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214)

근심에 젖은 인유신까지 피를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깜빡한 바람에 현규하는 그만 피 묻은 몰골로 이능부에 나타났다. 사무실은 잠깐 뒤집어졌고, 현규하는 당일 반차 허락을 바로 얻어 냈다.

병원에 꼭 가라는 인유신의 염려를 뒤로한 그는 청솔 보육원으로 직행했다. 정말 그 꼬마가 인유신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오랜만에 찾아간 보육원은 무척 낯설었다. 하긴 19년 전에 떠나왔으니 많이 변하기도 했을 테고, 기억에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한데도 그 꼬마에 대한 추억은 한번 계기를 얻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억의 밑바닥에서 솟아났다. 현규하는 꼬마가 짧은 다리로 아장거리다가 곧잘 넘어지곤 했던 놀이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바닥이 모래가 아니라 코르크로 바뀌어 있었다. 놀이 기구들도 전부 교체된 모양이었다.

“현 헌터님이 원아로 지내셨다고요”

현규하가 잠깐이나마 이곳에 있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는지 원장은 정말 놀라워했다. 들어 보니 예전의 원장이 체포된 샛별원은 하마터면 폐원될 뻔했으나, 사연을 알게 된 모 기업이 인수하면서 이름도 청솔 보육원으로 바꿨다고 했다.

19년 전에 근무했던 교사들은 전부 퇴직했고, 연락이 닿는 이도 두 명밖에 없었다. 개중 가까운 수원에서 산다는 교사와 당일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수원까지 내려가서 약속한 카페 안으로 들어가니, 나이 지긋한 교사 쪽에서 먼저 현규하를 알아보았다.

“세상에. 정말 규하가 맞……. 아니, 현 헌터님이 맞으시네요.”

“편한 대로 불러요.”

현규하는 고개를 까딱했고, 교사도 어색하지만 반가워하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솔직히 누구인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19년 전이어도 9살의 기억력과 성인의 기억력은 확실히 달랐다.

“원장님이 어쩌다가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는지는 들었어”

“조폭 자금을 세탁했다면서요.”

“그래서 현 헌터가 샛별원에 있었다는 걸 입 꾹 닫고 있었던 듯해. 매스컴에 괜히 노출되었다가 꼬리가 잡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샛별원에서 침식 게이트가 열렸었다는 건 정부 관계자 몇몇만이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날 밤의 일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렸다.

“내가 나가던 밤에 마당 구석에서 자던 꼬맹이가 있지 않았어요”

“그날 밤에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이마를 짚으며 골똘히 생각하던 교사는 이내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마당까지 나갔는지 깨지도 않고 잠들어 있던 애가 하나 있었어. 몽유병에 걸린 건 아닌지 며칠 동안 전전긍긍했거든.”

현규하는 마른침을 초조하게 삼켰다.

“……그 애, 누구인지 기억이 나요”

“아주 어린 애였지. 이름이 뭐였더라……. 한번 들으면 안 까먹을 만큼 엄청 유명한 이름이었는데, 연예인과 같은 이름이었던가”

“삼국시대의 신라”

“아! 맞아. 유신이, 김유신이었어. 유진이 다음으로 들어왔던 애.”

“으헉!”

“엄마야!”

양반다리를 한 채 건물 앞에 거꾸로 둥둥 떠 있어서, 그 앞을 지나가는 공무원들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현규하는 눈까지 감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교사와 나누었던 대화를 복기하면서.

〈애는 괜찮았어요〉

〈열이 심해서 병원에 데려간 뒤에도 미열이 계속 남아서 걱정했는데, 다음 날 늦게까지 푹 자고 나니까 다 나았던 것으로 기억해. 몽유병도 아니었고……. 어쩌다가 밖에서 잠들었는지 물어봤는데 기억을 잘 못하더라.〉

〈…….〉

〈열이 많이 오르면 기억을 잘 못할 때가 있잖니. 특히 어린애들은 더 그래.〉

침식 게이트에서 무서운 경험을 많이 했을 텐데 그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은 건 잘된 일이다. 열 때문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3살 때의 경험이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기억했어야 하지 않나. 조그만 생명체가 되똥거리는 어렴풋한 회상으로서가 아니라 선명하고, 확실하게. 적어도 이름이라도 들어서 기억해 둘 걸 그랬다.

“규하 씨, 여기서 뭐 하세요 병원에서는 뭐래요”

현규하와 마주치고 기겁한 공무원들의 콜을 받은 인유신이 파견되었다. 마침 그의 퇴근 시간이기도 했다.

“거꾸로 감상하는 주인님의 용안도 멋…… 응”

거의 척수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현규하는 흠칫했다. 희미하게 흐리기만 하던 3살짜리 꼬맹이의 얼굴이 인유신을 마주 보자, 단번에 떠올랐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형아.’라는 혀 짧은 목소리와 함께 오종종 달려오던 그 귀여운 생물체가.

“으아아아아아.”

뇌리를 엄습하는 귀여움을 주체하지 못한 현규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너무 빨리 날아가서 붙잡지도 못한 인유신은 멍한 시선만 올렸다. 거꾸로 날아가면 멀미 날 텐데…….

‘진짜 오늘 아침부터 왜 그러지’

혹시 큰 탈이라도 났나 걱정되어서 상태창을 살폈다.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

[현재 상태  애정. 살의. 분리 불안. 벅차오름. 흥분. 설렘. 두근거림. 들뜸. 황홀. 눈부심. 귀여움×∞.]

인유신은 눈을 비볐다가 다시 봤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항상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해서 친숙하게 느껴지던 살의가 뒤로 밀려났다. 거기다가 뭔가 이것저것 길게 붙어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닌 듯하여 그 점은 안심했다.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받지 않았다. 문자도 보냈는데 확인만 하고는 답신이 없었다.

인유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상태창을 보니 무슨 큰 문제가 생겨서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이 위험한 곳으로 가면 분명히 찾으러 올 것이다.

‘나르샤 길드로 가면 되겠다.’

지도 어플로 검색해 보니 가는 길도 어렵지 않다. 인유신은 지하철역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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