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214)

어머니가 신이며, 아버지가 인간인 반신반인의 영웅이 있었다. 그는 강대하고 위대한 통치자였으나 동시에 거만한 폭군이었다.

고통을 받던 백성들은 신에게 호소했고, 신은 진흙으로 그를 만족하게 할 짝을 만들었다. 폭군과 진흙으로 빚어낸 인간의 결투는 무승부로 끝났고, 이어 절친한 벗이 되었다.

그들은 신의 대리자로서 산지기 괴물을 토벌하기 위한 여정을 나섰다. 그곳이 바로 지금 인유신의 발아래에 펼쳐진 삼목산이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는 길가메쉬 서사시잖아요. 우와.”

신성한 산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발밑의 숲들로부터 청량한 음이온과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비록 그 숲이 온통 마수로 뒤덮여 있는 상태라고 해도.

던전 안의 유일한 생명체인 현규하와 인유신을 향해 마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물론 둘이 허공에 떠 있었기에 비행형 마수가 아니면 접근할 수도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저 밑의 바닥에서 헛되이 뛰어오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수들을 사냥하는 현규하의 공격은……. 인유신은 저 모습을 뭐라고 묘사하면 될지 고민하다가 그냥 물었다.

“새 무기 장만했던 거예요”

“이번에도 메이드 바이 권성길.”

현규하가 사이코키네시스로 움직이고 있는 건 커다란 망치였다. 저 망치가 천둥의 신 토르의 무기인 묠니르라면 인유신도 오오 했을 텐데 저건, 솔직히…… 뿅망치 같았다.

뿅망치가 바닥을 뿅뿅 내리칠 때마다 그 밑에 깔린 마수들은 퍽퍽 머리가 깨지거나 몸이 으깨져 죽었다.

“제법 쓸 만하죠 마수들을 후려쳐도 손상되지 않을 만큼 튼튼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경을 쓴 건 방음입니다. 망치를 감싼 가죽이 마수들을 박살 내는 소리나 비명을 전부 흡수하거든요.”

“그렇게 제작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총은 화력은 센데 너무 시끄럽잖아요. 유신 씨랑 데이트하는 데 방해되니까요.”

인유신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마수들의 괴성까지 사라진 건 아니지만, 단말마의 비명이라든가 파육음 같은 참혹한 소리는 들리지 않으니 훨씬 나은 거 같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규하는 큼직한 스피커까지 꺼냈다. 트로트 메들리라도 틀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재생된 건 인유신이 자주 듣다못해 줄줄 외울 수도 있는 소리였다.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

목탁 두드리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반야심경 독송이 던전 안에 울려 퍼졌다. 수메르 신화와 불교가 짬뽕이 된 현장에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인유신과는 달리 현규하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역시 유신 씨도 익숙한 게 좋죠”

절에서 자란 인유신에게는 당연히 익숙한 소리이긴 한데…….

‘아니, 반야심경으로 마수들의 소리를 덮어도 되는 거야’

승려들이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믿음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므로 인유신은 부처님 오신 날에만 절에 가는 나이롱 신자였다. 나이롱 신자는 어설픈 지식으로 합리화를 했다.

‘그래. 마수들은 일종의 마라(불교에서 말하는 악마)니까 경전으로 물리쳐야지!’

나름대로 납득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인유신은 반야심경 독송을 들으며 시선을 먼 곳으로 움직였다.

울창한 수림 사이로 시원한 계곡물이 흘러간다. 멋진 풍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발밑에서 마수가 몸이 으깨져 죽고 있었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내가 써 본 것 중에는 이게 차광이 젤 좋더라고요.”

현규하가 커다란 파라솔까지 꺼냈으므로 햇빛에 눈이 부실 일도 없었다. 던전에서는 파라솔을 쓸 일이 많은 걸까 그다음으로 꺼낸 건 햄스터 모양의 도시락 통이었다. 인유신은 두근두근하는 심정으로 도시락 통의 뚜껑을 살그머니 열고는 탄성을 질렀다.

“이거 직접 만들었어요”

“맘에 들어요”

“완전 귀여워요!”

내용물까지 설마 했던 캐릭터 도시락이었다. 물론 햄스터다. 먹기도 아쉬워서 쳐다보고만 있는데 현규하가 싱긋 웃고는 유부로 밥알을 감싸 만든 작은 햄스터를 젓가락으로 들어서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얼떨결에 우물거리면서 씹자 자신까지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또 만들어서 갖고 올게요. 예전에 식단 관리해 줄 때도 그랬지만 유신 씨가 먹는 걸 상상하면서 요리하는 게 즐거워요.”

“저도 규하 씨 요리가 맛있어요.”

우물거리던 햄스터 초밥을 꿀꺽 삼킨 후 얼른 덧붙였다.

“몸이 너무 건강해지는 음식만 빼고요.”

“사실 식단 관리는 나한테 필요하거든요.”

“어, 규하 씨도 몸 유지하려고 꾸준한 식단 관리 같은 걸 하는 거예요 벌크 업”

“뱃살 붙여야죠.”

“살 안 쪄도 돼요! 진짜요!”

그렇게 직접 만들어 온 도시락을 까먹으며 풍광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자니 정말 소풍 같았다. 눈을 발밑으로 돌리지만 않는다면.

-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정겹게 울리는 반야심경을 들으며 인유신은 아까 현규하가 풀이 죽는 바람에 묻지 못했던 걸 다시 질문했다.

“평행 세계가 어떻게 나뉘는 건가요 ®ÀÇ랑 이쪽 철의 시대처럼 신화적인 무언가 때문이에요”

“비슷해요. 어딘가에는 도시를 완공하기 위해 왕이 형제 중의 부인을 주춧돌 밑에 묻은 세계도 있을 겁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현규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도시락 통에서 문어 소시지를 젓가락으로 집었다.

“나는 이 소시지를 먹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먹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버리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어요. 이런 선택이 분기점이 되어 세계는 무한히 갈라져 나가는 거예요.”

“으음, 하지만 규하 씨가 소시지를 먹든 안 먹든 뒷일이 바뀔 거 같지는 않은데요.”

“그렇죠.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예를 들어서, 음…….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바뀌었을 거 같아요”

아하. 인유신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치만 그때 고려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랐으니까 어떻게든 조선이 건국되지 않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죠. 요동 정벌을 얼레벌레 성공했을 수도 있고, 우왕이 번개라도 맞고 대오 각성 해서 고려를 중흥했을 수도 있는 거고. 게다가 유신 씨도 알겠지만 국제 관계는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잖아요.”

현규하가 많이 줄어든 마수들을 내려다본 뒤 설명을 이었다.

“국공내전(중국에서 발생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에서 국민당이 양쯔강 방어전을 어느 정도 성공한 결과로 대륙이 둘로 쪼개졌잖아요.”

“공산당이 잘났다기보다는 국민당이 너무 막장이어서 그 정도나마 사수한 것도 거의 기적이었다면서요”

“그러니까요. 양쯔강 방어선이 무너졌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았죠. 만약 그렇게 국민당이 쫓겨나서 그 밑의 큰 섬에, 이름이 타이완 맞죠 아무튼 그 섬에 틀어박히거나 완전히 몰락한 평행 세계라고 가정해 봐요.”

상상해 본 인유신은 무심코 혀를 내둘렀다. 대륙의 일부가 남중국으로 쪼개진 상황에도 북중국은 언제나 북중국다운 행보를 보였는데, 그 큰 땅을 다 갖고 있으면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남중국과의 육지 국경선을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면 6·25 때 북중국은 훨씬 더 많은 병력을 투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생각입니다.”

“참,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승기한테 들은 건데 옛날 북한 땅에 김일성의 노년 초상화로 보이는 게 발견되기도 한댔어요. 진짜 6·25 때 통일이 안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네에. 바로 그런 선택이나 결과로 인한 분기점이 평행 세계라는 거죠.”

“통일된 한국에서 산다니 국뽕이 다시 차오르는 거 같아요.”

“국위 선양으로 국뽕을 채워 주는 세계구급의 사랑스러운 헌터가 주인님의 옆에 있으니 앞으로도 마음껏 뽕을 채우도록 하십시오.”

“아, 맞다.”

현규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잊고 있었다는 반응인데.”

“에이, 규하 씨가 대단한 헌터라는 걸 제가 설마 까먹었겠어요”

시시덕거리는 사이에도 뿅망치는 멈추지 않았고, 드디어 마지막 뿅뿅이 끝났다.

[던전의 마수가 전멸했습니다.]

[던전의 보스 ‘삼목산의 산지기’가 나타납니다.]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싸운 삼목산의 산지기, 훔바바는 흉측한 외견만큼이나 강한 괴물이었다. 최고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길가메쉬도 속임수를 써서 겨우 죽였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길가메쉬에게도 총이 있었다면 훔바바가 무섭다고 떨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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