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말문이 트일 때 나오는 말은 보통 ‘아빠’나 ‘엄마’라던데 현규하가 제일 먼저 한 말은 ‘나에게’였다.
‘나에게, 우리의 세계로 오려무나. 내 아들아.’
언어를 인식하기도 전부터 뇌리를 감돈 저주 같은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각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어머니와 대화가 통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였다. 그 무렵엔 이미 어머니의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샛별원은 어머니가 영영 실종되고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에 가게 된 곳이었다. 몇 번째의 보육원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별일이 없다면 성인까지 지내게 될 보육원이었지만 현규하는 여전히 보육원의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라면 그 아이였다. 갓난아기 때 보육원 앞에 버려졌다는 그 애는 쌀쌀맞은, 혹은 다른 아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수 없는 그의 태도에도 굴하지 않았다. 딱히 붙임성도 없고 숫기도 없는 내성적인 꼬맹이가 현규하에게는 곧잘 따라붙었다.
〈원래 어릴수록 아기들이 예쁜 걸 잘 알아봐.〉
교사들은 네가 예쁜 얼굴이라 그렇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이름도 잘 모르는 꼬마가 몹시 어려웠다. 하지만 콩알만 한 게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뒤뚱뒤뚱 다가와서 침 묻은 손으로 붙잡으면, 왠지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날 밤도 그랬다.
뇌리를 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때로는 극심한 두통을 동반하였기에 현규하는 그럴 때면 으레 펜던트를 꺼냈다. 지하에 묻힌 아버지의 누이, 스토야의 피로 만든 혈계라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다 보면 두통이 조금이나마 잦아들었다.
〈예쁘다. 뭐야〉
다른 아이가 그렇게 물었으면 무시하고 펜던트를 아공간에 넣었을 텐데, 그 아이만큼은 가까이 불러서 만지게 해 주었다.
그리고 침식 게이트가 열리자, 현규하는 역시 이 애를 일찌감치 밀어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랬다면 자신을 따라 침식 게이트에 휩쓸릴 일이 없었을 테니까.
침식 게이트는 그림자가 없는 무채색의 세상이다. 지식으로 알고 있던 현규하도 놀랐는데 3살밖에 안 된 어린애는 얼마나 놀랐을까.
꼼짝도 못 하고 앙앙 울기만 하는 아이를 달래지 못해 난감해하던 현규하는 제 능력을 써서 아이를 하늘로 두둥실 띄웠다. 각성자라는 걸 보육원에 알려 봤자 귀찮은 일만 생길 테니 숨기고 있었지만 달래는 게 더 급했다.
너무 높지 않게 띄워 가며 둥개둥개 어르자 아이는 간신히 눈물을 그쳤다.
〈형아. 여기 어디야 이상해.〉
〈……너는 꼭 밖으로 보내 줄게.〉
침식 게이트에 먹힌 사람은 단둘뿐이었는데, 내부는 꽤 넓어 보였다. 보육원의 담벼락 밖으로도 퇴락한 건물과 거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내 뒤에 잘 붙어서 따라와. 알았지〉
처음에는 오들거리면서 떠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하지만 마수들이 생성되기 시작하자 컨트롤에 미숙한 그는 양손을 써야 했다. 마수를 사냥하는 것도,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겁이 덜컥 났지만 억지로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자기가 무너지면 꼬마까지 다칠 것이다.
잘 따라오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면서 걷던 현규하는 이내 다시 난감함을 느껴야 했다.
아이가 또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말라니까…….〉
이제는 또 어떻게 달래야 할까. 머리라도 쓰다듬어 줘야 하나 싶었는데 제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옆구리의 상처를 눌렀던 흔적이다. 이 손을 뻗으면 더 무서워할 거 같았다.
그나마 깨끗한 허벅지에 문질러 피를 닦으려는데, 자그마한 온기가 피투성이 손에 먼저 와 닿았다.
피가 묻을지도 모른다. 흠칫해서 손을 빼려는데 아이는 오히려 그의 손만이 아니라 핏물이 떨어지는 옷자락까지 꼭 쥐며 물었다.
〈형아, 안 아파〉
〈…….〉
〈여기도 너무 빨개. 아야 안 해〉
〈…….〉
다친 사람이 마치 자신이라도 된 것처럼, 걱정하며 앙앙 우는 아이의 울먹거림에 현규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 생각밖에 안 하는 사람이었고, 할머니와 보낸 시간은 너무 짧았다. 무채색의 세상에서 흐르는 피는 그가 보기에도 섬뜩할 만큼 붉은데, 그 피비린내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다가오는 작은 온기를 무어라 말하면 될까.
이를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을 현규하는 누구로부터도 배우지 못했다.
〈……안 아파.〉
한참이 지나서야 메마른 목소리가 버성기게 나왔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허둥지둥 당황하다가, 등을 돌렸다.
〈다리 아프지 어부바할래〉
〈응.〉
계속 걷기만 하는 게 염려되었으나 접촉하면 피 냄새가 더 짙게 풍길 게 저어되어 등을 내밀지 못했었다. 아이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바로 답삭 등에 업혔다.
목을 끌어안으며 어깨에 기대 오는 아이의 체온은 생각보다 더 높았다. 아무래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이상한 곳에 강제로 끌려와서 겁에 질려 있을 테니 탈이 나는 건 당연했다. 빨리 클리어해야 하는데 보스 몬스터는 어디에 있는 걸까.
열은 점점 높아졌다. 등에 업히고도 아프지 말라며 울먹울먹하던 목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아이를 업고 초조하게 헤매다 골목길의 끝에 다다랐다. 버스 정류장의 3분의 1이 동강 난 채, 어둠에 먹혀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수들과는 계속 마주쳤지만 보스 몬스터는 흔적도 찾지 못했다. 이쪽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큰길은 전부 확인했는데 보스 몬스터가 없다면 집마다 열어 보면서 확인해야 찾을 수 있는 걸까. 자신이 다치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저 때문에 휩쓸린 이 꼬마가 다치면 어떻게 하지. 열도 많이 나는데.
〈……정신 차려.〉
현규하는 이를 악물었다. 멍청하게 헤매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이 애를 무사히 탈출시키려면 냉정해져야 한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소리 내어 계획을 읊었다.
〈여기가 학교 가는 방향이니까, 우선 반대쪽부터 확인해 보고 그다음에는 마트 쪽으로 가면서…….〉
【아가.】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현규하는 흠칫했다. 바짝 긴장되었다. 침식 게이트의 보스는 정신을 현혹한다고 들었다. 위치를 찾아보려 했으나 텔레파시처럼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졌기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놀랄 것 없단다.】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이어 하나의 관념이 전해졌다. 그 순간, 현규하는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마수 따위가 아니라 이아드에서 건너온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라는 신이라는 것. 이 게이트가 이아드와 철의 시대를 잠깐이나마 연결하는 가교라는 것.
【안으로 들어오겠니】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의 목소리가 가리키는 곳은 침식 게이트 너머의 새까만 어둠이었다. 저 어둠은 이아드의 피가 흐르는 자신만이 갈 수 있는 곳이란 걸 이번에도 알 수 있었다.
현규하는 불퉁하게 말했다.
〈얘 두고 못 가요.〉
【으음, 좋아.】
어둠 너머에서 빛의 부스러기 같은 것이 흘러나와 아이의 머리로 내려앉았다.
【이제 들어와 보렴.】
안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모른다. 만약을 대비해 손이 자유로워야 했다.
〈잠깐만 걸을 수 있겠어〉
〈응…….〉
아이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꼬물거리는 아이의 작은 손은 열이 올라 뜨거우면서도, 이 낯선 공간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현규하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암흑 너머로 발을 디뎠다. 게이트에 진입할 때와 비슷한 짧은 현기증에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그는 완전한 어둠 속에 있었다.
그곳에 두 신의 그림자가 보였다.
〈형아. 누구야〉
열이 올라서 의식이 가물가물 꺼져 가던 아이가 힘없이 물었다. 적어도 이 공간은 안전해 보인다. 현규하는 괜찮다는 뜻으로 아이를 얼른 다시 올려 안았다.
예복과 누더기를 입은 쪽이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일 것이다. 그렇다면 옆에 있는 젊은 여성은…….
【저는 생전에 명진국의 따님애기였던 삼승입니다. 그대에게는 삼신할머니 쪽이 더 익숙하겠지요.】
할머니가 아니잖아 하지만 그런 문제야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현규하는 아이를 가리켰다.
〈삼신할머니라면 애 잘 보죠 얘가 아픈데 열 좀 내리게 할 수 있어요〉
아이를 건네받은 삼승은 익숙하게 품에 안았다. 어둠을 응시하던 아이는 곧 눈을 깜빡이며 잠이 들었다.
【놀라서 열이 오른 것뿐이니 걱정할…… 응】
【맙소사.】
삼승과 우르시토아레가 동시에 짤막한 탄성을 내뱉으며 시선을 교환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현규하는 미간을 구겼다.
〈뭔데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저 작은 아가를 용케도 다치게 하지 않고 무사히 데려왔구나.】
우르시토아레가 대견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는 걸 피해 현규하는 뒤로 물러섰다.
〈여기 왜 부른 건데요 용건이 있다면 나만 불렀으면 됐잖아요. 쟤는 왜 끌어들여요.〉
【우리의 불찰이었어. 미안하지만 우리는 너에게 길을 알려 주고 싶었단다.】
〈대충 아는데요.〉
어머니에게 들은 것도 있고, 누가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깨달은 것도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이아드라는 다른 세계를 지탱하는 주춧돌이 된 왕이라는 것.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곳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것. 그 열쇠가 이쪽 세상에 흩뿌려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부름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렇지. 하지만 스토얀의 부름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모르지 않니】
우르시토아레가 한 손을 찬찬히 뻗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이마에 닿은 그녀의 손끝으로부터 아까보다 훨씬 밝은 빛 무리가 스며들었다. 두통이 사라졌다.
【아가야. 네가 마음을 단단히 다지면 스토얀의 부름이 너를 힘들게 하는 일은 없을 거란다.】
〈벌써 힘든데요.〉
우르시토아레는 부드럽게, 동시에 고통스럽게 미소하며 노래하듯 그의 운명을 이야기해 주었다. 멸망하는 이아드의 절망과 어머니의 태에 잉태되던 순간부터 부여된 그의 의무를.
현규하는 작은 입술을 지그시 사리물었다.
〈어쨌든 이 원인이 전부 아버지라는 인간 때문 아니에요 나한테 왜 그쪽 세계까지 가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건데요〉
【…….】
싸늘한 반문에 우르시토아레만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고 있던 삼승마저 무겁게 침묵했다. 이윽고 삼승이 마치 인간의 한숨처럼 느껴지는 힘겨운 탄식을 뱉었다.
【그대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왕의 아들이여. 그대의 아버지와 고모를 산 제물로 받은 것만으로도 모자라 세계의 왕이라는 운명까지 덧씌운 둠네제울과 신들을 원망하십시오.】
〈그쪽을 원망하는 건 아버지 몫이죠.〉
그리고 현규하의 몫은, 그를 낳아서 운명을 강제로 대물림하게 하려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에 있다.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이 두통도 없었을 테고, 어머니가 자신을 필요 없다고 여겨서 버리고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직은 치기 어린 미숙함이지만, 뚜렷한 살의가 가슴 안에 뭉클거리면서 뭉치기 시작했다.
현규하는 한바탕 짜증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으로 바닥을 발로 툭 찼다. 운명이니 뭐니 하는 그딴 건 모르겠고, 어쨌든 이아드로 가는 길을 열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그래야 어머니를 볼 수 있을 테니까.
〈할 말 다 했으면 갈게요. 게이트 클리어는 어떻게 하는데요〉
【밖으로 나가면 보스 몬스터가 형성되어 있을 거란다.】
【이 아이도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을 겁니다.】
삼승에게 곤히 잠든 아이까지 건네받아 조심스럽게 안았다. 9살 소년이 한 팔로 올려서 안기에는 버거웠지만 사이코키네시스를 이용하니 그럭저럭 움직일 만했다.
현규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흑암 밖으로 나갔다.
하여, 그가 나간 뒤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와 삼승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신기한 노릇이에요. 태어났을 때부터 그의 운명은 사냥꾼일 따름이었는데 저 작은 아가와 만나며 흐름이 변하다니. 저 아가는 불운하게도 10살이 되기도 전에 죽을 수명인데다 ‘섭리’로 인해 각성한 아이도 아니지 않던가요. 이 아이의 숨겨진 특성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설마 작은 아가가 크르스니크인 건 아니겠지요】
【신이 떠나간 세계에서는 크르스니크가 태어나지 못하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겠죠……. 나는 운명을 예언하는 힘이 있으면서도 그 운명이라는 걸 참으로 알 수가 없어요.】
【당신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아기를 축복했으니, ‘섭리’가 합당한 고유 능력을 부여할 터입니다. 7살이 되기 전이니, 혹시 몰라 칠성신에게 빌려 온 가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무엇을요 과하게 엮었다가는 정말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텐데요.】
삼승이 씁쓰레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린아이들을 이용하는 결과나 다름없는 현 상황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인간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길 마련이지요. 혹 일찍 죽을 운명을 극복하고 자립할 나이가 되었을 때 서로 만나 인식하게 된다면, 작은 인연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 후의 선택은 온전히 저들의 몫이 되겠지요. 그 선택이 부디 저들에게 좋은 결과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