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샤 길드의 본사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현규하가 시무룩한 얼굴로 흐느적흐느적 날아왔다.
“주인님, 공태성 만나러 가는 거예요”
“규하 씨가 답문을 안 줘서요.”
장난스럽게 한 말이었는데 현규하의 눈꼬리가 대번에 축 처졌다. 우중충한 그늘까지 드리웠기에 인유신은 얼른 말을 수습했다.
“농담요, 농담! 그냥 한 말이었어요.”
“지은 죄가 있으니 유신 씨가 혼자 공태성을 만나러 가도 할 말은 없지만 가는 길에는 나를 지르밟고……. 아, 이거 괜찮을지도.”
인유신은 정말 길바닥에 드러누운 현규하를 새빨개진 얼굴로 일으켰다. 인적이 없는 건물 사이의 골목길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병원에서 약 받아 왔어요 설마 수술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니죠”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고 확신하는 말에 현규하는 아침부터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보았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지고, 근무 시간에는 던전에 소요가 발생해서 같이 단속하러 갔다가 던전 내의 성을 붕괴시키고, 반차 냈다가 돌아온 뒤에는 귀여움에 함락되는 바람에 진정하기 위해 자리를 피하고…….
별문제 없지 않았나.
그래서 당당하게 말했다.
“주인님이 한 번 지르밟아 주면 나을 거라고 합니다.”
“……요새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았어요”
인유신의 눈이 중병에 걸린 환자를 보는 그것으로 바뀌었기에 현규하는 결국 이실직고했다.
“사실은 반차 내고 자랐던 보육원에 들렀다가 왔거든요오…….”
말을 하다 보니 다시금 3살 인유신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기에 급격히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발그레하게 붉어진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그를 보던 인유신이 얼른 가슴 부근에 힐을 했다.
“역시 아침에 구르면서 늑골에 금 간 거 맞죠”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형아, 안 아파’라며 울먹거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진짜 어떻게 사람이, 어린 시절의 순정한 선량함을 모진 세파에 고생하는 어른이 되어서도 간직할 수가 있는 거지.
가슴이 뻐근한 감동으로 벅차오름을 깨달았을 때, 현규하는 이미 인유신을 와락 끌어안고 있었다.
“내가 씨발놈이었습니다! 내 눈깔이 삐었다고요! 눈이 달려 있으면 뭐 해! 쓸모도 없는데!”
“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유신 씨를 알아보지도 못했잖아요!”
“아, 저 구해 주셨을 때요 옛날에 잠깐 봤던 8살짜리 얼굴로 지금의 저를 알아보는 건 당연히 무리죠.”
“그게 아니라요!”
탄탄한 가슴에 꽉 끌어안긴 인유신은 아까부터 현규하의 심장 소리를 계속 느끼고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맥동하는, 그 두근거림을.
거칠게 들썩이는 박동이 절정에 달한 순간, 인유신은 격정으로 갈라진 그의 외침을 들었다.
“우리 같은 보육원에 있었어요……!”
고백하자면, 어렸을 때 같은 보육원에 있었다는 얘기만 들었을 때는 우와, 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이런 인연도 있었구나, 싶어서.
보육원에서 특별한 추억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흥분한 현규하는 통 말을 잇지 못했다. 우선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근처의 카페로 들어왔다.
현규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단번에 들이켰다. 조금 진정한 거 같았는데 착각이었다. 옆에 앉은 인유신을 빤히 바라보더니, 귓불까지 발갛게 붉혔다.
뭐라고 말할 것처럼 힘겹게 달싹거리던 입술이 닫혔다. 대신 현규하는 가늘게 달달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인유신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주인님. 눈깔도 쓸모가 없는 나쁜 애완쥐가 할 말이 있어요.]
바로 옆에 앉은 현규하와 제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본 인유신은 자기도 문자로 대답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문자로요”
[심장 떨려서 말을 못 하겠습니다.]
심지어 문자를 쓰다가 손가락이 떨려서 두어 번 놓치기도 했다.
이모티콘은 하나도 쓰지 않고 마침표까지 꼬박꼬박 붙이는 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문자였다. 하지만 긴 속눈썹을 내리뜨고 선홍빛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인 얼굴을 보자니 왠지 제 얼굴까지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노골적으로 부딪히는 감정이 꽤나 화끈거려서.
현규하는 그렇게 휴대폰 액정만 톡톡 두드리면서 설명했다. 인유신과 같은 보육원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 과거에 근무했던 교사를 만나 재차 확인했던 것, 그리고 첫 번째로 겪은 침식 게이트에 대하여.
놀라움이 인유신의 표정에도 서렸다.
“전혀 몰랐어요……. 그때의 일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당연하죠. 3살 때 겪은 걸 누가 기억합니까. 하지만 나는 알았어야 했어요. 적어도 침식 게이트에서 유신 씨가 흑암을 통과했다는 걸 들었을 때라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을 가로막은 빗장이 하나 더 풀렸다. 19년 만에 만난 거라던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의 말. 가끔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
제 가슴도 서서히 두근거리기 시작했기에 인유신은 뺨을 문질렀다. 어쩐지 얼굴로도 열기가 오른 느낌이었다.
“진짜 신기해요. 저는 기억도 못 하던 어린 시절에 규하 씨가 두 번이나 구해 주었네요.”
[3살 때 일은 빼야죠. 내가 아니었으면 유신 씨가 휩쓸릴 필요도 없었던 거니까요.]
“그치만 펜던트가 예쁘다고 먼저 다가갔던 게 저였다면서요”
휴대폰을 토독거리던 현규하의 엄지가 멈췄다가, 이내 다급히 움직였다.
[존ㄴㄱㆍ그엄청나거ㅔ귀예우ㅏㅅ어요]
술에 취한 것처럼 엉망진창인 문자를 읽은 인유신은 괜히 물어보았다.
“지금의 규하 씨보다 더요”
현규하의 얼굴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재빠른 속도로 힘차게 아래위로 움직였다. 인유신은 실없이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와 나누었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다는 게 무척 아쉬워졌다.
그래도 현규하가 그 기억을 갖고 있었다. 같은 보육원에서 머문 게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게 좋았다.
[요새는 자면서 손가락 안 빨죠]
“당연하죠!”
[옛날에는 손가락을 자주 빨아서 침이 잔뜩 묻어 있었거든요. 한 번은 나한테 과자 먹으라고 준 적이 있는데 침이 너무 많이 묻어 있던 거예요.]
차마 그 과자를 받지 못했더니 그대로 울어 버렸다는 문자를 읽은 인유신은 몹시 민망해졌다. 내가 정말 애처럼 그랬단 말이야 아니, 애는 맞았지만…….
[그래서 다음에는 침 범벅인 과자를 주더라도 최소한 먹는 척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침식 게이트가 열렸습니다.]
“규하 씨한테 어린애 침 묻은 과자 먹일 기회를 놓쳤네요.”
[지금의 유신 씨 체액이라면 그게 뭐든 기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