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214)
  • 비슷한 시각.

    현규하는 나르샤 길드 본사에서 회의실 하나의 문을 박살 내고 있었다.

    인유신이 무서워해서 일부러 가볍게 대꾸했지만 명계와 연결될 수 있다니, 그게 어디 쉽게 넘길 일인가. 안 그래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위태로운 사람이다.

    귀신을 볼 수 있다는 게 죽은 지 한참 된 그의 부모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 위태로운 마음이 흔들릴 빌미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다시 온갖 던전을 뒤져서 인안나의 멱살을 잡아 올 수는 없으니, 그 원인이라도 알아내야 할 것이다.

    “야, 공태성.”

    박살이 난 문짝의 파편은 공태성의 불길에 의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기에 회의실 안에 다친 사람은 없었다. 대신 다들 놀란 눈으로 현규하를 응시할 뿐이었다.

    현규하를 말리지도 못하고 뒤만 졸졸 따라온 길드의 사무원들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뻐끔거렸다.

    ‘저희가 어떻게 현 헌터를 붙잡습니까!’

    공태성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눌렀다.

    “네놈의 머리에는 약속부터 정하고 방문한다는 기본적인 상식과 예절이 탑재되어 있지 않나 보군.”

    “그건 내가 싸가지를 지킬 만한 사람한테나 하는 거고.”

    “오, 짜란다. 짜란다.”

    날을 세우는 듯하던 기세는 어느 틈엔지 아공간에서 팝콘을 꺼낸 장범의 태평스러운 말 한마디에 사그라들었다.

    공태성은 한숨을 쉬며 현규하에게 턱짓했다.

    “나가서 얘기하지.”

    “여기에서 안 싸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인데.”

    “팝콘 처먹다가 죽기 싫으면 얌전히 회의나 진행시켜라.”

    장범을 노려보며 공태성은 먼저 회의실을 나갔고, 다른 사람들이 듣는 곳에서 얘기할 용건이 아닌 현규하도 뒤를 따랐다.

    회의실에 남은 사람들은 회의는 뒷전으로 미뤄 두고 서로 수군거렸다.

    “길드장님이 왜 저렇게 현 헌터한테 약해지셨지 며칠 전에 샤이닝에서 던전 하나 사적으로 매입한 것도 현 헌터 준 거라며.”

    “현규하한테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냐”

    “길드장님 약점이 아가씨랑 부회장님 말고 더 있나”

    다 같이 의아해하는 와중에 어느 길드원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거네, 그거.”

    “뭐가요”

    “부회장님이 현규하를 거의 의동생처럼 아끼시잖아. 미자 때는 후견인 노릇도 하셨고. 14년 전이었던가 현규하랑 대립한다는 소문이 있던 석호 길드를 무너트린 것도 부회장님이었을 정도니까, 현규하가 길드장님에게 일종의…… 처남 같은 거 아니야”

    “어우.”

    팝콘을 퍼먹던 장범은 오싹한 단어를 접하고는 팔뚝에 소름이 쫙 돋았다. 처남이라니.

    “그래서 길드장님이 부회장님과 재결합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현 헌터한테 비비는 중이라는 뜻이에요 한 비서님이 부회장님 설득을 못 하니까”

    “잘하면 현규하가 이혼 서류를 대신 찢어 줄 수도 있겠지.”

    “처남이랑 매형이니까 의외로 사이가 좋을지도…….”

    한마디라도 들었다가는 당장 주변을 모두 박살 내고도 남을 쑥덕공론이 회의실에 오가고 있다는 걸 모르는 두 사람은 공태성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현규하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고래 불러.”

    “기다려 봐. 자고 있으면 안 나올 수도 있다.”

    서너 번 부르자 솜노로스는 잠기운이 물씬 내려온 눈을 끔뻑거리면서도 나타났다.

    『후아암. 낮에는 부르지 말……. 어, 왕자님!』

    “왕자고 나발이고.”

    현규하가 가볍게 손목을 꺾었다.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솜노로스가 흠칫했다.

    “던전 공략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쥐새끼가 또 뭐라고 했지”

    『그걸 왜 나한테!』

    “그놈은 말도 제대로 안 통하고 저한테 불리한 일이 생기면 주인님한테 찰싹 달라붙으니까. 무엇보다 그 쥐새끼는 유신 씨가 아끼는 놈이라서 손 못 대.”

    『나는! 나는!』

    “넌 없어져도 유신 씨랑 별 상관이 없지.”

    『너무해!』

    솜노로스는 북받치는 서러움 속에 인유신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들은 얘기는 진짜 없어. 걔도 시켰던 대로 할 뿐인지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는 거 같던데』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나”

    “인안나를 만났어.”

    『힉! 인안나 님!』

    솜노로스가 겁에 질린 소리를 내더니 공태성의 뒤로 숨었다. 그 크기로 쪼그리고 숨어 봤자 눈동자 하나도 채 가려지지 않았지만.

    『인안나 님은 너무 무서워. 안 따라가길 정말 잘했어. 8세도 인안나 님한테 잘못 보이면 손가락에 짓뭉개져서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용케도 알려 줬네』

    “허신이라…….”

    어쩐지 공태성은 기가 찬다는 듯이 낮은 신음성을 발했다.

    “던전에 출몰하는 허신은 전설이 투영된 결과이며, 신성력도 마나와 비슷한 힘일 거라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지…….”

    딸이 신성력에 중독되는 병에 걸리고, 신들을 태연히 거론하는 솜노로스도 만났으니 무신론자도 유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혼란 따위는 현규하가 알 바가 아니었기에 손만 내밀었다.

    “내놔.”

    “또 뭐.”

    “예전에 유신 씨 뒷조사한 거 있다면서.”

    “그건 또 어디서 들었……. 아니다. 뻔하군.”

    공태성은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며 책상의 서랍을 뒤졌다. 그리고 USB 하나를 꺼내서 현규하에게 던졌다.

    “원본이다.”

    “흐음.”

    “끝녀에게 내 이야기는 더 듣지 않았나”

    “널 생각하다니 누나가 미쳤냐.”

    USB를 주머니에 챙겨 넣은 현규하는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왕자님! 애인님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공태성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차마 입술을 떼지는 못했다. 그의 용건이 뭔지 뻔하기 때문에 현규하는 그냥 무시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옷 갈아입을 때나 씻을 때가 아니면 거의 들르지도 않는 오피스텔에 일찌감치 돌아왔다. 평소처럼 옥탑방의 지붕 위에서 확인했다가는 그만 동요한 걸 인유신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에게 말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안락한 지붕 위 안식처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다.

    “후우.”

    태블릿에 옮긴 인유신의 신상명세서 파일을 열어 보기도 전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가락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하며 심호흡을 했다.

    ‘거기 이름이 아마…… 샛별원이었지.’

    19년 전, 현규하의 눈앞에서 침식 게이트가 열렸던 곳.

    그 아이와 함께 휩쓸렸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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