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214)

황홀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 위로, 며칠 전 8세를 천재 햄스터라 추켜세웠던 자신의 모습이 겹쳤다. 인유신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러지 말아야지.

현규하가 진정하기 위해서는 17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후우. 세상에 유례없는 천재와 말을 섞게 되다니 영광이네요.”

17분 동안 민망해서 얼굴이 벌게진 인유신은 마찬가지로 홍조를 띤 현규하의 입술에 테이크아웃한 커피 컵의 빨대나 물려 주었다.

“음, 이제 그만 닥치라는 뜻이죠”

“비슷해요.”

“부정하지 않는다니 주인님이 날 닮아 가고 있는 거 같아서 흐뭇하네요. 아무튼 유신 씨 생각이 맞습니다. 제물로 바쳐진 쌍둥이 중 누이는 지하에 묻혀 명계의 주민이 되었고, 쌍둥이 중 오빠는 지상에 남아 신에 의해 불로불사가 되었어요. 기왕 세계를 지탱하는 왕으로 삼았으니 뽕을 뽑아 먹겠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오빠가 뱀파이어가 된 거예요”

“그 전설이 전래된 구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일대에서 불로불사라면 역시 뱀파이어니까요. 만약 영국이었다면…… 타임 로드가 되었겠죠.”

“갑자기 장르가 신화에서 SF로 바뀌었는데요!”

궁금증은 해결되었지만 정작 제일 궁금했던 건 따로 있었다.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될 문제 같아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현규하가 먼저 선선히 웃었다.

“쌍둥이 중 오빠가 내 아버지 맞습니다. 묻힌 건 고모고요. 둘 다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지만요.”

그러면서 인유신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하고 가볍게 맞대었다.

“이게 궁금했던 거죠”

갑자기 시야에 훅 들어온 현규하의 얼굴에 인유신은 속눈썹을 몇 차례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규하 씨가 왕자님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아버지가 기원전부터 살았던 분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니까 놀라움을 지나서 아무 생각이 안 들어요.”

“왕자라고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유신 씨가 부르니까 가슴이 설레네요. 앞으로 애칭은 그걸로 합시다.”

서로를 왕자님과 주인님이라 부르는 게이 커플.

그것을 상상해 버린 인유신은 식겁하여 눈앞이 어지러워질 만큼 빠르게 내저었다.

아버지가 기원전의 사람이든 뱀파이어든 현규하는 현규하였다. 인유신은 왕자님이라고 안 불러 준다고 대번에 풀이 죽은 현규하를 끌고 공태성이 매입한 지속 게이트로 갔다.

샤이닝 길드에서 넘긴 던전이니 지키는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길드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명 서 있었다.

“현규하 헌터님 맞으시죠 나르샤 길드장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광대뼈를 들썩거리면서 사인지를 내미는 걸 보니 현규하의 팬들인 모양이었다. 인유신은 현규하가 사인하다가 또 ‘앙’이라고 삐끗하는 걸 못 본 척했다.

“클리어하실 때까지 저희가 지키고 있을 테니 편히 다녀오십시오!”

“던전 스틸하려고 들어오는 인간들은 실수인 척하고 마수랑 같이 죽이면 되니까 상관없는데.”

“하하! 규하 씨 농담이 조금 살벌하죠 다녀오겠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인유신은 급히 현규하의 등을 밀면서 게이트를 넘었다. 그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쇄신해야만 했다.

[던전 리셋까지 남은 시간  12시간 23분 45초]

던전은 한여름인 바깥보다 더 더운 날씨였다.

인유신은 혀를 내둘렀다. 우리나라보다 더 더운 곳이 있다니. 그나마 건조한 탓인지 한국의 여름처럼 습기 때문에 숨 막히는 느낌은 없었다.

“생각보다 더 덥네요.”

현규하가 아공간에서 선풍기를 더 꺼내고 스크롤들도 인유신의 머리 위에서 좍좍 찢었다. 그거로도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팔찌에 자신의 마나를 주입한 뒤 끼게 했다. 냉기 효과의 스크롤과 아이템을 착용하니 에어컨을 켠 것처럼 서늘해졌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얻은 인유신의 눈이 차츰 커다래졌다.

“오.”

반면, 현규하는 즐겁게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등산 코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원시림이 조성된 높은 산이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까지 작게 들리고, 숲 사이로는 좁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저 오솔길은 아마도 가파른 산 정상까지 이어질 것이다.

인유신은 잠자코 현규하의 왼쪽 팔을 올리고 옆구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제 허리를 붙잡게 했다.

“날아가면 금방이겠죠”

눈동자를 굴리면서 조마조마해하는 인유신을 내려다본 현규하가 이번에는 넘어가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어 그의 허리를 안은 채 몸을 띄웠다.

인유신이 안도의 숨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근데 규하 씨, 손이 자꾸 허벅지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제 착각이죠”

현규하가 한숨을 폭 쉬며 슬금슬금 아래로 움직이던 손가락을 원위치로 되돌렸다.

“주인님의 감도가 너무 좋은 게 애석할 때도 있네요.”

그딴 거 느낄 기회도 없었으면서 무슨 소리인지. 그러고 보니 저번에 영화관에 가자고 했을 때도 허벅지를 만지고 싶다고 했었다. 혹시 허벅지를 유달리 좋아하는 걸까.

“왜 허벅지를 만지고 싶어 하는 거예요”

“당신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한 전초전이니까요. 먼저 허벅지 스킨십에 익숙해지면 조금 더 은밀한 부위까지 은근슬쩍 만질 수 있을 테고, 언젠가는 유신 씨의 엉덩이도……. 후, 후후후.”

“…….”

소리 죽여 즐겁게 웃는 현규하의 옆구리에 끼인 채, 인유신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을 떠올렸다. 그렇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손가락이 허벅지에 닿았을 때 올라왔던 간질간질한 감각이 생각나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멀리 던전의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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