 광고하고 다니던 헌터업무담당과의 명물이 이상해졌다.

    이혜연은 얼굴을 기우뚱했다. 구내식당에서도 자리를 띄우고 앉기에 처음에는 싸웠나 싶었다. 하지만 계속 구경하다 보니 싸운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싸운 거라면 밥 먹다가도 시선을 마주치며 배시시 웃지는 않을 테니까.

    인유신으로부터 대각선으로 멀리 떨어진 식탁 귀퉁이에 앉은 현규하를 보며 당사자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규하랑 왜 갑자기 내외하냐”

    “누님이 들으면 유난 떤다고 생각하실 거 같은데…….”

    “너네가 유별나게 구는 걸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데 새삼 뭘.”

    어색한 미소와 함께 인유신은 설명했다.

    “제가 숨만 쉬어도 이미 맥스를 찍은 호감도가 지붕 뚫고 상승하고 있어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대요.”

    “으, 으응…….”

    인격자인 이혜연은 별말 없이 괜히 물어봤다는 표정만 지었지만, 옆에서 듣던 최진혁은 밥맛 떨어진다는 얼굴로 숟가락까지 내려놓았다.

    “진짜 개꼴값이군.”

    “야, 그래도 말이 넘 심하다.”

    “그럼 이 팀장님은 형님이 저렇게 염병을 떨어도 가만히 두실 겁니까”

    “크흠, 가끔 신혼 기분 내는 건 좋지 않을까”

    “저게 신혼부부의 평균이라면 저는 평생 결혼 안 합니다.”

    “동생 뒷바라지한다고 애인도 없는 애가 뭔 소리냐.”

    또 밥 먹다가 눈이 마주친 현규하에게 살짝 손을 흔들면서 인유신은 쪽팔린다고 여기기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이만하면 헌터계에서 금실 좋기로 소문난 이혜연에게 인정받은 게 아닐까

    이렇듯 사내 연애를 하면서도 장거리 연애처럼 거리를 두었지만 필연적으로 붙어 다녀야 할 시간은 돌아왔다. 현규하의 외근이었다.

    목적지는 북한산에 새로이 생성된 지속 게이트였다. 산 정상이었으면 인유신은 도망치고 싶었을 테지만 다행히 등산길 입구였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입구를 지키던 공무원이 의례적인 절차로 헌터 라이선스를 스캔했다. 꾸벅 인사한 인유신은 현규하와 함께 누구도 진입하지 않은 낯선 던전에 첫발을 내디뎠다.

    [던전 리셋까지 남은 시간  130시간 07분 49초]

    안으로 들어서자 바다 내음이 물씬 밀려들었다.

    “와, 바다가 진짜 맑네요.”

    파도에 닳은 자잘한 돌멩이들이 깔린 자갈돌 해변이었다. 날씨도 상당히 선선했다. 현규하의 입매도 느슨하게 풀렸다.

    “여름휴가 때 생각해 둔 곳 없으면 바닷가로 여행이나 갈래요”

    “저야 좋죠!”

    바로 대답한 뒤에야 어느새 여름휴가가 코앞이라는 걸 떠올렸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어디로 갔어요”

    “휴가 때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젤 좋아서요. 규하 씨는요”

    “나는 특별히 휴가를 가진 적이 없어서요. 쉬고 싶을 때 쉬는 게 프리랜서의 장점이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게이트를 넘나들며 열쇠를 찾느라 휴가를 누릴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생각하면 이 던전에서 열쇠를 찾는 게 좋겠지만, 마음속의 은밀한 속삭임은 다른 곳을 향했다.

    “……여기에 열쇠가 있을까요”

    “혹시나 싶어서 오기 전에 공태성한테 전화해서 확인해 봤는데 아니라더군요.”

    인유신은 안도감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쓴맛을 입 안으로 삼켰다.

    “주인님과 해 보기도 전에 열쇠를 다 모을 수는 없죠.”

    “…….”

    “뭘 할 건지 안 물어봐요”

    “안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지금 상태로 급하게 했다가는 자칫 심장 마비…….”

    “안 물어봤는데요!”

    나불거리는 입과는 달리 현규하는 긴장감이 역력한 심호흡을 거듭하더니 조심스럽게 인유신을 한 팔로 안았다. 치솟는 호감도에 아직 적응되지 못한 모양이다.

    입구의 해안가는 좁았다. 입구를 제외한 던전의 나머지 면적은 수평선까지 펼쳐진 광대한 바다뿐이었다. 현규하는 드론으로 주변을 꼼꼼하게 촬영했다.

    “이 던전은 국영으로 두는 것보다는 경매에 올리는 게 낫겠다는 보고서를 써야겠습니다.”

    “지형이 별로라서요”

    “네. 대부분의 헌터들은 발을 붙일 땅이 없는 곳에서는 잘 못 싸우니까요. 이쪽으로 특화된 특기들이 많은 길드에서 낙찰해 가겠죠.”

    10분쯤 날아간 뒤에야 외딴섬이 하나 보였다. 그곳에서 환영이 뭉클거리며 피어나고 있었다.

    제왕을 낳으리란 꿈을 산 여자는 황제의 사생아를 낳았다. 명궁으로 성장한 사생아는 친부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났으나 뱃길이 험난하여 제물로 버려졌다. 그는 버려진 섬에서 서해 용왕의 부탁을 받고 늙은 여우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사생아는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 동방의 왕이 되길 바랐고, 서해 용왕은 자신의 딸과 혼례를 올리게 했다. 그들의 자손은 세세토록 무궁한 영광 속에 용을 조각한 옥좌의 주인이 되었다.

    이번에는 인유신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왕건의 할아버지 아니에요”

    “으음, 마지막에 자손들이 왕이 되었다는 걸 보니 작제건과 저민의 맞겠네요.”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 설화는 고려 왕실을 신성시하기 위해 전해지던 설화들을 짜깁기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배경으로 등장한 걸 보면 어딘가에서는 분명히 실존했던 역사적 사실이긴 했나 보다.

    [던전이 당신의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현규하가 섬에 찬찬히 내려섰을 때였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가 소유한 ‘스토야의 혈계’가 ‘서해 용궁의 용녀 저민의’를 관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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