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214)
  • [던전의 보스 ‘삼목산의 산지기’가 사망했습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중기관총 난사로 너덜너덜해진 훔바바를 보며 인유신은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화력이 최고다. 조상님들이 괜히 화력 덕후인 게 아니었다.

    결정석을 챙긴 현규하가 손을 탁탁 털며 돌아왔다.

    “아티팩트 드롭은 없더군요. 팔놈이 왜 이 던전을 공략하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히든 보스까지 나와야 할 거 같습니다.”

    “왜 공략하라는 거였을까요 혹시 8세의 동생을 또 선물로”

    현규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온몸에 털이 무성한 그 괴생물체 말이죠”

    “……잊고 사는 사람 흔들지 마세요!”

    인유신이 다시금 떠오른 칼리칸트자로스의 삽화를 기억에서 허겁지겁 지우는 사이에 새로운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합니다.]

    무시무시한 단어인데 처음 겪었을 때와는 달리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게 신기했다. 인유신은 제 아공간에서 주섬주섬 뀨뀨를 꺼냈다. 그리고 인형의 한 팔을 흔들며 현규하에게 인사했다.

    “파이팅!”

    “…….”

    무척이나 심란한 표정이 된 현규하가 한숨을 푹푹 쉬며 마수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산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도 역시 마수들은 중력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이어질 일련의 과정이 정신 건강에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므로 인유신은 등을 돌리고 스피커의 볼륨을 더 높였다.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끼에엑! 캬악!”

    -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쿠웅! 퍽! 키야야야야!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끄에에에엑!”

    그냥 앉아 있기만 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다음에 던전에 올 때는 염주라도 갖고 와서 반야심경을 들으며 오랜만에 기도해야겠다.

    [던전의 마수가 전멸했습니다.]

    신나게 뽑아서 내던질 게 많았던 산은 아예 지형이 바뀌어 있었다.

    돌아온 현규하는 변함없이 멀끔한 얼굴이었지만 혹시 몰랐다. 게다가 이제 곧 히든 보스도 나타날 것이다. 인유신은 상체 아래로 시선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며 힐과 버프를 걸었다.

    “오늘도 날 흥분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님의 은총에 감읍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이도 나는 잘…….”

    “규하 씨! 히든 보스! 히든 보스 뭐 나올 거 같아요!”

    인유신은 다급히 그의 말을 끊어 먹었고, 현규하도 피식 웃으며 넘어가 주었다.

    “뭐, 길가메쉬 서사시니까 길가메쉬나 엔키두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시지가 히든 보스의 존재를 알렸다.

    [던전의 히든 보스 ‘허신 인안나’가 나타납니다.]

    인유신은 악의 없이 말했다.

    “규하 씨는 히든 보스를 이번에도 틀렸네요.”

    “…….”

    현규하가 검지와 엄지로 미간을 꾹 누르며 침음했다.

    “아니,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왜 인안나가 튀어나오죠”

    “인안나가 길가메쉬한테 집적거리다 차인 적이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건 훔바바를 토벌하는 던전인데.”

    어쨌든 다시 맞닥뜨리게 된 허신이었다. 아타베이라 때는 어떻게든 이길 수 있었다지만 과연 이번에도 괜찮을까. 인유신은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공간에서 ‘만두카이의 부스’와 ‘중긴 카툰의 벅특’을 꺼냈다.

    현규하도 따로 장만해 둔 크리스트교의 성유물, 롱기누스의 창을 꺼냈다.

    “일단 밑으로 내려가죠.”

    자질구레한 물품들을 정리하고 인유신을 안고서 하강하며 힐끔 곁눈질했다. 긴장한 얼굴이긴 했지만 처음 던전을 공략할 때처럼 당황하여 정신이 없는 표정은 아니었다.

    자신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증명에, 현규하는 희미한 미소를 올렸다. 이번에는 성유물도 있으니 그때처럼 인유신이 상처와 피에 놀라서 창백해진 얼굴은 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던전의 지축이 뒤흔들리며 웅혼한 기류가 몰아쳤다. 휘도는 마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커다란 결정석이 맺히고 뚜렷한 형상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허신의 강림이었다.

    이어, 압살당할 것만 같은 까마득한 존재감이 넓은 던전을 잠식했다.

    인안나.

    수메르 만신전에서 운명을 결정하는 일곱 큰 신의 하나. 사랑과 전쟁의 신이자 금성의 신.

    인유신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허신이라면 이미 만난 적이 있다. 하나 그 신은 미쳐서 격이 떨어지고 실추했던 신. 신성을 온전히 유지하여 현신한 주신(主神)의 위압감은 아타베이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다정한 손길이 어깨를 감싸고 나서야, 인유신은 자신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괜찮아요.”

    귓전에서 속삭임이 부드럽게 스미면서 숨통이 트였다. 현규하가 제아무리 가늠하지 못할 규격 외의 능력을 지닌 헌터라지만, 상대는 그림자의 파편에 불과할지라도 신이었다. 그런데도 괜찮다는 그의 속삭임을 들으니,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인유신의 낯에 핏기가 돌아오자 현규하가 고개를 올렸다.

    “당장 한판 붙을 거 아니라면 위압감 좀 낮춰 주시죠. 올려다보느라 고개가 떨어질 거 같네요.”

    【후후.】

    구름 위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공기를 진동시켰다. 한 걸음만 내디뎌도 던전을 양단해 버릴 것만 같았던 위압감이 삽시간에 줄어들었다. 짓눌려 있던 공기가 비로소 순환하며 바람이 불었다.

    대략 3층 높이의 건물 정도로 낮아졌을까. 여전히 올려다보아야 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는 느낌만이 어렴풋하게 들 뿐, 안개가 뿌옇게 낀 것처럼 형상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의 파편인 허신에 불과할지라도 인간은 신을 감히 바라보지 못함을 뜻하는 것처럼.

    【나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며 일곱 도시의 수호자로다. 네놈은 마치 길가메쉬를 보는 것 같구나.】

    “쌍놈의 새끼라는 욕을 고상하게 하네요.”

    인안나가 큭큭 소리 죽여 웃었다. 즐거운 듯한 웃음이었지만 인유신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인안나는 지극히 변덕스러우며, 또 잔혹한 신이다. 그녀가 주관하는 사랑과 전쟁이 그러하듯이.

    【아쉽도다. 5천 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너를 거두는 재미도 있었을 법한데.】

    “주인 있는 귀한 몸이니까 꿈 깨시죠.”

    【왕의 아들아.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와 삼승의 부탁이 네놈의 명을 유지해 주었음을 알렷다.】

    현규하의 등 뒤에 숨은 채 인유신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앞에 있는 사람이 성질머리 더러운 다혈질 신이든 뭐든 할 말 다 하는 그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한 평정심을 발휘하고 있다 할 만했다.

    ‘근데 삼승 삼승할망 삼승이라면 삼신할머니 아니야’

    삼승이라는 이름을 들은 현규하의 표정도 살짝 변했다. 그의 목소리가 약간 정중해졌다.

    “무슨 부탁이었습니까”

    【너희의 시간으로는, 어디 보자……. 19년 전이로구나. 그리고 29년 전, 어미의 태에 잉태되던 순간에도 널 보았던 적이 있노라.】

    “수정란 시절 봐서 뭐 하려고요.”

    【네가 어미의 태에서 헛되이 죽지 않도록 축복한 신이 몇이나 되는 줄 아는 것이냐 참으로 건방진 놈이로고.】

    현규하의 재킷을 붙잡은 인유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우르시토아레, 삼승, 인안나 이 세 신의 공통점이 떠올랐다.

    인안나가 고개를 돌리며 현규하의 뒤에 있는 인유신을 지그시 응시했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아이야, 묻고 싶은 게 있다는 표정이구나.】

    “저기……. 세 분 신이 전부 탄생과 연관이 있으신 거 같아서요…….”

    태어난 아이의 운명을 예언하는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 아이를 점지하고 태어나도록 하는 삼승, 그리고 잉태와 출산도 관장하는 사랑의 신 인안나. 전부 생명이 좀처럼 탄생하지 않는다는 이아드에서 제 역할을 하기 힘든 신들이었다.

    【그러하도다. 하나 이아드는 이제 나의 세계가 아니니라.】

    인유신이 의아해하자, 인안나가 설명을 계속했다. 현규하를 대할 때보다는 사뭇 부드러워진 태도였다.

    【우리는 무수한 세계의 만상을 관조하지만 개중에서도 특히 애착을 갖는 세계가 있게 마련인즉, 그 애착으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세계에 신명(神命)을 얽어매는 신들도 있음이라. 이아드는 둠네제울이 친히 왕을 내세운 세계이니 휘하 만신전의 신들에게 어찌 각별하지 않으랴.】

    “그럼 인안나 님은 그 세계를, 떠나셨다는 거예요”

    【멸망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며 많은 신들이 눈을 거두었느니라. 나도 우르시토아레와 삼승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미 끊어 냈을 게다. 그 부탁 때문에 19년 동안 지속해서 게이트를 연결하고 있었는데 이아드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나를 만나러 오긴 했구나.】

    “그래서 부탁이 뭔데요.”

    퉁명스럽게 말을 끊는 현규하에게 인안나는 손을 내저었다.

    【네놈에게는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더니 인유신에게는 빙긋 미소를 하는 듯했다.

    【너에게 주겠노라.】

    “예”

    깜짝 놀란 인유신이 되묻기도 전에 인안나의 존재감은 차츰 흐려졌다.

    【아이야. 너는 다정한 게쉬틴안나(포도주의 신)를 닮았도다. 게쉬틴안나처럼 다른 이의 운명을 나누어 짊어지는 일은 없도록 하거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인안나는 완전히 사라졌다. 광채가 찬란한 커다란 결정석만이 그녀가 존재했던 자리에 떨어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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