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귓불의 문신이 빛나며 인유신을 중심으로 세계가 펼쳐졌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하늘은 음습한 동굴의 천장으로, 푸르른 녹음으로 우거졌던 숲은 진흙이 철퍽거리는 웅덩이로, 청명하던 공기는 넘실거리는 희뿌연 먼지로.
온기 한 점 없는 이곳은 가장 깊은 땅보다 더 아래에 존재하는, 돌아오지 못하는 땅이었다.
변덕스러우며 욕심도 많은 신은 망자들을 위한 지하 세계로 눈을 돌렸다. 지하를 다스리는 명부의 주인은 그녀의 누이. 신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오만하게 저승으로 하강했다. 명부의 주인은 분노하여 그녀에게 저승의 일곱 개 문을 통과하라고 명령했다.
오만한 신은 문을 하나씩 통과했고, 그때마다 보석과 옷을 하나씩 벗었다. 그에 마지막 문을 통과했을 때 그녀는 무력한 알몸이 되었다. 명부의 주인은 마침내 그녀를 죽이고 시체를 나무에 매달았다.
인유신은 머릿속에 흘러드는 생생한 환영에 숨을 삼켰다. 마나가 너무 빨리 빠져나가서 머리도 아찔했다. 8세로 인해 마나가 증대된 게 아니었다면, 필드를 전개하자마자 마나를 전부 소진해서 기절했을 거 같았다.
“힘들면 빨리 거둬요.”
인유신은 숨을 몰아쉬며 필드를 해제했다. 저도 모르게 휘청거리는 허리를 현규하가 부드럽게 안으며 지탱해 주었다.
“좀 어지럽죠”
“현기증이 엄청나요…….”
“이만큼 마나를 쓴 건 처음이니까 그래요. 몇 번 써서 익숙해지면 괜찮을 겁니다.”
토닥토닥 두드리며 어루만지는 손길이 온화했다. 그 온유한 온기에 이끌려 아찔하게 두근거리던 심장의 박동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호흡이 진정되자 현규하가 등을 탁탁 털며 바로 서게 해 주었다.
인유신은 다시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산이 되돌아온 눈앞의 풍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귀속 아티팩트의 필드를 전개한 건 분명히 자신이 맞는데,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규하 씨는 어떻게 보였어요”
“음, 보통은 대충 사람들도 나오던데 유신 씨 아티팩트는 그냥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동굴 내부던데요. 이파리도 없는 메마른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기도 하고요.”
“매달린 시체 같은 건 안 보였죠 어, 그게 그러니까 수메르 신화에서 인안나가 에레쉬키갈이 다스리던 저승에 내려간 적이 있잖아요. 그거 같아요.”
인유신은 자신이 본 환상을 열심히 설명했다. 명계로 내려가기 전에 자신이 죽을 때를 미리 대비했던 인안나는 후에 무사히 소생하여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이 귀속 아티팩트의 기억은 거기까지 전개되지는 않았다.
얘기를 들은 현규하가 턱을 문질렀다.
“언니한테 깝치다가 개처맞고 죽었던 자기 흑역사를 선물이랍시고 넘겨주다니 취향 참 독특한 신이네요. 노출증 변태 같은 건가”
“근데 필드에는 왜 인안나나 에레쉬키갈이 안 보였을까요”
“으음, 나도 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귀속 아티팩트를 보는 건 처음이라서 추측일 뿐이지만요. 아무리 아티팩트의 영역이라도 신의 형태를 박제하는 건 불가능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납득되는 말이었다.
‘어라, 잠깐만.’
인유신은 퍼뜩 떠오른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귀속 아티팩트가 발현하는 능력은 제각각이다. 특히 귀속 아티팩트가 품은 기억이 방대할수록, 그 능력은 소유자의 숙련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반면 ‘일곱 문 너머의 세계’는 아주 심플하다. 죽은 자들의 땅. 명계.
설마 하며 이 분야 전문가인 상위 랭커 헌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제가 아티팩트를 전체 해방 하지 않고 힘의 일부만 쓴다면요…….”
현규하가 짐짓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을 받았다.
“저승과 이어지겠죠.”
“…….”
“귀신을 볼 수 있을 거란 얘깁니다.”
“저 이거 반품할래요.”
“공태성이 그 시도를 몇 년 동안 해 봤는데도 안 되더라고요. 포기하면 편합니다.”
“귀신 보면 어떻게 해요!”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내내 주인님을 지켜 주는 듬직하고 깜찍한 애완쥐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자, 빨리 이 너른 품에 와서 안겨요. 주인님을 위해 준비된 가슴입니다. 나 가슴 근육만 움직일 수 있는데 구경할래요”
“됐어요!”
자기가 귀신 보는 게 아니라고 천연덕스럽게 나불거리는 현규하가 정말 얄미웠다. 그리고 인유신은 절대 아티팩트를 일부 해방 하지 않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8세야……. 내가 너 때문에, 귀신을 보게 됐어…….”
“뿌우우”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추궁해 봤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평소에는 사람 말을 잘만 알아듣는 주제에 불리해지니 모르는 척하는 이 가증스러움이 참으로…… 참으로…… 참으로…… 귀엽다.
“요 나쁜 녀석!”
“끼룻!”
간지럽히는 시늉을 하자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앗, 저쪽은 청소를 제대로 안 해서 먼지가 좀 쌓였을 텐데…….
과연 거기까지 굴러가 버린 8세가 기침을 콜록거렸다. 얼른 들어서 살살 먼지를 털어 내 주었다.
“찍!”
그사이에 자다가 잠깐 깨서 케이지에서 탈출한 6세가 종종거리며 다가왔다.
“어, 내가 시끄럽게 해서 깼어 미안, 미안.”
손으로 살짝 안아서 케이지에 돌려놓으려는데 내려갈 생각을 안 했다. 그러더니 외려 손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냉룡의 비늘 위에서 자는 게 더 시원할 텐데.”
그래도 6세가 제 손에서 곤한 숨을 색색 내쉬면서 잠든 게 싫지는 않았다.
6세를 위해 낮에는 보통 에어컨을 켜 놓긴 하지만 손바닥의 체온 때문에 더울지도 모른다. 선풍기의 바람이 직접 닿지 않도록 각도를 잘 조절한 뒤 매트리스에 살그머니 앉았다. 어느 틈에 8세도 기어 올라와서 6세 옆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렸다.
오늘도 무더운 날이지만 양쪽 손바닥에서 몰랑몰랑하며 따끈따끈한 온기들이 느껴지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인유신은 살그머니 6세의 털을 어루만지면서 눈을 감았다.
저승과 이어질 수 있는 능력……. 햄스터의 수명은 길지 않다. 6세도 그가 테이밍하여 버프를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더라면 벌써 기력이 많이 쇠하였을 것이다. 6세가 편안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좋은 기억만을 주고 싶었다.
언젠가 6세가 해바라기씨 별로 떠나게 되면, 아티팩트의 능력으로 햄스터의 유령도 볼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리고 그 힘으로.
돌아가신 부모님도 만날 수 있을까.
무심코 떠올려 버린 인유신은 쓰게 웃으며 상념을 떨쳐 냈다. 돌아가신 지 14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다면 악령이 되었다는 뜻이니까. 살아생전 훌륭한 일을 많이 했던 부모님은 당연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다. 무엇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제 몫을 다하지도 못하고, 14년 전의 기억에서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못난 아들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